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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Jan 18. 2022

덕업일치의 꿈

언제부터일까? 덕질이라는 말이 유행하게 된 것은. 어떤 한 대상을 좋아하는 것을 덕질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시작하는 것을 입덕이라고 부르고, '내가 그것을 좋아합니다'라고 시인하는 것을 덕밍 아웃이라고 부른다.


나는 책을 좀 덕질하는 편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물론이고, 출판사가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출간하는 시리즈를 모으는 것도 즐긴다. 읽으려고 사는 편이지만 읽는 속도 이상으로 사두기 때문에 책장은 늘 꽉 차있다. 가끔 남편이 '필요 없는 책 좀 줘봐'라고 말할 때 세상에 필요 없는 책이 어딨느냐며 눈에 불을 켜며 되묻는데, 책에 입덕한 아내가 좀처럼 이해 안 되는 그는 말해봤자 소용없는 일에 대거리하는 대신 고개를 두어 번 흔들며 다른 곳으로 가 버린다. 그렇다. 나는 책 덕후다.


이번 달에도 덕질을 위하여 열 권의 책을 골라 결제를 했다. 이유는 분명히 있다. 독서모임 선정도서라서,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나와서, 한권만 더 사면 진짜 유용한 굿즈가 따라와서, 갖고 있으면 소장가치가 있어서, 리미티드 에디션이어서. 하지만 굳이 결제의 이유를 남편에게 밝히지 않는다. 책을 한 번에 사는 게 아니다 보니 하루 이틀 상간으로 택배가 도착하면 남편은 '또 샀어?'를 연발한다. 그럴 때마다 나의 반응은 일정치 않은데 '그래 뭐 어때?'로 되받아 칠 때도 있고, '아, 독서모임 도서라서. 호호'하면서 웃을 때도 있다. 때론 '출판사에서 준거야'라며 둘러댈 때도 있다.그것이 남편의 정신 건강에 좋다. '책 몇 권 가지고 뭘 그렇게 저자세로 구느냐' 할 수도 있겠지만 덕후가 그렇지 않은 사람과 살 때는 때론 자세를 낮추고 후일을 도모해야 할 때가 있다. (으, 여보 제발 이 글 보지 마)


전세로 살고 있는 우리는 2~4년에 한 번씩 이사를 해야 한다. 사실 그전에 여러 가지 이유로 1년 단위로 이사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이삿짐센터 직원들에게 늘 한소리를 듣는다.


"사모님 책이 너무 많아요." (저도 압니다ㅠㅠ)


한 번은 미안해서 이사 전날까지 박스를 주워다가 곱게 포장을 해놨는데 아저씨가 진심으로 화를 냈다.  다른 아저씨들까지 불러서 사모님이 이걸 다 싸놨으니 수레를 가져와라, 저쪽을 잡아라 민망하게 굴었다. 아저씨들은 이삿짐을 담을 때 무게를 최소화 해 나르는 모양이었다. 노란색 플라스틱 큰 바구니에 책을 겨우 예닐곱 권씩 담고 다른 가벼운 물품을 올리는 것을 많이 봤다. 책의 양이 어마어마해서 업체 사장님에게 직원들이 투덜거리더라는 후문도 들려왔다. 그래서 남편은 계약기간만 가까워오면 '책 좀 버려라' 성화였다. 아니 어떻게 버려 이걸!!



덕업 일치라는 말이 있다. 덕질하는 것이 직업이 되는 아주 특수한 경우를 일컫는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도 덕업 일치가 꿈이다. 친구들 중에 인플루언서가 있는데 그 애들은 가만히 있어도 출판사에서 메일이 온단다. '이번에 출간된 책인데 읽고 서평을 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나도 받아본 적은 있지만 업(직업)이 되지 않고 업(업보)이 되어 버렸다. 기한 내 시간 맞추기가 힘들었다. 여차하면 먹튀가 될 노릇이었다. 아니면 책이 내 스타일과 너무 다르거나 별로여서 읽기 싫기도 했다. 그러느니 돈 주고 사서 보는 게 속 편했다. 친구들은 가끔 원고료를 받기도 했다. 그들은 인정받는 기분이었고, 나는 시간 낭비하는 기분이었다. 꾸준히 기고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친구들도 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부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우리 독서모임 멤버인 오쌤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공기업 산하 도서관을 만드는데 거기서 북클럽을 모집한다고 한다. 분야는 정해져 있는데 동화, 인문학, 고전 독서모임 등 여러 가지란다. 오쌤은 인문학 북클럽 리더 겸 멘토를 제의받았고, 고전 북클럽을 맡아줄 사람을 찾는다는 말에 나를 추천했다고 했다. 깜짝 놀랐다. 오랫동안 독서모임을 하기는 했지만 내가 멘토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을뿐더러 오쌤이 나를 멘토로 추천했다는 게 얼떨떨하고 민망했다. 덥석 그걸 한다고 해도 될까? 게다가 일반 리더도 아니고 멘토라니. 지금까지 우리 독서모임을 다녀간 멘토들을 떠올렸을 때 그들에 비해 나는 네댓 살 어린아이 수준인데.


