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여우
"세상이 좋아졌어. 백 년 정도 전 만 해도 쇠도 맛없었는데."
맥이는 자리에 앉아 군것질하는 아이처럼 얇은 쇠막대를 입에 물고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대나무는 맛이 떨어졌다며.'
"뭐 일장일단 아니겠어? 그냥 하나쯤 양보하고 사는 거지. 그런데 영감은 다리 하나 없이 있는 거 안 불편해?"
맥이가 고개를 돌리며 질문을 던졌을 때 늙은 개는 자리에 앉은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응? 내가 형태에 구애받는 몸도 아니고 갑자기 그건 왜 묻나?'
"내가 보기 좀 불편해서. 그리고 왜 하필 삼족구로 한 거야? 이제 여우 잡을 일도 없는데?"
'사람들이 호기심보다 연민을 갖고 또 귀찮게 하지 않아서지.'
"그 높으신 양반이 삼족구로 있어서 지내서 내가 어디 나가면 다른 분들한테 싫은 소리 들으니까 그러지."
'자네도 꾸중 듣는 건 싫어하는군.'
"그러잖아도 위에서 찍혀. 아래에서 찍혀. 피곤한 날 들이우."
'딸랑.'
둘의 대화시간을 깨는 방울 소리. 문이 열리고 들어 온 마른 체구의 20대 초반의 앳된 남자가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여기가 드림테라피 맞나요."
"어서 오세요. 드림테라피입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맥이 웃는 얼굴로 남자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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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이는 찾아온 남자를 자리로 안내하고 차를 내어준 뒤 이야기를 들으려 맞은편에 앉았다.
"요즘. 제가 잠도 못 자고 몸이 점점 안 좋아지는 것 같아서."
남자의 말을 들으며 맥이는 천천히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마치 며칠을 야근이라도 한 건지 퀭한 두 눈에 볼살이 헬쓱해 보여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남자는 모르겠지만 단전에서 진홍빛의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걸 알아챈 맥이는 웃으며 남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 보름 되셨나요? 보니까 장염 걸린 것 마냥 살이 급속히 빠지신 것 같은데?"
"예. 한 2주? 3주 전부터 몸이 급속히 안 좋아졌습니다. 먹고 자고 프로틴을 먹고 운동을 해도 살이 찌기는 커녕 점점 빠져서요. 병원에서도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하고 점집도 가 보려다 여기가 불면증 치료나 심리치료에 뛰어나다는 후기를 보고 혹시나 해서 찾아왔습니다."
"그럼 2주 전에 어디 특별한 곳 다녀오신 적 있습니까?"
"어. 아마 제가 막 제대하고 친구들이랑 클럽 다녀온 게 전부인데…."
"클럽?"
맥이는 턱을 괴고 생각하는 척하며 쉬고 있는 삼족구에게 말을 걸었다.
'맞지?'
'여우 냄새가 맞군.'
"흠. 아마 복무 기간 쌓였던 것들이 한 번에 터져 나오면서 심리적 공허가 생겼을 수도 있는 것 같은데. 혹시 그날. 이성과 만남도 이뤄졌었나요?"
"예? 그런 걸 알아야 해요? 테라피에서?"
"아 저흰 심리치료도 병행하니까 혹시 도움이 될 만한 단서가 있을지 모르니까요."
"아. 예. 그날 클럽에 갔다가 이리저리 퇴짜 맞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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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 나쁜 새끼들. 지들끼리만 여자 엮고 아. 아직 짬내가 안 빠졌나."
클럽에 전역을 축하한다며 함께 온 친구들이 모두 자신의 파트너를 찾아 스테이지 구석에서 부둥켜안고서 농밀한 움직임으로 춤을 추는 모습을 바라보며 승익은 화가 났는지 아직 짧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문지르며 맥주를 벌컥벌컥 마셔댔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 틈으로 친구들의 입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는 기분이라 술맛도 없었지만.
"어? 오빠 군인이야?"
낯선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몸에 착 달라붙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현란한 조명을 무시하는 것처럼 여자의 미모는 가려지지 않았고 귓가를 시끄럽게 맴도는 음악 소리도 여자의 붉은 입술에서 나오는 말소리를 막지 못하는 것처럼 선명하게들려왔다.
