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박 Aug 26. 2023

이제 와서 멍청이라니!

멍청비용 활용서


요즘 멍청비용이라는 말에 꽂혔다. 무엇을 사려고 할 때마다 그 단어를 떠올렸다. 활활 타오르는 구매욕으로 들어 올렸던 물건도 ‘멍청’이라는 말이 떠올라 그냥 내려놓기도 하고 꼭 필요해서 샀으면서도 혹시 ‘멍청’스러운 충동구매는 아니었는지 재고한다. 집을 둘러보다가 몇 년 전에 사두고 별반 사용하지 않은 물건을 발견하면 나야말로 ‘멍청’했었노라 고백하며 한탄한다. 결혼 생활 18년 동안 분별없이 사모으거나 흩어버린 ‘멍청비용’이 너무 많아 우울하다. 가정형편이 별반 나아지지 못한 것이 모두 그 멍청비용 때문인 것 같다. 살면서 골몰했던 모든 일들은 소비를 불러일으켰고 그때는 간절했던 모든 것들이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바라보니 헛되고 헛되다. 그야말로 무쓸모의 향연이다. 내가 했던 모든 선택이 후회스럽다. 나는 왜 그랬을까?


더 이상 꽂을 데도 없건만 오늘 책이 또 도착하였다. 모두 내 책이다. 책이 왜 멍청비용인가하니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 사는 경우도 많지만 읽을 것 같아서 사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다른 무엇을 위하여 살 때도 많았다. 간택받지 못하고 독수공방 하는 궁인이나 된 듯 서가 한편을 오롯이 지키는 책들이 태반이다. 한 번도 열리지 못한 채 하얗던 책등이 노랗게 물든다. 오늘 그런 책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아, 또 떠오른다. 멍청비용.


이미지출처 픽사베이

교습소를 다시 시작한 지 몇 달 되었다. 10년 전에 사용했던 자료들을 새 교습소로 옮길 여유를 찾지 못하다가 남편이 갑자기 집안 곳곳에 변화를 주기로 하는 바람에 베란다 구석에 처박힌 박스들을 모두 꺼내게 됐다. 닫힌 지 십수 년이나 됨직한 몰골로 어서 와 오랜만이야 인사를 건네는 박스 겉면엔 ‘박 OO 자료’,‘강의 자료’,‘학원자료’ 등이 명백한 나의 글씨로 적혀 있었다. 옆으로 휘갈겨 쓴 글씨엔 ‘언젠가 반드시 사용할’이라는 다짐이 못 박혀 있었지만 그 기간이 이렇게나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하나씩 열어서 재사용할 것을 추리는데 이미 많은 자료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꽤 많은 양을 버려야만 했다. 너무 오래된 책이라서, 더 이상 꽂을 곳이 없어서, 이제 사용하지 않는 자료들 이어서이기도 했다. 진작 버렸어야 했다. 교육철학과 직업정신으로 밤늦도록 학생 글을 봐주던 20대의 나와, 내 아이를 가르쳐보겠다고 반 친구들과 묶어서 끙끙거리던 30대의 나도 같이 버려지는 것 같아서 마지막까지 보류했던 것들이었다. 끝내 남아 있던 책들을 우르르 재활용장에 쏟아 넣으면서 아, 저 때 책 조금만 샀으면 그 돈을 아꼈으면 지금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전혀 인과관계가 없어 보이는 탄식을 내뱉었다. 이게 다 그 ‘멍청비용’이라는 말 때문이다.



낡은 상가에 교습소를 얻은 이유는 보증금과 월세 때문이었다. 세가 비싼 곳으로 가면 학생이 많아질 확률이 크지만 본래 가지고 있는 돈이 적어서 욕심부리지 말고 시작하자 생각했다. 열악한 건 사실이었다. 입주했을 때는 겨울이라 몰랐는데 여름이 되니 충격적인 손님이 찾아왔다. 학원으로 들어서는데 내 손가락 두 개만 한 바퀴벌레가 여기저기서 쉬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을 잡기는커녕 죽은 것을 치우지도 못하는 나약한 나는 극심한 공포로 덜덜 떨었다. 남편이 달려와 처리한 후에도 출근 때마다 사체를 마주해야 했다. 옆의 학원은 괜찮다는데 왜 우리 학원에만 바퀴가 들어오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아무래도 1층 슈퍼가 리모델링을 하면서 그 안에 살던 애들이 소리에 놀라 위로 피신한 것 같았다. 하필 우리 학원엔 수전이 있었다. 며칠을 골몰한 끝에 원인이 그곳이라는 걸 알게 됐고 남편이 수전을 막아버리고 나서야 커다란 먹바퀴들의 출현이 줄어들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새끼 바퀴로 추정되는 작은 벌레가 또 배를 뒤집고 죽어있는 게 발견됐다. 진짜 바퀴벌레 새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전에 만난 먹바퀴의 잔상 때문에 보드마카 뚜껑도 바퀴로 보일 지경이었다. 더듬이가 몸보다 더 긴 걸로 보아 그놈들의 새끼가 분명했다. 기어이 나는 벌레 퇴치 회사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말았다.



9만 원이랬다. 거의 수입이 없는 내게 아주 센 비용이었지만 소중한 공간이 벌레 때문에-혹은 의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나의 마음 때문에- 엉망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다른 건 재고 따지고 할 수가 없었다. 예전처럼 꽉 채워질 교실을 기대하면서 책도 읽고 글도 쓰는 공간인데 바퀴벌레 출현으로 빨리 달아나는 곳이 되어버려서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른다.


