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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Oct 08. 2021

무인 편의점에 사람 있어요

무인 편의점을 시작했다. 갑자기 시작하게 된 거였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있다. 아무리 무인 편의점이라고 해도 매일 가서 관리하지 않으면 금방 표가 나게 마련이다. 내가 엉망으로 해 놓으면 손님들도 소중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매일 가서 쓸고 닦고, 정리한다. 언제 들어왔는지 배배 말라죽어 있는 곤충들을 처치하는 것과 모서리만 보이면 집을 지어버리는 거미하고도 씨름을 한다. 쓰레기도 마찬가지. 모든 일엔 애로가 있지만 하다 보면 즐겁고 하고 나면 뿌듯하다. 언제부턴가 이곳에서 굉장한 성취감을 느끼고 있다.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공실을 메우기 위해서 시작한 가게였지만 원래 내가 하던 일도 아닌 데다가 상주하면서 직원을 두고 일하는 게 아니다 보니 주인이 으레 하는-계산대에 앉아서 돈을 받는-일이 아니라 허드렛일이 전부라는 것을 알고  실망한 게 사실이다. 나는 작가가 꿈인 사람인데, 비록 사교육이지만 아이들을 오래 가르쳤는데 이제는 완전히 다른 일을 하는구나 싶어서 나에게 이 일을 시킨 가족들을 원망하는 마음도 들었다.

 

집에서 가깝기라도 하면 좋았는데 가게는 자동차로 40분 가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 미래를 위해서 투자한 것치곤 현재가 너무 힘들었다. 큰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 정도 주행거리는 짧다고 느껴질지 모르지만 나는 도시 한 바퀴를 다 돌아도 한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중소형 도시에 살고 있다. 그래서 길에서 버리는 80분은 인생의 낭비처럼 느껴졌다. 도시의 경계를 넘어 타 도시로 매일 달려가야 하는 길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래 가지고 기름값은 나올까? 길 밀리면 가는 데만 한 시간이 훌쩍 넘기도 했다. 도합 두 시간은 산정하고 길을 떠났다. 날이 궂은날은 안 가고 싶다. 남편은 매일 가지 말고 2-3일에 한 번씩 가라고 이야기했지만 그럼 루틴이 깨지는 기분이어서 싫었다. 매일 가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어쩌다가 하루 빠져도 미안한 거지, 하루 이틀 빠지기 시작하면 금방 흐트러질 것 같았다. 내가 나를 잘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지간하면 기를 쓰고 출발했다.



사실은 열패감에 젖어 시작한 가게였다. 원래 논술 교습소를 오래 했었다. 그러다가 신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아파트 청약에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이들의 학교와 우리 부부의 직장은 물론 관계하는 모든 것이 고향에 있었다. 나고 자란 도시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는데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잘 살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섣불리 이사를 결정하지 못했다가 아파트가 완공됐다. 아이들은 새 집으로 이사 가고 싶어 했다. 결국 이사를 결정했다. 큰 아이가 초6, 작은 아이가 초3일 때다. 이사를 와서는 따로 교습소를 하지 않고 학원에 강사로 취직했다. 작은 애는 전학 후 즐겁게 학교 생활을 했지만 중학생이 된 큰 아이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나와 아이는 심리상담이 필요할 정도로 힘들어졌고, 결국 다시 살던 동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은 상당히 비참하고, 고통스러웠다. 엄청난 신경전과 부부싸움, 오열과 비난이 아무렇게나 쏘아 올린 화살처럼 다다닥 쏟아져 가슴에 박혔다.

결국 모든 일을 다 그만두고 아이들에게 집중하고자 했고, 맞벌이에서 외벌이로 돌아선다는 것은 우리로선 생활고를 의미했기에 방법이 없었다. 아이들을 건사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빚을 냈다. 그렇게 차리게 된 것이 이 가게였다. 시작하고 나서도 지인들에게 일일이 설명해야 했는데 번거로움이 아니라 창피함이었다. '너 이제 논술 안 해?'라는 말에 얼마만큼의 같은 대답을 기계적으로 했던가.

아무튼 시간은 흘러갔고, 시간이 약이 된 것은 확실하다. 언제 이사를 갔냐는 듯 돌아온 옛 동네에 완벽히 적응한 아이들은 그런대로 행복하고, 남편과 나도 그 집을 포기하기로 결심하자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가게는 우리가 떠나온 동네에 있었다. 풍운의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났는데 쫄딱 망해서 돌아온 중년의 사업가 같기도 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왔는데 다시 출정에 나가는 군인 같기도 했다. 복잡한 심정이었다. 처음 이사 갔을 때 모든 게 새 것인 그 동네에서 얼마큼의 미래를 꿈꾸고 그렸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리모델링을 하지 않아도 그대로 만족인 새 아파트에서, 아직은 어린 묘목이 심긴 아파트 정원에서, 아무렇게나 찍어도 예쁘게 나온다고 SNS에 얼마나 자랑을 했던가. 아파트를 고스란히 타인에게 넘기고도 그 마을을 매일 지나다 보니, 어물전에서 군침을 흘리는 떠돌이 강아지가 된 것 같이 짙은 패배의식에 휩싸였다. 비약이라도 할 수 없다. 나는 그랬으니까.


나름의 곡절 끝에 시작한 가게 꼭 성공하리라, 홀로 전의를 불태웠다. 처음에는 응원의 메시지도, 배려하는 말들도 모두 상처가 됐다. 한동안은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게가 좋다. 쓸고 닦고 매만지고, 정리하고, 배치하고, 환전하고, 주문하고, 입금하고, 송금하는 모든 게 재밌다. 백신을 맞고 이틀을 가게에 못 갔는데 가서 보니 가게가 그렇게도 애틋했다. 진열대 중간중간 빈 물건들을 채우며 콧노래를 불렀다.


가장 큰 소득은 꾸준히 글을 쓰게 됐다는 것이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남의 글은 주야장천 봐주고 고쳐주고 했지만 정작 내 글은 쓰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쓰는 사람이 될 거라 마음만 먹고, 노트북의 빈 화면만 바라보다가 덮기 일쑤였다. 그렇지만 결국 브런치의 빈 화면을 채우고, 사진을 집어넣고, 열심을 다해 고치면서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계속해서 만나게 되는 여러 에피소드들 중에서 '나를 나로 보는 것'을 이뤄내고 있다. 통장에 돈이 한 푼 두 푼 모이는 것처럼 발행된 내 글이 내 피드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열패감은 흐릿해지고, 열정은 분명해지니 이 정도면 나 좀 괜찮지 않나?


투덜거리면서 배우는 세상도 있다. 무인 편의점에서 좌충우돌하다 보니 투덜대기 일쑤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하나씩 체득한다. 세상에는 많고 많은 일이 있지만 어차피 가장 힘든 일은 자기 일이다. 그러나 내 일만 바라보느라 함부로 이야기하고 상처를 줄 수 있다. 무인 가게에 대한 편견이나 오해를 투덜대면서 풀어나가고 싶다.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지 않냐는 자조를 섞어서. 내가 아프면 남도 아플 수 있다는 것을 배우며 한 발자국씩 나아간다. 보잘것없을 순 있겠지만 어차피 인생은 걸음을 떼는 것부터 시작 아닐까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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