"군인 아닌데? 민간인인데?"
"아. 뭐야. 겁나 웃겨. 아니라고 하면 되지. 무슨 민간인이야. 막 제대 했나 봐."
꺄르르 대는 여자의 웃음소리 때문일까 요염한 분위기 때문일까. 아니면 술 때문일까.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승익은 낯선 여자의 미모 앞에서 긴장감이 조금씩 누그러져 갔다.
"민간인 오빠. 혼자야?"
"아니. 저기 친구들 같이 왔어."
승익이 손가락으로 친구들을 가리키며 대꾸를 하자 여자는 슬쩍 고개를 돌려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다들 짝 있는데. 혼자 있는걸 보니 짠하네. 나도 혼잔데."
"어?"
"나랑 같이 놀래?"
승익이 대답을 주저하자 여자는 승익에게 팔짱을 끼고서 자리를 옮겨 춤을 추며 입을 맞췄다. 속으로 함성을 부르며 여자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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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실이라 이름 붙은 방 안에 대형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는 승익의 꿈에 다녀온 맥이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영감. 마지막 여우가 언제였지?"
'못해도 사백 년도 훨씬 전인데…. 아직 요호(妖虎)가 남아있었나?
"그때 마지막 여우는 등선해서 선호(仙狐) 자리에 갔잖아?"
'마지막 백여우였는데….'
"일단 여우가 있다는 건 확실하네. 이놈 여기 이렇게 누워서 자고 있는데도 이거 봐. 단전에서 양기가 계속 빠져나가. 아주 그냥 단전이 헐겠네. 헐겠어. 이거 여우 기운 좀 빼줘. 엊그제 제대했다는데 창창한 놈 살아가게 해야지."
승익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둘의 눈에는 주둥이가 벌려진 풍선처럼 단전에서부터 양기가 새어나가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쯧. 이러니 먹고 자고 해도 부족하지."
맥이의 걱정 섞인 중얼거림을 타고 삼족구는 기지개를 켜고서 승익의 단전을 향해 큰 소리로 '컹!' 하고 호통치는듯한 울음소리로 짧게 한 번 짖었다.
짖는 소리에 놀랐는지 뭉실 거리던 진홍색 기운이 부르르 떨다가 단전에서 똑 떨어져나와 어디론가 도망치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그새를 놓치지 않고 입을 벌려 진홍색 기운을 씹어 삼켰다.
잠시 후 승익이 눈꺼풀이 서서히 열렸다.
"아. 뭐지. 엄청. 개운한데."
"많이 편해졌죠?"
"예? 예."
"자 일단 이거 한 잔 드시고"
맥이가 승익에게 차를 한 잔 건네주었고 아직 잠에 취해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모습으로 엉겁결에 차를 받아 벌컥 마셨다. 차를 마신 후 눈에 생기가 돌아오는 것이 지켜보던 둘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승익 역시 몸이 더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 클럽은 좀 자제하시고 편한 생각과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 금방 좋아질겁니다."
"아. 고맙습니다. 그냥 설마 하고 와본 건데 몸이 이렇게 좋아질지 몰랐습니다."
"자 계산은 이쪽으로 좀 더 쉬시다 가셔도 됩니다."
"아. 예."
맥이의 안내로 계산을 하러 따라가는 승익의 뒷모습 너머로 삼족구가 말했다.
'그래도. 겨드랑이 털 달인 물 이라니.'
'내 몸은 전부가 영물이야! 알면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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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호(妖狐) 같지?"
'아까 기운을 봐선 이제 갓 이백? 정도 넘긴 불여우 같던데.'
"이제 200살 먹은 게 벌써 양기를 탐해? 등선 하기 싫은건가?"
'양기를 탐하다 자칫 피를 맛볼까 걱정되네. 유혹에 빠지기 쉬울 때 인데.'
"그냥 둘까?"
'자네가 이 삼족구가 불편하다고 했으니 이참에 여우를 잡고 내 다른 모습을 가질까 하네.'
"아니. 그러게 왜 삼족구야! 사실 여우 있는 거 알고 있던 거 아냐?"
