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취향에 관한 어떤 책의 리뷰를 쓰면서 그간의 독서 편력을 반성한 적이 있었다. 오륙 년 전에 나는 감성적인 에세이에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다. 저렇게 가벼운 책을 읽느니 고전을 한편이라도 더 읽겠다 말했다. 엄청난 교만이었다. 하지만 3년 전부터는 그 생각이 깨졌는데 서평단으로 참여하면서 부터다. 출판사에서 홍보하기 위해 나름의 기준으로 선별한 독자군에게 책을 무상으로 보내주면 그것을 읽고 기한 내에 서평을 올리는 게 서평단의 주요 역할이다. 어느새 서평단이 취미가 됐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러 분야의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남의 책을 받아 읽고 악평을 쏟아낼 수 없으니 좋은 점을 애써 찾아 헤맸다. 그런데 거의 모든 책에서 좋은 점을 발견했다. 읽다 보니 내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것도 많았고, 마치 작가가 내 마음을 알고 문장으로 꾹꾹 눌러 적어준 것 같은 감명까지 받으며 점점 눈이 밝아졌다. 내가 원래 편독이 심했구나 반성했다. 가장 만족스러운 점은 작가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담긴 에세이들을 읽으며 나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에세이가 쉬워서가 아니라 형식의 제약 없이 마음속에 묵혀둔 나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써 보는 게 나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근래에는 너무 괜찮은 글을 만나서 비슷하게 목차를 쓰고 따라 써보기도 했다. 나에게 창작열을 일으키는 참 괜찮은 버튼이 바로 남이 쓴 에세이들이다.
브런치에 글을 계속 쓰다 보니 제대로 된 글 한편 만들어 내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자주 느낀다. 알지 못하지만 특정한 독자를 정하고 그가 읽었을 때 공감을 갖기를 바라면서 글을 쓴다. 시작해서 마무리를 짓기까지, 글을 다듬고, 또 다듬어 발행 버튼을 누르기까지 수십 번 읽고 수백 번 고민한다. 누군가가 봤을 때 상처입지는 않을까, 아니면 나를 욕하지 않을까 검열에 들어가기도 하는데 이건 도움이 되기도 하고 방해가 되기도 해서 용기를 내느냐, 편안한 길로 타협하느냐의 딜레마에서 혼자 허우적대기도 한다. 어쨌든 글은 쓰고 싶은 대로 막 쓰는 게 아니라 -설령 그렇게 썼다 해도- 정제해서 세상에 내어야 한다고 배웠고, 그게 옳다. 그것이 어떤 글이라고 할지라도 남에게 보이는 글일 거라면 적어도 정성을 들여야 한다.
오늘 나는 에세이 한편을 읽었다. 작가는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중의 한 명인데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솔직 담백하게 쓰는 젊은 소설가다. 나는 그 작가의 소설을 세 편 읽었고, 장편도 단편도 모두 좋았기 때문에 그의 에세이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신나서 책을 구매하려고 했다. 그런데 인스타그램에서 서평단을 모집하는 문구를 보았다. 당연히 신청했다. 서평단을 신청하면 3주 안에 무조건 읽어서 서평을 올려야 하기 때문에 책이 밀리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내돈내산'은 자유로워서 좋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못 읽는 책이 태반이어서 이왕이면 서평단을 신청하고 책을 빨리 읽는다. (요즘은 그마저도 못하고 있지만) 가장 큰 단점은 간혹 땅을 치고 후회막심이 되기도 한다는 것.
결론부터 말하자면 너무 실망했다. 그의 에세이를 기다린 것은 원래도 자유분방해 보이는 작가의 진솔한 경험담을 기대해서였다. 실제로 소설만큼 에세이가 좋았던 작가들을 너무도 많이 만났고, 소설보다 훨씬 좋은 문장력으로 독자를 자극하고 밑줄을 박박치게 만드는 작가의 에세이도 참 많이 읽었다. 그런데 이번 책은 그냥 난잡한 일기였다. 일기를 그대로 옮겼다. 최소한의 교정도 안 본 것 같았다. 수많은 말줄임표, 맥락 없이 터져 나오는 완전한 욕설, 아주 긴 일과의 설명, 앞뒤 상황은 전혀 짐작조차 안 되는 불친절한 글쓰기 구조가 여과 없이 묶여 있었다. 화가 났다. 어찌하여 이렇게 아무렇게나 썼을까. 그의 소설을 읽고 그 세련됨에 매료됐던 독자에게 줄 정성은 어디에도 없는가? 미안하지만 책을 던져버리고 싶을 정도로 실망했다. (일기를 출간하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얼마 전에 읽은 또다른 소설가의 [일기]는 진짜로 감명 받았다)
한동안 이런 생각이 있었다. 작가들은 정말 대단하다고. (독립출판물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투고의 과정을 거쳐서 크고 작은 출판사로부터 인정받아 책이 제작되고 출간돼 서점에 진열될 수 있다는 것은 각고의 노력과 정성이 - 이슬아 작가의 글에서 빌리자면 인쇄기를 잡고 기도하고 싶을 정도로- 필요한 일이란 걸 알면 알수록 그 모든 과정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괜히 겸손해지고 숙연해지고 그랬다. 다달이 내가 읽은 책들을 모아 나름의 별점을 매기면 책친구들이 '너는 너무 별점이 후하다'라고 말할 만큼 후해지는 책이 넘쳐났다. 작가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샘솟는데 어찌 별점을 적게 주랴. 읽은 모든 책에 일단 생산 자체에 대한 노력을 깔고 감상을 말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번에는 아니었다.
