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나 영화를 보다 보면 정말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악한이 등장한다. 하지만 악당이라고 해도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쓰이고, 전혀 미워할 수 없는 인물들도 있다. 특수하게 분류된 사람이라도 다 같지 않은 것처럼 재봉틀에 끼우는 바늘도 다 같지 아니하다.
11층 언니에게 처음 미싱을 배웠을 때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은 직선 박기로만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아주 쉬운 것부터 시작해서 응용을 거듭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실력도 생기고, 보는 눈도 생겨서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곡선 박기를 힘들어하는 나를 위해서 언니는 A4용지에 달팽이 껍데기처럼 돌돌 말린 선을 그어 놓고 그대로 박으라고 했다. 종이 아래에는 버려도 되는 자투리 천이 대어져 있었고. 그 선을 따라 천천히 원단을 움직이며 박음질을 했다. 처음에는 삐뚤빼뚤 심각했는데 나중에는 언니가 그린 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잘 박게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는 것을 칭찬하며 나의 스승님은 성의껏 가르침을 주었다.
그랬던 내가 어느 날부터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물론 패턴이 있어서 그대로 오리고 시접만 주고 따라 박으면 되는 거였지만 스승님도 바빠서 꼼꼼하게 알려주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으므로 나는 독학하기 시작했다. 순서에 맞게 박고, 휘감치기를 하고 뒤집어서 상침을 했다. 그중 하나의 과정이라도 빼고 진행하는 날엔 뜯고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실패 없이 완성하는 날엔 일필휘지로 명작을 써 내려간 문학 고수가 된 것처럼 어깨가 으쓱했다.
두 돌 박이 딸이 잘 걷기 시작하자 원피스를 만들어 입히고 싶었다. 여름용 아기 원피스는 정말 만들기 쉬운 옷 중에 하나다. 앞판과 뒤판을 각각 패턴에 맞게 재단해 어깨 부분과 옆구리 두 군데를 차례로 재봉 후 뒤집으면 모양이 얼추 완성된다. 그대로 입혀도 되지만 올 풀림을 방지하기 위해서 휘갑치기 하고, 겉에는 레이스를 달거나 목부분을 바이어스로 감싸면 끝이다. 기호에 따라 주머니를 달아줘도 되고.
여름이 다가오던 5월의 어느 날, 원단 쇼핑몰에서 거즈 원단 광폭 1마를 주문했다. 1마는 가로 90cm, 세로 110cm를 말하는데 광폭은 그보다 좀 크다. 거즈 원단은 얇고 비치는 소재인데 시원하고 땀 흡수율이 좋아 여름옷이나 손수건으로 이용한다. 딸과 엄마가 세트로 지어 입으면 이쁘다는 말에 혹해 구매한 DIY 책을 펼쳐서 가장 마음에 드는 패턴을 부직포에 따라 그렸다. 만들어진 패턴지를 천에 대고 함께 재단하면 앞판과 뒤판, 주머니가 나온다. 가장 먼저 박을 어깨 부분에 시침핀을 꽂고 재봉틀에 앉았다. 노루발 밑에 천을 넣고 페달을 밟는 순간, 그 경쾌한 '다다다' 소리는 어디 가고 '파박' 소리와 함께 바늘이 부러져 버렸다. 소잉 머신에서 바늘이 부러지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부러진 바늘이 얼굴로 튈 수도 있고, 파편이 기계 안에 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앗'하고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지만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난감하면서도 궁금했다. 대체 왜 바늘이 부러진 거지?
나는 부자재 함에서 바늘 통을 꺼냈다. 다행히 여분의 바늘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심기일전해서 재봉틀에 앉았다. 중간에 끼어버린 원단을 잡아 빼서 다시 박았다. 이번에는 바늘이 부러지진 않았는데 확 휘어졌다. 바늘은 기계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옷감에 뒤엉켜버렸다.
아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분명 어제까지도 잘 되던 미싱인데 어리둥절했다. 나는 11층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나 보미 원피스 만드는데 바늘이 팍 부러졌어. 바꿔서 끼웠는데 또 휘어버렸어. 원단도 다 껴버렸고."
"원단이 뭔데?"
"거즈 원단. 어제 샀ㄴ..."
"야! 거즈 원단에 16호 바늘을 쓰면 어떻게 해?"
언니 말에 의하면 우리가 기본적으로 쓰는 바늘은 16호인데 거즈나 시폰 원단은 아주 얇은 원단이어서 9호 정도의 가는 바늘을 써야 한다고 했다.
'아, 바늘이 문제였구나'
바늘뿐만 아니라 실도 그랬다. 원단에 적합한 굵기의 실이 다르게 존재한다. 재봉할 때 원단을 잡아주는 노루발이나 원단의 두께처럼 물리적인 차이도 잘 알아야 한다. 적절하게 겸비된 도구와 그에 따른 정보가 없다면 불편을 넘어 위험한 일까지 맞닥뜨리게 된다. 시간낭비와 후회는 덤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고.
소재는 좋은데 영 글이 안 나올 때 가끔 나는 거즈 원단을 처음 박던 날을 떠올린다. 그냥 쓰면 되는 거 아닌가 하고 속기사처럼 다다다다 쳐 놓고서 쉽게 발행을 하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암호처럼 늘어놓은 기억의 편린들이 부끄럽기 짝이 없으면서도 공들여 쓴 것이니 날려버리지 못하고 끙끙 댄다. 그러다가 엉켜버리면 결국 작가의 서랍에서 사장(死藏)되고 만다.
글을 쓸 때 '아는 것'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했다. 비단 글쓰기만이랴. 재봉의 세계든 인간 세상이든, 눈 가리고 아웅 으론 몇 발자국 못 가 엉켜버리기 마련이다.
요즘엔 하루 중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이 글감이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지 모른다고 일상에서 마주친 수많은 낯선 감정을 수집해 글로 옮기는 것에 집중하느라 밤잠을 설친다. 사실은 조급하다. 나도 빨리 출간 작가가 되고 싶어. 그래서 맥락 없이 엮고 묶느라 엉키고 꼬이는 나를 발견한다. 얇은 원단엔 가는 바늘을 쓰듯이 나도 적재에 어울리는 글로 누군가에게 감동이 되고 싶다.
"야, 예쁜 부자재 아무리 갖고 있어도 결국 가장 기본적인 거, 실과 바늘, 노루발부터 갖춰놓고 박아야 되는 거야."
글쓰기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11층 언니가 십 년 전에 해준 말이 왜 자꾸 생각날까? 그래도 글을 쓰면서 생각의 꼬리가 점점 길어진 건 부인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제는 좀 더 갖춰서, 좀 더 공부해서 완성도 높은 글을 써볼까? 아는 것처럼 보이는 거 말고 정말 아는 것으로!!
적절한 장소에 찍힌 마침표만큼 심장을 강하게 꿰뚫는 무기는 없다.**
-이사크 바벨
*김태한의 [제발 이런 원고는 투고하지 말아 주세요] 중에서
**은유, [쓰기의 말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