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봉의 추억
지금으로부터 12-3여년 전 이맘때쯤 재봉을 배웠다. 아이가 아주 어릴 때 같은 아파트에 살던 11층 언니에게 졸라서. 우리는 둘 다 작은애를 비슷한 시기에 임신하고 출산했기 때문에 동지애도 있었고, 남의 집 살이를 하면서 자기 집 갖기를 꿈꾸는 동류애도 있었다. 맛있는 반찬을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네가 많이 줬네, 내가 많이 받았네 할 것 없이 퍼다 주기 바빴고, 커다란 수박을 한 덩이 사면 반으로 쪼개 나누어 먹었다. 11층과 9층을 오르락내리락하며 8층 사는 다른 이웃의 질투를 사기도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낮이면 현관을 활짝 열고 살았고, '나 지금 간다'같은 인사없이도 방문을 주고받았다.
언니네 집에 놀러 가면 자주 미싱* 소리가 들렸다. 우리 아파트는 복도식이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벌써 열어둔 작은 방 창문을 타고 다다다다 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늘은 미싱이 무엇을 낳을지 궁금한 마음을 안고 언니네 현관으로 들어섰다.
거실은 대부분 난장판이었다. 오늘은 뭘 만드냐고 물으면 103동 승우 엄마에게 주문받은 아기 낮잠 이불, 하복대 소희엄마가 주문한 암막커튼, 8층 언니의 시어머님이 주문했다는 김치냉장고 커버, 인터넷으로 누군가 주문했다는 돌 답례품까지 각양각색의 주문이 밀려있댔다. 나는 재단을 돕거나 남은 천을 개켜주는 등 자진해서 조수 노릇을 담당했다. 풀풀 날리는 먼지 속에서도 언니 발이 리드미컬하게 페달을 밟으면 천이 전진했다. 언니는 요리사가 웍을 흔들듯이 천을 뒤집고, 흔들고, 다시 박고, 실밥을 뜯으며 하나씩 작업을 완수해 나갔다. 재봉의 매력에 완전히 빠졌다. 언니, 나도 알려주면 안 돼?
그렇게 배우게 된 게 재봉이었다. 나의 실력부터 말하자면 커튼과 이불보는 기본이고, 각종 파우치, 주방장갑, 앞치마, 의자 커버, 휴지 커버, 식탁보, 쿠션 커버 등 실용 생활 소품은 물론이고, 패턴이 있으면 옷도 가능했다. 내가 직접 치수를 재서 만드는 양재는 불가능하지만 상하의는 물론 그 어렵다는 트렌치코트까지 만들어 본 적 있었다.
누구네 집들이를 간다고 하면 며칠 전에 발매트나 주방장갑, 앞치마 같은 주방 생활용품을 재봉으로 만들었다. 인터넷으로 천을 고르고, 갖고 있는 부자재를 확인해 머릿속으로 디자인을 했다. 원단을 기다리면서, 받는 사람이 얼마나 놀라고 좋아할까 상상하며 주는 기쁨에 완전히 취해 있었다. 감각적인 원단을 골라서 깜짝 놀라게 해 주리라 마음먹고 정성을 다해 박았다.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박고, 창 구멍을 내고, 뒤집어서 다시 박았다. 바이어스(모서리를 다른 천으로 감싸서 마감하는 방법)를 쌀 것인지, 파이핑(모서리에 대는 얇은 밧줄) 처리를 할 것인지 고민하기도 했고, 내외장재를 심사숙고하느라 몇 날을 고생해도 그게 그렇게도 재밌었다. 리본, 레이스 같은 부자재도 참 많이 모아 두고, '핸드메이드'라고 표시된 라벨도 엄청나게 모았더랬다. 가지고 있는 것만 봐도 배불렀다.
재봉을 하다 보면 갑자기 바느질이 필요할 때 망설일 이유가 별로 없다. 웬만한 건 드르륵 박으면 된다. 남편은 양말에 구멍이 자주 나는 편이다. 나도 꼭 엄지발가락 부분만 그런다. 새 양말도 남편이 신으면 빨래 세 번을 버티지 못한다. 버리기엔 너무 아까울 때 뒤집어서 대여섯 바늘 꿰매면 되지만 매듭짓고 자르고 번거롭다. 그럴 땐 그동안 안 써서 빼놓은 소잉 머신에 전기를 꽂고 다르륵 박아주면 완벽하다.
키가 쭉쭉 크는 아들을 위해서 교복 바짓단을 미싱으로 늘여주었다. 우리 엄마는 바지 밑단 수선이 필요하면 세탁소 대신 우리 집으로 오신다. 갑자기 필요한 테이블 매트, 티코스터들은 갖고 있는 천으로도 뚝딱 만들 수 있다.
