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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Aug 12. 2021

사모가 아니라 사장이에요

"사모님이 아니라 사장님이라고 부르세요"


오늘도 떠나는 아이스크림 트럭을 보면서 혼자 생각한다. 나는 사모가 아니라 사장인데.


신도시의 상가는 아직까지 공실이 많은데 시아버지의 가게 역시 고전을 면치 못해서 부득불 차리게 된 무인 할인점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해보자는 마음도 컸다. 집에서 30km 가까이 되는 가게에 매일 출퇴근하는 것이 힘들지만 운전을 좋아하기에 별다른 스트레스 없이 진행한 것이 벌써 한 계절을 넘기게 됐다.


당연히 평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무인 편의점이니만큼 좀도둑도 있었고, 처음 해보는 일이다 보니 물건을 잘못 주문하는 일도 있었다. 아이스크림 냉장고가 멈추는 바람에 밥 먹다가 달려가 문제를 해결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할 만했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기분이 상한다.


오픈을 도와주는 업체의 이름을 따서 우리는 간판을 단다. 업체에서 초도 물량을 발주해주고 아르바이트 세 명을 구해서 진열을 도와주었다. 처음에 진열해주는 과자만 4-500만 원어치가 되고, 다섯 명이서 진열하는데 네 시간이 꼬박 걸린다. 그 작은 가게에 그렇게 많은 과자가 진열될 거란 것도 상상하지 못했다. 업체 실장님은 여자였는데 진열하면서 나를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처음 들어보는 사장님 소리가 너무 어색하게 들렸지만 네 시간을 내내 들으니 곧 익숙해졌다. 


과자가 오고 다음날 아이스크림 냉장고가 도착했다. 


"사모님, 오늘 아침 아홉 시에 매장에 냉장고 들어갑니다."


꽤 이른 시각에 전화가 왔길래 불편해했더니 여섯 대의 대형 냉장고는 꽂은 후 여섯 시간이 지나야 아이스크림을 집어넣을 수 있어서 아침 일찍 전화하는 거라고 말했다. 사장님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사모님이라는 말이 거슬리는 내가 좀 웃겼다. 하지만 그 후로도 계속 아이스크림 업체 사람들은 나에게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고수했다. 


혹자는 그게 뭐 어떻냐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대체 왜 여자는 무조건 사모님인지 꼬집고 싶다. 처음에야 그럴 수 있지만 주기적으로 만나게 되면 , 입금자가 이제 내 이름이면 사장의 아내를 칭하는 사모보다는 사장이라고 불러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사장 갑질 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사모님이라는 세 글자가 예민해진 것뿐이다. 아니, 예리해진 건가?


놀라운 것은 남자들이 주로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아이스크림 냉장고가 두 번째 멈추자 나는 수리 기사를 불렀다. 수리 기사도 도착했다는 전화를 걸어 나더러 사모님이라고 했다. 음료회사는 또 다른 곳에 있었는데 택배비 아낀다고 그곳에 찾아갔더니 역시 그랬다.


"사모님 가게는 장사 잘 되나 봐요. 초도 물량이 벌써 거의 빠지셨네요."


물량한테는 빠지셨다고 하고 , 사장은 여자라는 이유로 사모가 되는 희한한 말투. 남편에게 이 일을 두고 투덜거렸더니, '호칭을 잘 몰라서 그래'라며 편을 들었다. 그렇다. 모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알려줘야 하는데 뭐 그렇게까지 해서 예민한 여자처럼 보이고 싶지 않다. 그냥 남편에게만 조용히 말해주었다. 어느 가게에 들어갔는데 여자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거들랑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사장님, 혼자 운영하시느라 힘들지는 않으세요?"


음료수 도매 창고 사모님이 영수증을 주러 나와서 날 보고 건넨 말이다. 그 사람은 사장님의 와이프니까 나는 사모님이라고 부를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재밌는 건 음료수 사장님이 내게 '사모'라는 호칭을 써도 그 부인은 내게 '사장'이라는 호칭을 쓴다는 것이다. 대체 왜 나의 거래처 남성 분들은 자기 이름으로 된 사업체를 끌어가는 여자에게 사장님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는가. 그리고 나는 왜 호칭에 예민할까? 예민인지 예리인지는 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출처 픽사베이


예전에 독서토론을 하는데 여권 신장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 한 멤버가 진짜 여권의 신장은 자잘한 호칭의 변화부터 시작되는 게 아니라 사회를 주도하는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을 때 진정한 의미로의 여권 신장이 이뤄진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내로라하는 전문직 여성이나 정치인의 비율이 여성으로 많이 나타났을 때가 그 때라는 것이다. 그 말도 맞지만 사실은 모두가 그런 자리에 앉을 수 없어서 다른 사람은 끊임없이 연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은 것에서부터 천천히 바꿔 나가면 좋겠지. 


"아, 여기 사장님이세요?"


그래도 가끔 가게에서 청소를 하다 보면 손님들에게 받는 인사다. '네'라고 대답하면 그냥 반갑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만나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건네는 사람도 있다. 때론, 불편한 점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래도 꼬박꼬박 '사장'이냐고 물어봐줘서 고마웠다. 그마저도 누군가 '아, 사모님이세요' 하면 섭섭할 것 같다. 

솟아라, 모두의 젠더 감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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