제충기사는 두툼한 주사기와 함께 도착했다. 그는 들어와서 둘러보더니 조끼 주머니에서 주사기를 꺼내 이곳저곳에 주사를 놓기 시작했다. 바퀴에게만 효과가 있는 약이며 따뜻하고 습한 곳을 좋아하는 습성을 감안해 커피포트, 전자레인지, 커피머신, 전기 콘센트 같은 데다 부드러운 고형의 약을 짰다. 주로 사용하는 집기류기 때문에 사람에겐 안전하냐고 묻자 다른 어떤 것에도 안전하고 바퀴벌레만 죽인다고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도포를 마친 아저씨는 예의 그 조끼에 다시 주사기를 찔러 넣고 계약서를 내밀었다. 적는 동안 그가 카드를 결제하였다. 그리고는 말했다.



“여기는 학원이라서 바퀴가 살만한 환경은 못됩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동한 바퀴가 새끼를 낳았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그랬어도 이 안에 살고 있다면 먹을 게 없어서 거의 죽습니다. 살아 있어도 도포된 약을 먹고 가서 곧 죽을 거고요. 하지만 한 달 안에 나온다면 연락을 주세요. 다시 약을 놓으러 오겠습니다. 바퀴벌레의 서식지라는 흔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아마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바퀴벌레가 서식할 환경이 아니다, 서식지의 흔적이 전혀 없다, 바퀴벌레 약의 유효기간은 한 달이다, 아마 안 나올 것이다. 나는 아저씨가 간 후에도 그의 말들이 뱅뱅 돌았다. 어차피 안 나왔을 거라는데 안 해도 됐던 거 아닐까? 아니면 긁어 부스럼 아니었을까? 약에게 홀린 바퀴벌레가 몰려올 것 같았다. 아니 애초부터 바퀴벌레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쉽게 출입구 문을 열지 못했다. 학원 앞에 도착해서 유리문으로 우선 바닥의 동태를 살피고 서서히 진입했다. 그 약을 먹고 죽어있을 벌레 사체와 의연하게 마주칠 자신이 없어서였다. 실제로 나는 처음 먹바퀴의 출현 이후 2-3일 동안 친정엄마, 시어머니, 남편이 돌아가면서 함께 출근을 해야 했고, 시아버지가 지나는 길에 들러 바퀴 사체를 치워준 일도 있었다. 그만큼 두려웠다. 하지만 며칠 동안 바퀴도 새끼도 보이지가 않았다. “바퀴 서식지가 아니에요”라던 목소리만 맴돌았다. 그러니까 보드마카 뚜껑만 봐도 바퀴벌레로 보이던 나의 노이로제는 아주 작은 의문의 벌레를 보고 바퀴벌레 새끼로 오인,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 방충업체를 호출하였고 9만 원이라는 (지금으로서는) 큰돈을 날리게 된 것이다. 이쯤에서 떠오르는 한 단어는 바로 멍청비용.


후회는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괜한 돈을 쓰고 말았다는 생각에 밥도 안 넘어갔다. 스스로 한 일이면서 약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먹바퀴가 처음에 나왔을 때, 그 잔혹했던 공포의 열흘 동안에 업체에 전화를 걸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렇게 후회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벌레에게 속아 거금을 썼다는 생각에 잠도 안 왔다. 나의 이런 사정을 알아챈 남편이 그래도 다행 아니냐며 위로했다. “서식지가 아니라는 게 다행 아니야?”



생각해 보니 그렇다. 서식지가 아니라는 말이면 충분했다. 바퀴벌레의 소굴이자 온상지여서 대대적인 살충을 하고 매달 5만 원의 정기 관리를 받는 것이 나았을까? 아니라는데 왜 우울하며 안심하라는데 왜 짜증을 낼까? 나는 그 비용을 지불하고 ‘안심’을 얻었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바퀴벌레가 내 일터를 휘젓고 다니는 게 아님을 ‘신뢰’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9만 원을 ‘멍청비용’에 넣었으니 되려 멍청해지는 건 나 자신이 아닐까?


책도 마찬가지고 자료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산 책은 언젠가 읽으면 그만이다. 독서모임을 월에 서너 개씩하고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목록에 넣어 언제든지 읽을 수 있다. 게다가 그 책들이 내게 주었던 기쁨들은 실로 엄청났다. 오래된 자료도 그랬다. 당시 닳도록 공부했던 교재들이다. 써머리 하나, 작은 낙서까지도 보물이었다. 교습소를 쉬어 오랫동안 방치됐다손 치더라도 그동안 나는 또 다른 경험치들을 쌓았으니 인생 전반으로선 이득이다.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소비의 의미는 변한다. 부정의 이미지는 쌓을수록 손해다.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나온 명문장이 스치고 지나간다.



“무릇 천지간에 알 수 없는 것은 무척 많지만, 의미를 붙여서 의미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합리적인 소비는 반드시 필요하다. 실제로 끝까지 별 도움 안되거나 외려 지금의 나를 망쳐버린 비용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나 역시 멍청하다는 말에 나의 모든 행위를 가두고 탓하며 우울해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단어 때문이다. 그 지독한 의미 부여 때문이다. 후회라는 이름으로 싹싹 지워지는 메모리라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일어난 일은 절대로 지워지기 어렵다. 그래도 분명 하나 이상 배운 게 있다. 사람은 실패로 종종 배움을 얻으니까. 그때의 나를 원망하고 멍청해할 게 아니라 그때의 내 간절함을 이해해 보면 어떨까. 욕망의 지나친 발현과 무분별한 소비로 경제관념을 상실하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 그런 단어가 유행하는 중이겠지만 실패의 경험이 모두 쓸모없는 것은 아닐 테니 그 값은 멍청비용이 아니라 실수비용 정도로 생각해 주면 안 될까? 경험치증가비용도 좋고.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매거진의 이전글 모두에게 다른 계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