'이치대로 흘러가는 것뿐.'
"내가 말을 말지. 일단 크기나 더 줄이슈. 여우 잡으러 가게."
맥이는 구시렁대며 치료실로 들어가 구석에 놓인 옷장을 열어 슈트를 꺼내 입으며 조금씩 모습을 바꿔가며 이내 늘씬하고 잘생긴 외모를 변했다.
"갑시다."
해는 저물었지만, 오래간만에 맑은 날이라 그런지 거리를 환히 비추는 거리의 불빛들 사이로 하늘에는 별들의 반짝임이 보이는 그런 날이었다. 그런 밤하늘 아래 흰색 컨버터블의 하드 탑을 열고서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머리를 휘날리며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영감. 이태원이랑 강남이 아니었어. 이제 홍대 하나 남았는데?"
'여우가 여기저기 냄새를 뿌리고 다녔군. 영악하지만 그걸로는 어림없지.'
"그래서 홍대가 맞는 거야?"
'오늘은 만월이 저리 밝아 여우의 음기가 넘쳐 음습할 테니 여우로선 오늘이 길일이지.
여우 냄새가 점점 진해지는 걸 보니 맞는 듯하군.'
"그럼 더 빨리 가야지."
맥이가 기어를 변속하며 오른발에 힘을 주자, 자동차가 굉음을 내며 도로를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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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OS' 라고 적힌 간판이 빛을 발하고 그 아래 길게 줄을 늘어선 사람들을 옆으로 한 채 맥이의 차가 지나갔다.
"아니 뭐 술 한 모금에 고막 아프게 하면서까지 이렇게 줄을 서나? 진짜 딱 이름 그대로네. 혼돈."
'이곳이 맞는 듯하네. 여우 냄새가 저 계단 아래까지 퍼져있네.'
"그럼 가 볼까."
주차를 마치고 줄 서 있던 사람들을 한 번 훑어보며 차에 삼족구를 남기고 당연하다는 듯 맥이는 VIP 입구 쪽으로 향했다.
"아무나 들어오시는 곳 아닙니다."
입구 앞에서 가드가 들어가려는 맥이를 가로막았다.
"엉? 뭐라고?"
맥이의 반말에 가드는 인상을 쓰며 신경질적으로 맥이의 귀에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줄 서라고. 이 새끼야. 아니면 초대장 보여주던가."
"하하하하. 재밌네?"
가드의 속삭임에 큰 소리로 웃으며 줄 서 있던 사람들의 시선을 한 번에 받았다. 바로 옆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맥이 웃으며 가드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속삭이듯
이야기에 신력을 살짝 담아 말했다.
"내가 VVIP야."
찰나의 순간 가드의 눈빛이 변하고 맥을 다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입장을 허가했다. 맥이는 능청스럽게 가드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대기 중이던 아가씨들에게 익살스레 눈을 한 번 찡긋거리고 클럽으로 들어갔다.
'어쩌다 저리 경박스러워진 건지….'
차에 앉은 채 맥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젓는 삼족구였다.
둥둥거리는 낮은 비트 음이 점점 더 크게 다가와 맥이의 귀를 괴롭혔다. 실내를 가득 채운 담배 연기와 고약한 술 냄새는 시끄러운 음악의 도우미라도 되는 듯 눈과 코를 괴롭히는데 앞다투어 겨루는 듯 했다.
'이게 뭐 좋다고 이렇게들 몰려 있는 거야.'
인파가 몰려있는 위치를 피해 구석에 자리를 잡고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보통이면 금방 요기를 알아채겠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여 기운을 뿜어내는 곳에서 신력을 풀 수도 없어 골치가 아파져 오고 있었다. 거기에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여우가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기운을 흩뿌려 놓은 모양이라 여기저기 여우의 기운이 퍼져 찾기가 더 어려웠다.
'이거 참. 눈에 기운을 품기라도 하면 여우가 눈치채고 도망갈 테니 그럴 수도 없고.'
맥이의 변화한 외모를 보고 여자들이 몇 번 다가와 같이 놀기를 권했지만 모두 돌려보내며 클럽 안을 뒤지는데 집중했다.
"오빠. 눈 높은가 봐?"