요즘은 시간도 없지만 마음도 없다. 잦은 이사로 미싱은 박스에서 꺼내지 않은지 오래됐고, 사이사이 많이도 쟁여두었던 천들은 절반 이상 폐기하였다. 휘갑치기(오버록) 머신이나 롤 커팅기, 가시 도트 기구 등은 살 때 워낙 고가여서 '언젠가 쓰겠지' 하면서 잘 보관해 두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급하게 박음질 할 게 있어서 미싱을 꺼내놓게 되었다. 이 집으로 이사 후 한 번도 꺼내지 않은 기계를 박스에서 꺼내 전기를 꽂고 세팅을 마쳤다. 그런데 박을 수가 없었다. 보빈케이스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재봉의 실은 윗실과 밑실로 나누어져 있고, 두 가지 실이 함께 기계로 들어가 천에 동시에 박혀야 한다.두 장의 천이 하나의 쓸모를 가지려면 윗실과 밑실은 반드시 필요하다. 밑실은 보빈이라는 둥근 플라스틱(혹은 쇠)에 감아두어야 하는데 재봉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보빈에 실을 많이 감아둔다. 내 케이스에는 각각 다른 색실을 감은 서른 개의 보빈들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 케이스 전체가 사라진 것이다. 내겐 오직 미싱 안에 들어 있는 보빈이 전부였다. 근데 하필 밑실이 검정이었다. 흰색을 감아놓은 보빈이 필요했다. 세팅이 끝난 나의 기계는 번지수를 잘못 찾은 배달부처럼 어색해 보였다. 있을만한 곳을 발칵 뒤집어도 케이스는 나오지 않았다. 순식간에 내게 실망했다. 오래전 그때처럼 달달달 박고 싶었는데, 내 손으로 뚝딱 하나 만들어내고 싶었는데!
사용하려던 부자재를 도로 집어넣으면서 괜히 속상했다. 그리고 아까웠다. 값도 값이지만 추억을 잃은 것 같았다. 그 색실은 일부러 막 감아 놓은 게 아니라 필요할 때 하나씩 감은 거였다. 그러니까 파랑, 하늘, 청록, 연두, 초록, 민트색 보빈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각각 모두 필요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참 많이도 만들었다. 들쑥날쑥 색색으로 감긴 보빈들은 단골 카페에서 모은 쿠폰처럼 내 미싱사(史)의 꾸준한 증표였다. 무슨 색실로 뭘 만들었는지 다는 기억이 안 나지만 분명히 완성될 때마다 기뻐했을 것이다. 주는 나도, 받는 누군가도.
그러고 보니 재봉은 글쓰기랑 좀 닮았다. 보빈에 색실을 미리 감아놓듯 글쓰기에도 준비가 필요하다. 바늘에 실을 끼우고 페달을 밟으면 끝을 보고 싶은 것도 소재를 잡고 쓰기 시작한 글쓰기와 닮았다. 어렵지만 여러 번의 수정을 통해 마침내 완성했을 때의 그 성취감은 둘 다 엄청나다. 프릴을 만들어 달거나 레이스나 라벨 등의 부자재를 달면 완성된 소품이 더 예뻐지듯이 고민하고 디자인하면 글도 예뻐지기 마련이다. 쓰다가 막힌 채로 브런치 서랍에 담아 둔 이야기처럼 만들다가 포기한 원단들도 창고에 빡빡하게 있다. 그 중엔 욕심내서 시작했는데 나에게 안 어울리는 것도 있고 말이다.
이제는 낡아서 처음보다 덜덜 거리는 나의 미싱. 미싱 앞에는 지금도 중학생 아들이 아주 어릴 때 붙인 뽀로로 스티커가 그대로 있다. 그것 자체가 추억이다. 오래된 앨범처럼 곳곳에 묻은 추억 때 때문에 절대로 버릴 수 없어서 이사하기 며칠 전 고급 박스를 사서 차곡차곡 정리해 담았던 부자재들도 창고에 그대로 있다. 우리나라 전래동화 <아씨방 일곱 동무>처럼 지들끼리 일어나서 한박이 언제 오느냐며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배꼽이 찌르르 기분이 요상타. 당장 쓰고 싶은 글이 생각난 것처럼 설렌다. 다시 한번 집을 발칵 뒤집어 기어이 나의 보빈들을 찾아내야겠다. 찾아서 첫번째 작품을 만들고 나면 또 어떤 이야기가 서랍에서 튀어나올까 궁금도 하고.
*미싱은 소잉머신(sewing machinen)의 일본식 표기이지만 현실감을 위하여 그냥 사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