그 소설가가 쓴 에세이라는 말에 믿고 볼 애독자들에게 이건 너무 했다. 작가는 문학상 수상자로 한국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흔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이다. 하여 그의 에세이가 출간되자마자 좋아서 구매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나처럼 서평단에 바로 참여해 두근대는 마음으로 책장을 펼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함부로 굴었다. 솔직하다는 것이 나쁜 게 아니고, 자기 글을 자기 마음대로 쓰겠다는데 누구도 비난할 권리가 없다는 것은 알지만 책으로 엮어낼 때는 좀 더 신중해야 한다. ISBN이 찍혀서 출간되는 순간 영원히 서적으로 박제돼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시대적 유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이야기는 트렌드고 소위 힙한 어떤 흐름일지 모르지만 문학은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여태껏 좋은 글을 쓰고자 퇴고를 토할 때까지 거듭하던 수많은 작가들의 글이 허튼 일을 한 것처럼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다. 난무하는 욕설, 문맥에 맞지 않는 단어의 선택들을 지속적으로 보고 있자니 생각에 공해를 입었다. 열여섯 살 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틀어놓았던 욕설 가득한 래핑을 우연히 듣게 된 것처럼 기분이 언짢았다. 아니 그보다 더 그랬다. 그런 래핑에는 적어도 메시지는 있었다. 세상에 대한 분노,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태도 등. 하지만 내가 읽은 산문은 그저 자기감정의 배설이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고독했을테고, 삶의 어려움도 있었을 테지만 문학으로, 문장으로-알아 들을 수 있게- 풀어낸 게 아니라 '이러면 뭐 어때?' 식의 욕설과 원색인 문장들을 적어두고 가감 없이 묶어 출간해 버렸기 때문에 나는 그의 '솔직'이 폭력으로 느껴졌다. 옆에 있던 사람이 나외의 다른 이에게 욕설을 날릴 때 내가 욕을 먹은 것처럼 짜증이 났다. 이 책을 읽자니 그때랑 비슷한 불쾌가 솟는다. 안 읽었을 때로 생각을 씻어내고 싶었다. 그건 솔직이 아니라 무책임 아닌가? 폭력이었다. 이 책에 나름대로 묻어 있었던 작가의 멋진 생각들도 그냥 묻혀버렸다. 내가 편협하다고 해도 속이 배배 꼬여 그랬대도 이 말들을 철회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이 책을 손에서 놓고 나니 무안하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불쾌하고 억울하게 언짢은 이 책을 놓고 뭐라고 서평을 써야 하나. 여차하면 책을 돌려보내고 이따위 글은 못 읽겠으니 책 도로 가져가십시오 해야 하나. 아니면 기어이 좋은 점을 찾아내서 좋다고 적어야 하나. 그러면 내가 책 리뷰를 올릴 때마다 '믿고 본다'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을 기만하는 걸 텐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봐야겠다.
어쩌면 나야말로 이 글 자체로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네가 뭔데 남의 책을 평가하냐'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독자는 누구의 책도 평가할 수 있다. 물론 누구의 글에도 조롱이나 폄하는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써서 유명세를 통해 쉽게 출간의 문을 통과한 그의 글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은 당나귀 귀 임금님의 비밀을 말하지 못해 화병 난 모자 장인처럼 될 것 같아서 내 글을 대나무 숲으로 삼기로 했다. 대나무가 내 이야기를 웅웅 거리며 세상에 전해도 할 수 없다. 아닌 건 아닌 거니까.
그 정도의 일기라면 혼자 썼으면 좋겠다. 출판사도 마찬가지다. 다시는 그 출판사의 서평단은 신청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