누군가 맥이를 불러 뒤를 돌아보자 붉은빛이 맴도는 단발머리에 크롭 티. 그리고 타이트한 청바지를 입은 여자가 보였다.
"아. 누구 찾느라 그러니까 괜찮아."
"흐음. 잘생긴 오빠가 어떤 여자를 찾는 걸까?"
맥이의 옆에 선 여자가 슬쩍 맥의 몸을 더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어? 오빠 키도 크고 몸도 좋네? 찾는 사람 없는 것 여기 없는 거 같은데 나랑 놀지?"
"하. 고맙지만 누굴 찾는다니까."
"뭐야. 재수 없어."
맥이의 신경질적인 대답에 발아래 침을 뱉고서 여자는 옆자리를 떠났다.
"여튼. 요즘 것들은. 말세다. 말세. 아니 근데 이 잡것은 어딨는 거야.."
한참을 뒤져도 여우를 찾을 방법이 없던 순간 클럽의 조명이 번쩍거리며 음악이 바뀌고 일제히 사람들이 무아지경에 이르는 표정으로 몸을 흔들어댔다.
"춤도 참. 요란하다. 요란해. 요즘 유행인가. 어?"
사람들의 눈이 초점을 잃은 채 하나같이 같은 움직임을 반복하고 있었다. 좀 전까지 적어도 박자에 맞춰 여기저기 흔들어대고 있었다면 지금은 마치 기계처럼 일제히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홀렸다고? 어느새?"
아주 잠깐 그 잠깐의 시간이 마치 없던 일처럼 원래대로의 모습으로 돌아오자 클럽의 뒷문으로 한 여자가 서둘러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젠장. 날 찾으려 한 거구나!"
그제야 맥이는 자신도 모르게 신력을 흘렸다는 걸 떠올리며 흔들거리는 인파 속으로 몸을 날렸다. 클럽을 빠져나온 여자는 긴 머리에 군데군데 오렌지빛의 브릿지가 들어간 머리 모양에 하얀 피부 그리고 잡지 속 연예인 같은 몸매에 어디선가 모르게 요염함이 넘쳐흐르는 모습이었다. 외모와 달리 꽤 경박스러운 걸음걸이를 보였지마는.
"아우. 뭐야. 힘들게 모은 양기 거의 다 썼네. 근데 저놈은 뭐지. 도사인가? 기운이 엄청나던데. 아우 몰라. 일단 도망가야지."
여우는 그렇게 잠시 숨을 고르고서 자리를 뜨려는 순간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끼고서 고개를 돌렸다.
"집에 가려고?"
맥이의 비아냥거리는 질문에 여우가 눈을 흘기며 대꾸했다.
"오빠. 어차피 다 아는 것 같은데. 어디 이름 좀 날리는 도사인가 봐. 가던 길 가세요. 요즘 뭐 해 먹고 사나 몰라."
"하? 뭐? 도사?"
"생긴 걸 보니 도처 에서 여자들 여럿 울렸겠네. 그냥 돈 많은 여자나 하나 잡지. 왜 고생하면서 나 같은 거 쫓아다니는지 이해를 못 하겠네."
"고작 200년 산 여우 주제에 말을 막 하는구먼."
"여자 나이 그렇게 말하고 다니면 인기 없다. 도사 오빠."
"그런다고 네가 여길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뭐? 이 발 묶인 거? 오빠야 잘 봐."
여우가 말을 마치고 발에 힘을 모으자 새벽 달빛처럼 옅은 푸른색의 빛을 발하며 발을 묶었던 맥이의 술수가 깨졌다.
"도망가겠는데? 모아 놓은 기운이 아깝긴 한데 나도 살아야지. 잘생긴 도사 오빠. 잘있어. 앞으로 마주치지 말자고."
손에 입맞춤을 실어 약 올리듯 맥이에게 날린 후 여우는 곧장 위로 솟구치듯 건물 위로 뛰어올라 몸을 숨겼다. 그런 여우를 바라보며 맥은 고개를 숙이고는 혀를 차며 말했다.
"쯧. 그냥 나한테 잡히지. 어린 여우라 그런가. 맹랑하구만."
