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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Nov 14. 2021

박스를 접는 이유

유인 편의점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소규모 창업 점포인 무인 편의점은 아이스크림을 제외한 모든 상품이 택배로 도착한다. 물건이 비어있는 것보다 꽉 찬 게 좋다고 해서 상품들을 잘 체크해 두었다가 기간을 정해 한꺼번에 주문하는 편이다. 일정만큼 주문하면 무료배송이 되기 때문에 7-10일 정도 재고를 파악하고 주문을 넣는다.


어린아이가 둘은 들어갈 수 있는 큰 박스가 네다섯 개가 오고 그 안에 자잘한 박스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그야말로 박스 대란!


내가 나고 자란 동네는 박스나 신문지 같은 폐지를 따로 폐기 않고 인도 끝에 내놓으면 어느새 폐지를 줍는 분들이 와서 수거를 한다. 다른 쓰레기는 정해진 시간에 봉투에 넣어서 내놔야 하지만 폐지는 다르게 버려진다. 여담이지만 일부러 차곡차곡 모아서 내놓기도 한다. 수거하는 분들에겐 수입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는 단지 내 폐지 처리장이 있고, 내가 말한 것은 상가에서 나오는 폐지를 말함이다)


그런데 가게가 있는 신도시는 거리에 쓰레기 없는 도시를 만들겠다는 포부 하에 밖에 폐지를 내놔서는 안된다. 아무도 안 가져간다. 그래서 나는 그 박스를 차곡차곡 접어서 끙끙거리면서 재활용장에 가져다가 버려야 한다. 사실은 좀 힘들다.


혼자서 물건 정리를 하다 보니까 좁은 매장에서 주욱 늘어놓고 할 수도 없고, 손님이 오면 좁은 곳이 더 좁아지기 때문에 빨리 정리를 해야 한다. 일단 빈 박스는 다 밖으로 내놓는다. 안에 물건이 말끔하게 정리되면 그제야 박스에서 테이프를 걷어내고, 주소가 적힌 스티커를 제거하고 접는다. 혼자 한방에 들고 가야 시간이 절약되기 때문에 가장 큰 박스를 집으로 삼고 나머지 박스들을 차곡차곡 접어서 넣는다. 이리 끼우고 저리 끼우고 하면서 그 많은 박스들을 한 덩어리로 모으려고 하는 나의 노력은 가상하다.


한 번은 남편이 쉬는 날이라고 도와주러 왔는데 내가 박스를 차곡차곡 정리하자 그럴 거 뭐 있냐며 그냥 막 구겨서 넣었다. 당연히 부피는 커졌고, 남편이 혼자서 버려준다더니 결국 나도 따라가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렇게나 넣은 박스들은 가다가 떨어지기도 하고 좀 얇은 녀석들은 바람에 날려 저만치 굴러가기도 해서 잡으러 다녀왔다. 일이 두배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혼자 하는 게 낫지.


손톱이 좀 약한 편이어서 큰 박스들을 우악스럽게 접다가 손톱이 뒤로 누운 적도 있다. 찰나의 고통이지만 기분 나쁜 느낌이 한동안 가시질 않는다. 게다가 트라우마는 어떻고. 으윽, 경험이 있는 사람은 누가나 알만한 느낌.


그래서 조금은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박스를 접는다. 접어서 사이사이에 끼우면서 한 덩어리로 만들 때 모종의 성취감 같은 것도 느낀다.


아무렇게나 가지고 가서 버려도 어차피 정해진 장소에 버리기 때문에 누구도 뭐라고 하는 사람 없지마는 그래도 남은 공간을 차곡차곡 채우면서 마음을 비운다. 어떤 날은 가족 때문에, 집안일 때문에, 마주치는 사람들 때문에, 혹은  때문에 심란한 마음을 지닌 채로 한참 박스를 정리한다. 책꽂이에 책을 꽂듯이 열심히 폐지를 꽂아 넣다가 이따금씩 굽은 허리를 펴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호젓하게 얼굴을 스친다. 칭찬해 주는 사람도 없는데 열심히 정원을 꾸미는 정원사가   같기도 하다. 그렇게  채워서 한판 가져다 버리고 가게 안을  둘러보면 어느새 자리를  찾은 물건들이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며 늠름하게  있다. 혼자 일하다 보니  군데에 감동한다.


누군가는 달을 보며 이야기를 만들지만, 또 누군가는 우주의 이치를 깨닫는다.
                     김상욱, [울림과 떨림] 중에서


가게에서 나온 폐박스 갖다 버리는데 뭔 감상이 그렇게 짙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같은 일이라도 어떤 관점을 가지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생각도 말도 달라진다.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미묘하게 남다른 감성이 닿아서 보잘것없는 시간의 이치를 깨닫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박스를 아무 때나 내놔도 되는 도시에 살다가, 한 두 개의 작은 박스를 출근길에 쓰레기장으로 휙 던져도 되는 아파트에서만 지내다가 어떻게든 한 번에 흘리지 않고 제대로 갖다 버리려고 분투하는 가게 주인 입장까지 되고 보니 별스럽게 생각지 않았던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전혀 의도하지 않은 데서 발견한 취향도 있는 법이다. 그래야 일도 인생도 재밌어지지.


오늘도 무인 편의점은 이야기를 채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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