"한박쌤, 모임 이끈 지가 얼만데요. 할 수 있어요. 고전 좋아하잖아요. 이거 나중에 이력도 되고, 돈도 얼마간 준다고 하고. 우리야 보수 없이 지금까지 북클럽 운영했는데 여긴 돈도 준다니 얼마나 좋아."


돈? 내 덕질을 당당하게 해 줄 그 돈?


얼른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고맙다고도 여러 번 이야기했다. 오쌤은 관련 서류를 알려주고 준비해서 수일 내로 직접 가져다 내라며 관련 링크를 보내주었다.


 나는 책 읽고 모여서 토론하는 것을 사랑한다. 독서모임 하는 게 너무 좋아서 일정한 직업도 갖지 않는 나였다. 하지만 늘 돈도 안 되는 일에 열정을 과하게 쏟나 싶어 살짝 의기소침할 때도 많았다. 특히 남편이 가정의 수입 80% 이상을 책임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나도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주로 나 쓰는 편이다. 책도 한몫 단단히 하고!) 그런데 돈을 준다니. 늘 하던 대로 같은 책을 읽은 사람과 만나 두 시간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페이를 준다고?


당장에 남편에게 알렸다. 그날은 여행을 떠나는 날이었기에 돌아오는 대로 도서관에서 원하는 서류를 준비해 그곳으로 달려가겠다고 마음먹었다. 기쁨으로 흥분도 되었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온지 나흘째가 되었는데도 이상하게 행동으로 옮겨지지가 않았다. 내가 왜 이럴까? 그토록 고대하던 덕업 일치의 삶인데?


나는 내 마음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글쓰기 때문이다. 올해 목표를 아예 '책 줄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폭탄 맞은 것 같이 독서를 한다고 덕후는 아닐 텐데 나는 덕질을 정당화하기 위해 8년동안 숨도 안 쉬고 책을 읽어댔다. 집안 일도 뒷전이요, 필생의 숙원(?)인 글쓰기도 등한시했다. 작년 하반기에 가서야 비로소 에세이 모임을 만들고 슬슬 습관을 잡으려고 하는데 내가 저 일을 시작한다면 이전보다 훨씬 바빠질 걸 알기에  망설이는 것이다. 책 덕후로서 덕업 일치의 꿈을 코앞에 뒀지만 에세이스트 역시 나의 꿈이었으므로 잘 익은 고구마를 양손에 들고 껍질을 까지 못해 먹지 못하는 사람처럼 난처하게 서 있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까지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서류 마감 날짜는 다가오는데 점점 불안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게을러서도 마음이 변해서도 아니다. 나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고 싶다. 좋아하는 다른 것 몇 개를 포기하면서라도 해보고 싶은 일이다. 생각할수록 그 마음이 강렬하다. 어쩌면 고구마 두 개를 떨어뜨리지 않고 잘 까서 입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글감이 나올지도 모른다. 나 자신에게 좀 더 용기를 가져보면 어떨까? 제발로 와 준 기회를 이런저런 걱정으로 날려버리지 말고 이왕이면 새로운 에너지를 과감하게 투자해보고 싶다. 오, 왜 글쓰다가 마음이 정리되는 거지?(그래! 이거야!!)


드디어 나의 덕질에도 봄이 오는가? 내일은 진짜 노트북을 열리라. 그나저나 자소서 어떻게 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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