건물 위로 날아든 여우는 사람의 형상으로 바람을 타고서 빠르게 달려 나갔다.
"아우. 정기 아까워. 십 년치는 쓴 거 같네. 망할 놈. 오늘이 정기 모으기엔 딱 길일인데."
"컹!"
주변을 가르는듯한 우렁찬 울음소리에 구시렁대며 허공을 가르듯 뛰어가던 여우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본능 속에 심어진 공포였다. 서둘러 고개를 두리번거렸으나 주변 건물 위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뭐야…."
그러자 여우의 머리 위에서 작은 형체가 서서히 내려와 멈춰있는 여우의 어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 간 게냐?'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사방으로 날리는 털. 어둠 속에서 푸른 안광을 비추는 사나운 얼굴
다리 세 개를 한 삼족구의 모습. 술(戌) 이였다.
"히이익!!!"
여우는 놀라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알 수 없는 공포와 위압감에 눌려 움직일 수 없었다.
'어리지만 여우라서 내가 무언지는 아는 모양이군. 그래. 두려우냐?'
말이 끝나자마자 여우는 남아있던 정기를 몸 안에서 터트려 삼족구로 변한 술의 주박을 풀고서 몸을 날렸다. 정기를 소진한 여우의 몸이 점차 사람의 형태를 벗어나고 있었다. 푸른빛이 도는 여우의 기운이 걷히자 온몸이 주황빛과 검정이 섞인 붉은여우가 꼬리를 치켜들고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불여우라 생각했는데 역시.'
'나…. 날 어쩔 셈인데…요.'
'이제야 존대를 하는구나. 겁이 나느냐.'
'난…. 아니 전…. 아직 사람을 해하지 않았습니다.'
'해 할 뻔 했지.'
'그…. 그것은.'
'게 있거라.'
그 말 한마디에 불여우는 꼼짝달싹 못 한 채 다가오는 삼족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찌 도를 닦을 생각은 아니 하고 정기를 탐하려 했는고. 이제 200밖에 아니 산 것이.'
삼족구의 물음에 여우는 대꾸도 못 한 채 추위에 떠는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고만 있었다. 그런 여우의 목덜미에 삼족구의 이빨이 닿자 여우의 눈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네 놈이 정도(正道)를 벗어나 샛길에 들려 하니 내 너의 목을 물어 머리통을 삼켜야 하겠지만 허리 잘린 땅덩어리 마지막 여우인지라 자비를 베풀 수도 있다.'
'웃기네!'
여우는 분하다는 말투로 소리치고는 기운을 모아 몸 주변에 파란 불덩어리를 몸에 둘렀다. 불덩어리는 여우에게서 점점 떨어져 나와 동그랗게 뭉쳐져 주변을 돌며 삼족구로부터 몸을 지키려 하는 듯 보였다.
'응? 아직 어린 여우가 여우불이라. 꽤나 노력 했군.'
"삼족구인지 뭔지 모르지만, 예전 전설에 나올 늙은 개새끼한테 꿀릴 이유는 없지!"
말을 마친 여우가 꼬리를 놀리자 여우 불 하나가 술을 향해 화살처럼 매섭게 날아들었지만 흥미가 없다는 듯 앞발을 축으로 몸을 틀어 가볍게 피했다. 하지만 바로 뒤에 또 다른 여우 불 하나가 갈무리되어 날아와 몸통에 박히는 것은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술이 있던 위치에 안개가 깔리듯 영기로 가득 퍼져 시야가 차단당했으나 여우 불이 명중했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긴장이 풀리며 여우는 공포가 사라져갔다.
'헹. 꼴 좋다!! 40년 음기를 담은 여우 불인데 며칠 앓아눕다가 얼어 죽어버려라!'
'40년 치고는 꽤 모았구나. 기특한 녀석.'
영기로 가득 찬 연무가 채 걷히기도 전에 술은 여우의 옆에 서, 귓가에 속삭이듯 여우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이 땅에 마지막 불여우인지라 손에 정을 두려 했거늘. 어른 된 도리로서 회초리는 들어야겠지.'
