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내가 아버지라고 생각해

당신이 상처 준 말 들을 잊는 이유

by 리다리
"난 보증은 안 서"


아빠가 돌아가셨다. 결혼 후 3개월 만이었다. 아빠는 사업을 확장 중이었고 자연스럽게 빚을 많이 낸 상태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비관 자살이라도 한 줄 알만큼 대형 사고였다. 아빠가 전신에 3도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진 날은 제헌절이었다.


아빠는 중환자실에서 40일을 살고 호흡기를 제거함으로 억지로 임종하였다. 반복된 수술로 병원에는 엄청난 수술비가 밀려 있었다.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 시신을 주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면 조의금이 들어오기 때문에 그걸로 병원비를 낼 수 있다고 병원에 이야기했다. 병원에서는 '가족이 아닌 보증인이 두 명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시아버지께 부탁했다. 시아버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평생 가진 소신 중에 하나가 보증은 서지 않는 거라고 했다. 안다. 평생 은퇴하실 때까지 성실하게 돈 벌어서 3인 가족 건사하고 부자는 아니어도 남에게 손 안 벌리고, 위험한 일 피해 가며 평범하게 살아온 그 소신. 그게 보잘것없지 않다는 거 모르지 않는다. 그래도 한번은 비켜갈 수 있지 않는지, 돈을 내라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리 야멸찬지 섭섭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시신을 인도받아 장례를 치렀다. 모든 장례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와 생후 30일 된 아들을 안았을 땐 반가운 마음뿐이었다. 사흘 동안 너무 보고 싶었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시아버지는 나를 보면서 ‘이제 내가 아버지라고 생각해’라고 말했다. 불과 며칠 전의 일은 어디론가 증발해 버렸다. 그래도 그땐 그 말이 고마웠다. 그리고 믿는 게 내가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고작 3개월 된 내 결혼이 후회로 가지 않는 길은 누구와도 잘 지내는 관문을 통과한 후에 펼쳐질 테니까. 아니면 서운한 감정은 일단 사랑을 먼저 한 후에 쫓아오는 것이어서 그랬을지도 몰랐다. 사랑한 적이 없으니 서운할 것도 없다고 믿자. 감정이 일순 차단된 것처럼 나는 웃었다. 그저 오래오래 저 두 개의 모순적인 문장을 기억하면서 살자.


장례가 끝나자 빚쟁이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아빠가 짓던 휴양지 펜션 사업은 거의 막바지였는데 사람들은 우악스럽게 달려들어 그것을 찢어 가져 갔다. 친정집은 물론이고 아버지 사무실, 채권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겨우 내가 스물네 살이라는 것과 벌어 둔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것에 자책했다. 그러면서도 일단 집을 떠나 가정을 일구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나 심각한지 몰랐다. 하지만 내게도 내용증명이 날아들었다.


아빠가 사채로 끌어다가 쓴 빚은 내 이름으로 된 것이었다.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건달 같은 아저씨들이 비싼 이자를 매겨서 빌려주는 돈만이 사채가 아니란 걸 그때야 처음으로 알았다. 개인이 높은 이자를 매겨 빌려주는 모든 돈을 사채라고 한다. 아빠가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사람에게 높은 이자를 주고 돈을 빌렸는데 아빠가 빌린 걸 누구나 알지만 문서에는 적힌 채무자는 변함없이 내 이름이었다. 학교에서 수업 중이던 어느 날 급하게 나와야 한다는 문자를 받고 학교 근처 커피숍에서 사인한 문서가 '딸이 5000만 원을 갚지 않으면 수년 내에 이자가 2억 5천까지 붙는다'는 내용임을 아빠는 알았을까? 자신 있었겠지. 죽지 않고 다 갚고 사업까지 번창시킬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을테지.


"이혼시킵시다"


결국 이 사실은 시가에도 알려졌다. 시아버지는 당신 아들의 월급에도 차압이 붙을까 염려했다. 엄마와 시부모, 나와 남편이 모인 자리에서 시아버지는 일단 서류상으로 이혼을 진행하는 게 어떻겠냐고 운을 떼었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한 조치였고, 그것은 합리적으로 보였다. 아니, 부당하게 보였다고 하더라도 결혼 전의 큰 빚은 유책 사유임에 분명해 보였다. 서류상이라지 않은가. 엄마도 나도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시어머니가 울음이 가득 찬 목소리로 이혼은 안된다고 했다. 아무리 서류상만이라도 나중에 애들도 보게 될 텐데 그건 너무하다고 했다. 방법을 찾아보자고. 전셋집을 빼서라도 갚으면 될 게 아니냐고 했다. 식당은 모두 울음바다가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파산, 개인회생 제도가 있었다. 나는 법률 구조공단의 도움을 받아 파산신고를 진행했다. 자문을 구했던 법무사의 의견에 따르면 대학생 신분이었던 나는 돈을 빌릴 당시 변제를 할 능력이 없었고, 실제로는 본인이 빌린 게 아닐뿐더러 연대책임보증을 섰던 아버지는 사망하였으니 본인이 갚지 않아도 될 방법을 법원에서 마련해 줄 것 같다고 했다. 대신 변호사를 구하지 말고 법률 구조공단으로 가 볼 것을 권했다. "아니 방법을 찾아야지 왜 애들을 이혼시키려고 하세요?" 라며 시아버지를 나무라듯이 말하기도 했다. 여태까지도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혼부터 시키려고 들었던 시아버지의 말에 나는 너무너무 서운했다. 몇 달 전 장례식장에서보더 더. 그러나 서운해할 겨를 같은 게 내게 없었다. 자격도 희미했다. 무엇 때문에 서운한가.


