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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Mar 24. 2022

지나간 부업의 계절

2010년도에 둘째가 첫 돌을 맞았다. 셀프로 돌잔치를 준비하다가 문득 나도 집에서 부업으로 돌 답례품을 팔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 같은 연애 중에 첫째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았을 때 남편은 대학교 졸업 직전이었다. 졸업 후 바로 취업이 되기는 했지만 첫 달부터 터무니없이 적은 돈으로 살림을 시작해야만 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동안 남편은 안정된 직장을 얻었고, 18년을 근속하며 잘 다니고 있지만 지금까지 오는 동안 금전적으로 참 우여곡절이 많았다.


남편에게 300만 원을 달라고 해서 생애 최초로 부업을 시작했다. 발품을 팔아 타월 공장을 알아냈고, 근교에 그릇공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직접 찾아갔다. 속된 말로 '거래처를 뚫은' 것이다. 몇 개의 업체와 계약을 맺기까지 수도 없는 거절도 당해야 했다. 실망도 컸지만 재밌었다. 그 사이 재봉틀도 배워서 특이한 상품들을 제작했고 시장에서 잡곡을 떼다가 소분해서 팔기도 했다. 멋들어지게 사진 찍는 기술도 익혔고 홍보의 요정이 됐다.


인터넷에서 답례품이라고 검색하면 너무 많은 업체가 쏟아졌다. 그들은 나보다 마진 폭이 넓었다. 대형 창고를 소유하고 그곳에 얼마나 많은 상품을 채워 놨느냐가 관건인 듯 보였다. 나는 스물네 평 아파트에서 전자상거래로 시작했으므로 물건을 적치할 공간이 전혀 없었다. 박리다매의 벽을 넘기가 너무 어려웠다. 마진이 적다고 물건을 비싸게 팔아서는 승산이 없었다. 가격은 같이 하되, 남다른 서비스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포토샵이었다.


포토샵 책을 사다가 기본적인 것을 독학했다. 몸 부분은 작게 줄이고 아이의 얼굴은 크게 키워서 화질 좋은 프린터로 인쇄했다. 모양대로 오리고 폼보드를 사다가 붙인 후, 우드락 커터기로 예쁘게 자르면 완성이다. 그 아래에 스탠딩이 가능한 꽂이로 흔들흔들 귀엽게 만들었다. 답례품 80개 이상 구매 시, 대두 스탠딩 5종을 무료로 준다고 광고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점점 관심을 가졌다.


당시 전자상거래는 홈페이지나 인터넷 카페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홈페이지는 도메인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나같이 부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인터넷 카페가 편리하고 좋았다. 소비자는 '가입'이라는 까다로운 절차를 흔쾌히 응해주었고 2년을 꼬박 했을 때 내가 운영하는 카페는 회원이 4천 명에 육박했다.


밤잠을 줄여야 했다. 아이들은 점점 방치되었다. 어린이집에 다녀오면 간식만 먹여놓고 일하기 바빴다. 가뜩이나 좁은 집이 더 좁아졌다. 모든 물건이 집에서 발송되었기 때문에 집은 박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아이들은 박스들을 타 넘고 다녔다. 물건을 넣으려고 잘 만들어 놓은 큰 상자에 들어가서 놀기도 하고 박스 위에 올라앉아서 인형놀이를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일도 많은데 공간이 없어서 위로 높게 쌓은 박스 사이에서 서너 살짜리들이 놀고 있었다. 포토샵 주문은 점점 늘었다. 무료로 발송해 주는 것 이외에도 몇천 원씩을 받고 포스터, 덕담카드, 배너 일속을 만들기도 했다. 나중에는 급기야 동영상 제작까지 했다. 아이디어가 샘솟고 상품을 개발할 때마다 잘 모르는 프로그램들을 배워야 했다. 그 사이 입소문을 타고 주문은 늘었다. 혼자 감당할 수가 없었다.


결국 맘 카페에 포토샵 할 사람을 구한다고 적었다. 근교에 사는 아기 엄마 최가 해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최에게 포토샵과 관련된 모든 일을 넘겼고, 나는 발주하고 출고하는 일에만 주력했다. 실수와 부담이 한 번에 줄었다. 능률이 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늘어난 주문에 고투하고 있었다. 급기야 남편이랑 관계도 안 좋아졌다.  남편 입장에서는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편안하게 쉬고 싶었을 텐데 잠이 늘 부족해 짜증이 섞인 데다가 항상 충혈된 눈으로 뭔가에 집중하는 아내와 구석구석 쌓인 박스들, 늘 텔레비전만 보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좋은 말이 나올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치우고 포장을 돕고 무거운 것을 들어 옮겨주는 남편 덕분에 어찌어찌 이어가는 일이었는데도 난 늘 일에 치여서 고마운 줄 모르고 짜증을 냈다.


결국 포토샵을 도와주던 최에게 혼자 맡아서 해보겠냐고 물었다. 그는 그러겠다고 했다. 마치 가게를 넘기듯이 카페와 모든 물건과 거래처를 위임하고 소정의 권리금을 받았다. 답례품을 오랫동안 하려고 큰 집으로 이사도 했건만 몸도 마음도 피폐해지는 기분이라 더 진행할 수가 없었다.




