예술 습관으로 내적 풍요...' 일상에 예술을 더해보자'
나에게 안부를 물을 때면 제 때에 식사를 하였는지를 묻곤 한다. 아직도 무언가 바쁜 일이 있을 때면 밥 먹는걸 후 순위로 하고 다른 어떤 상황에 몰입하는 나의 습성 때문이다. 사실 내가 밥 먹는 걸 잊어버리고 그 무언가에 몰입해 있을 때는 대부분 어떠한 예술이 매개된 상황 속에 있을 때다. 음악과 함께이거나, 책을 보거나, 공연장에 있거나 전시장에서 나를 압도하는 예술작품 앞에 설 때면 식사 즉, 먹는 행위를 내적 풍요와 맞바꾼다. 그러니 엄밀하게 말하면 밥을 먹지 않는 게 아니라 나는 영혼의 밥을 먹고 있는 셈이긴 하다.
직장에서 점심시간 틈틈이 시간을 낼 때면 점심시간이 12시부터 오후 1시 까지라 차를 가지고 이동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예술을 만날 시간이 빠듯하니, 차 안에서 간단히 배고픔을 때우곤 했다. 이마저 시간이 안되면 한 끼쯤 건너뛴다. 그럼에도 예술은 분명 영혼의 밥이 되어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하루 삼시세끼 문화가 일반화된 것도 근대화 이후의 일이라고 한다. 우리 민족에게 식사를 뜻하는 단어는 아침과 저녁을 가리키는 조석(朝夕)만 있었다. 19세기 중엽의 학자 이규경(李圭景(1788∼1863))이 쓴 백과사전 형식의 책 <오주연 문장 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낮이 길고 일을 많이 하는 음력 2월부터 8월까지 일곱 달 동안만 하루 세끼를, 낮이 짧고 일이 별로 없는 9월부터 2월까지는 하루 두 끼를 먹는다"라고 기록되었다. 늘 하루 세끼를 먹는다는 것도 어찌 보면 동시대의 문화일 뿐이다.
같은 공연을 여러 번 반복해 관람할 때가 있다. 공연 때마다 상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같은 연주자인데도 오늘의 연주가 다르고 내일의 연주가 다르다. 수많은 요소들이 연주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그날그날의 관객들의 반응은 더 좋은 공연으로 만드는 마지막 한 끗 차이다.
음악가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은 언젠가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고 한다. "작곡은 제게 큰 기쁨입니다. 창작의 기쁨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시끄러운 소음이 가득한 생활 속에서 단 한 시간만이라도 자기를 잊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까요." 이처럼 창작의 기쁨은 더 말할 나위 없겠지만 문화예술향유의 기쁨 또한 그에 못지않다. 사실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권리이다
그 이름만으로도 우리에게 익숙한 프랑스의 루브르(Louvre) 박물관은 혁명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1792년 왕정 폐지를 기념하는 축제에 맞춰 그 이듬해인 1793년 8월에 개관한 이 박물관의 권력의 핵심부이자, 권력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소수의 특권층의 소유였던 루브르 일대의 공간, 예술작품 모두를 공공의 것, 프랑스 국민의 것임을 보여줬다 사실 국립이나 시립미술관 모두는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예술적 권리를 우리는 찾아야 한다. 애착심을 가져야 한다. 예술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매일의 식사를 챙기듯 일상에서 예술을 가까이하는 습관을 의식적으로라도 챙겨야 한다
나는 약속이 있을 땐 미술관 카페를 많이 이용한다
“남서울 미술관 있지? ”
“응?”
“사당역 6번 출구에서 나와 조금만 걸으면...”
“우리은행 옆에 있는 건가?”
“그렇지”
남서울 미술관은 입장료도 무료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가서 전시를 보고 카페로 간다. 앞마당 잔디도 좋다. 미술관에 들어가지 않더라 또 만남의 장소를 미술관 카페로 하다 보면 그냥 만남의 장소였다가... 우연히라도 예술과 만나게 되고, 궁금해지고 가까이하게 되면 언젠가는 예술에 대한 부담감이 없어질 것이다.
그림을 잘 그리고, 노래를 잘하는 것만이 예술이 아니다
인간이 지닌 감각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는 심미적 활동이 예술이다
이를 통해 “그래 세상은 아름답고 살만한 가치가 있네”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심 궁극의 예술이다 “
주변 친구들, 동료들을 봤을 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나이가 사십 대 후반쯤 오십 대 초반 무렵쯤 되면 "내가 늙어서"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쓰고 스스로 늙어간다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면서 이제 늙어서 직장이든 인간관계에서 새롭게 무언가를 하는 것이 머뭇거려진다고 한다. 몸에서 느끼게 되는 늙음의 신호랄까? 시력과 근육량 등 체력의 감퇴, 기억력의 감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나이는 단지 숫자가 아니라 기분, 마음가짐의 상태가 아닐까?
급속하게 고령사회가 진행되고 있다. 평균수명이 연장되면서 지금은 '100세 시대',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 시대'라고 한다.'100세 시대'란 모두가 100세까지 사는 시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노력만 한다면 우리 중 상당수는 100세까지 살 수 있는 시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모든 제도나 시스템, 그리고 국민들의 인식은 여전히 '인생 80세 시대'에 머물고 있다. 교육이나 취업, 정년제도 등의 인생 플랜이 20대까지 습득한 지식으로 50대까지 일하고, 60대에 이르면 할 일이 없는 삶을 가정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2060년에는 남자 86.66세, 여자 90.3세로 연장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100세 시대 도래와 초고령화 사회 진입에 대한 보고가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다.
이럴 때 지금껏 제대로 하지 못했던 문화적 예술 활동에 마음을 쏟아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든다.
”일상에 예술을 더해보면 어떨까? “ 특히 노년의 시기에 접어들면 신체적인 것만으로도 자존감이 낮아질 수 있다. 신체 능력의 급격한 저하, 주변과의 관계의 변화, 시간적 여유가 많아지면서 더 이상 사회에 쓸모없는 존재가 된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존감이 낮아질 수 있다
예술은 나란 존재를 새롭게 발견하게 한다. 새롭게 상상하고 손으로 무언가를 만지작거려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예술적 행위는 예기치 못한 기쁨의 정신세계로 데려간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간다. 그 과정에서 자존감이 회복된다.
노년기에 만나는 문화예술은 그래서 '나란 존재의 예술'이 된다.
문화 예술적 활동은 몰입감을 선물한다. 몰입을 통해 직접 무언가의 결과물을 거듭 만들어 내는 과정. 즉, 몰입하는 세계가 있으면 무엇보다 외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