"줄행랑 치면 안 되는 거야?"

결혼 후 16년의 시간이 지났다. 어떤 때는 내가 열심히 인생을 살아낸다기보다 얼떨결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시간은 의외로 빠르게 흘렀고, 내겐 특유의 무책임이 존재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삶의 자세가 있었다. 어쩌면 체념일지도 몰랐다. 내가 어쩌려고 해도 전혀 어째 지지 않는 무거운 부채가 나의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나는 절대로 몇 백만 원의 세금을 낼 재간이 없었다. 그저 살았다. 나가서 돈 벌어올 생각? 물론 했다. 하지만 내겐 아주 어린아이들이 있었다. 엄마는 남편을 잃은 슬픔과 빚쟁이들의 독촉 사이에서 미치기 일보직전이라 손자 손녀에게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미안하지만 남편 뒤에 숨었다. 남편이 나보다 날 더 사랑하길 바랐다. 모른 체했다. 내가 만약 비관을 쉽게 하거나 외려 좀 더 강인하거나, 받은 상처에 대한 회복력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극단적으로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채권자들은 내가 돈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법적으로 탕감받은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보증보험에 사건을 위탁해 두었다. 아이 밥을 먹이다가 누가 벨을 눌러 내 이름을 부르며 문을 쾅쾅 치면 무서워서 가만히 있었다. 어느 날 뭣도 모르고 문을 열었는데 두 명의 낯선 남자가 한쪽 다리를 우리 집 현관문에 걸치고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보증보험의 이름과 본인의 이름이 딱딱하게 쓰여 있었다. 내가 파산신고해서 변제의 의무가 없는 걸로 안다고 말하자 사건번호를 대라고 말했다. 나는 사건번호를 외우지 못했다. 안방에 가서 서류를 찾아서 현관까지 오는 동안의 내 감정은 다시 떠올리거나 어떤 것을 빗대 말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의 공포였다.


누군가는 그랬다. 상처 받은 감정과 마주하라고. 아니, 나는 마주하고 싶지가 않다. 몰라도 된다. 잊고 싶다. 나는 힘들었고 자격지심에 빠졌다. 자책했고 원망하느라 젊은 시절을 허비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지났고, 우연이라고 말하면 더 쉬울 만큼의 알 수 없는 힘의 신비로 내가 감당하지 못할 온갖 부채들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그것의 중심에 시아버지가 서 있었다.


시아버지는 언제 이혼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나 싶을 정도로 우리가 잘 살길 바랐다. 안락한 집으로 이사하도록 도왔고, 그 과정에서 꼭 갚아야 취득할 수 있는 권한들을 위해 날 대신해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주었다. 실제로 돈으로 갚아준 적도 많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어땠을지 몰라도 - 한 번도 드러내서 상처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걱정하지 마, 그것 먼저 갚고 시작하면 돼' 여러 번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안심했고 조금씩 모든 것을 안정시켜 나갔다. 막혀있던 금융거래도 풀렸고, 내 이름으로 전화기를 개통할 수도 있었으며, 신용카드도 만들 수 있었다. 때때로 부업을 해서 돈을 벌기도 했고, 남편이 주는 생활비를 아껴 갚기도 했지만 결국 사채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부채를 시아버지가 갚아주었다. 우리는 가족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 역시 시댁의 사업을 도우며 열심히 일한다.

한 번은 친구가 지나가는 말로 '시아버지가 예전에 그렇게 말한 걸 다 잊었느냐'라고 물은 적이 있다. 당연히 기억한다. 여전히 서운함도 잔존한다. 완벽히 없앨 수 없겠지. 이야기를 꺼낼수록 상처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어느새 이해하고 있었다. 그땐 그 누구도 어쩔 수 없었음을. 하나를 지키기 위해 하나를 포기했을 뿐이었다. 세월이 희미하게 한 건 맞지만 나 역시 상처로부터 힘껏 줄행랑쳤다. 극복되지 않을 상처로 병들기 싫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을 잃지 않고 살았음에 더 비중을 두기로 했다.


이제는 안다. '내가 네 아버지가 되어 줄게'라고 한 말이 맞았음을. '더 이상 내게 어려울 때 기댈 어른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기도 전에 불쑥 직면하게 된 여러 가지 고난의 길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다름 아닌 시아버지였다. 당시에 최선이라고 믿었던 말 몇 마디 때문에 오랜 시간 모른 체해두었던 섭섭함은 일부러 잊은 게 아니라 서서히 옅어진 거였다. 그건 내가 될 대로 되라지 체념해 버린 게 아니라 나도 모르는 새 믿고 의지한 어른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제야 깨닫는다. 상처에 게을러서도 아니고 특유의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서도 아니다. 나는 그저 좋은 가족을 만난 것이다. 내 아들이 열여섯 살이 되고서야 비로소 그게 부모의 사랑이었음을 안다. 아들의 가정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같이 이겨내주는 부모님의 사랑임을 힘주어 새긴다.

혹자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래 봤자 시집은 시집이라고. 며느리는 딸이 될 수 없다고. 안다. 꼭 딸일 필요 있나? 그냥 가족이면 되지. 그리고 '상처를 무조건 마주 봐라, 그래야 이겨낼 수 있다'고만 말하는 건 타인으로부터 얻은 상처의 책임이 본인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처의 회복은 혼자의 힘으론 더디다. 나 역시 홀로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안다. 내가 왜 그 두 문장을 잊기로 했는지. 그거면 된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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