얼마 전, 최에게 전화가 왔다. 카페에 올린 글을 지워줄 수 있겠냐는 것이다. 2011년에 대두 스탠딩을 주문한 한 엄마가 연락이 와서 게시글을 삭제해 줄 것을 요청했단다. 아이 이름이 독특해서 인터넷에 검색을 하면 그 사진이 바로 뜨는데 학교에서 어떤 친구가 검색을 했고 그 후부터 아이들이 놀린다는 것이다. 대두 스탠딩이나 포스터는 아이들의 사진이 들어갔고 엄마가 오케이 사인을 주어야만 출력을 했기 때문에 제목에 이름 석자가 박힌 게시물이 많았다. 우리가 볼 때는 귀엽지만 친구들이 볼 때는 놀리기 안성맞춤인 모양이었다. 휴면계정을 풀고 들어가 사진을 모두 지웠다.


내가 10년 전에 올린 게시글은 2000개가 넘었다. 아이들의 실명과 사진이 박힌 게시글은 800개가량 됐다. 모두 지우는데 두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카페는 무용해졌고 최는 카페를 방치한 채 혼자 탈퇴해 버렸다. 나라면 게시글을 모두 지우고 회원들을 다 내 보낸 다음에 카페를 폐쇄했을 테지만 최는 일이 바빴는지 혼자만 탈퇴했다. 카페는 운영자가 없어서 폐쇄가 불가능한 유령카페가 돼 버렸다. 악성 게시글이 2019년까지도 올라와 있었는데 지워줄 사람 없이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다.


그래도 한때는 내게 소중한 공간이었는데 그렇게 돼 있으니 가슴 아팠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의 얼굴이 그렇게 노출돼 있다는 게 가장 미안했다. 다른 아이들도 언젠가 불쾌함을 가질지 모를 일이었다. 서둘러 지우면서 부업의 계절에 대해 생각했다. 힘들었지만 그래도 육아하면서 홀로 저만큼 해냈던 자랑스러운 시절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만들었던 모든 제품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죽지도 못하고 박제된 수많은 게시글들을 무작위로 지웠는데 생각해보니 몇 개쯤 캡처라도 해둘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나름대로 추억인데 말이지.


 사진을 지워달라고 한 그 엄마가 아니었다면 그 카페가 그런 모양이란 걸 몰랐을 것이다. 그 포털사이트 자체를 잘 들어가지 않고 있고, 카페는 더더욱 내 관심 밖이었다. 가게를 넘겼는데 전 주인이 맨날 와서 기웃거리는 꼴이라 카페에 관해서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최가 답례품을 관두고 취업을 했단 걸 알았을 때도 나 사는 게 바빠서 카페는 어떻게 됐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글을 모두 지우고 나니, 내 20대의 한편이 어딘가 강제 종료된 기분이 든다. 그동안 관심도 없었으면서 무슨 억지 감상이냐 싶었다가도, 그 시절 내가 살려고 얼마나 버둥댔는지 기억이 나서 한동안 소회에 잠겼다. 어린 나이에 결혼과 출산을 거의 동시에 하고서 집에 아이랑만 있으니 자주 우울했다. 17개월부터 어린이집에 서둘러 보내고 일자리를 구해봤지만 아이가 아플 때마다 일을 관둬야 했다. 아이가 있다는 말에 취업 문이 자주 닫혔다. 우울감과 열패감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둘째가 생기고, 독박 육아의 외로움을 이겨내고자 또래의 엄마들을 많이 만났지만 그때뿐이었다. 육아와 살림의 기쁨은 방판 아줌마보다도 적게 찾아왔다. 그때 우연찮게 찾은 부업은 내게 색다른 즐거움을 몰고 왔다. 주변의 인정은 마치 세계의 인정과도 같았고, 넉넉해진 지갑 덕분에 마음까지 풍성한 기분이었다. 몸은 고단해도 급한 일을 끝내 두고 늦은 새벽 아이들 곁으로 기어 들어갈 때의 안락이란 지금의 그것과 쉽게 비교할 수 없다.


코로나 이후로 예전만큼 화려한 돌잔치는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은  답례품을 거의 하지 고, 한다 해도 100개씩불가능이다. 10 전엔 아빠, 엄마가 같은 지역에서 직장에 다니면 200개는 기본이었다. 주방장갑이나 패브릭 수건은 내가 직접 재봉틀로 만들었는데 그게 답례품으로 200개씩 들어오면 나와 남편은   동안 손에 물집이 생길 만큼 원단을 오렸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짜증은  넣어두고 상냥하게 도와달라고 말할  있을 텐데.


아무튼 나는 일하는 엄마로 살아남았고, 10년이라는 세월은 훌쩍 흘렀다. 답례품을 주문했던 수많은 부모들과 아이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주문을 미리 받기 때문에 남들보다 한두 달은 먼저 사는 것 같았던 부업의 시절은 세월 따라 그렇게 가버렸다. 10년 후에 난 또 뭘 하면서 지금을 회상할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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