말이 끝나자마자 술은 여우의 목덜미를 물었고 이에 여우는 '으악' 소리를 지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몸에 아픔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여우의 몸 안에 자리 잡은 음기를 삼족구가 흡수하고 있었기에 여우는 혼절한 채 점점 기운을 잃어갔다.
"어? 끝났어?"
맥이 나타나 작아진 여우를 입에 물고 있는 술을 보며 싸움의 끝을 확인했다.
"아직 정정하네. 어르신."
'새끼여우 불장난에 욕 볼만큼 나이를 먹진 않았네.'
입에 물고 있던 불여우를 바닥에 내려놓자 여우가 정신을 차렸다.
"이거 지금 보니까 불여우네?"
'마지막 불여우.'
'살려 주세요. 제가 잘못 했습니다.'
그새 정신을 차린 건지 여우가 웅크려 앉아 작은 소리로 살려달라 말했다. 맥이는 술을 보며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너는 이 땅에 남은 마지막 불여우. 몸에 모아둔 음기는 내가 모두 삼켜버렸다. 이젠 한낱 미물처럼 살아야 할 것인데도 살려달라는 것이냐? 요술도 못 부리고 그냥 금수로 살아도 죽기는
싫다는 게냐?'
'저…. 저는! 사람을 해하지 않았습니다! 금수같아도 살고 싶습니다. 언젠가 꿈에서 천호(天狐)께서 나타나 정진하라 하시고 살아가라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천호가 되고 싶습니다.'
"야. 여우 아까랑 다르게 꽤나 공손해졌다?"
'도사 놈…. 여기 삼족구님만 아니었다면...'
"어? 너 아직도 내가 누군지 모르는구나? 영감 내가 얘 처리해도 돼?"
'죽이진말게.'
맥이가 웃옷을 벗어 던지고서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달빛에 반짝이는 머리와 함께 선글라스를 벗으며 품에서 작은 구리선을 꺼내 입에 물고서 불여우를 보며 씨익 웃으며 말했다.
"맥이 라고. 알지?"
맥이가 장난스러운 웃음과 함께 구리를 질겅거리며 신력을 풀자 아까와는 다른 엄청난 위압감에 놀라 불여우는 그 자리 그대로 얼어붙은 채 오줌을 지리며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어떻게 할까. 이 꼬맹이."
'모아둔 기운 중에 음기를 없앴으니 사람을 홀리거나 정기를 빼앗진 못할걸세.'
"마지막 불여우라 살려둔거지?"
'이 땅에도 신선하나 더 있으면 좋지 아니한가.'
"그럼 뒤처리는 내가 할게. 전에 그슨대는 영감이 도와 줬으니까."
말을 마치고서 맥이는 여우의 뒷덜미 가죽을 한 손으로 집어들고 건물 아래로 뛰어 내려 어둠속을 뚫고 달려나갔다.
'부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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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아오자 들려오는 새 소리와 햇살이 불여우의 눈과 귀를 괴롭혔다. 이상하게 피곤했는지 불여우는 잠을 더 자고 싶었지만 문득 지난 밤 일이 떠 올라 눈을 번쩍 뜨고는 주위를 살폈다.
"일어났냐?"
맥이 잠에서 깨어난 불여우 옆에서 앉아 전선을 질겅거리며 말을 걸었다. 불여우는 그대로 머리를 땅에 쳐박고서 대답을 대신했다.
"일어났냐니까."
'제가. 신수를 몰라뵙고.'
"됐고. 여기 어딘지 알겠냐?"
불여우는 맥이의 물음에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서 주위를 둘러보더니 잠시 눈을 감고서 킁킁대며 냄새를 맡기도 하다가 하늘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짠 내가 살짝 저 멀리에서 오고 산의 기운이 꽉 붙잡혀 평온하고 주변 멀지 않은 곳에 도시도 있고. 소백 아닙니까..'
"너 200년 허투루 산 건 아니구나? 여기 소백산 맞아."
'헌데 여기에는.'
"그 나라에서 여우 복원사업? 그런 거 하는 곳이 여기 거든. 뭐 너 살기엔 안성맞춤이지.
정진하면서 여기서 보양이나 해라. 영감이 그리해달래."
'영감이라 하시면 그 삼족구..'
"어. 사실 삼족구는 진짜 정체는 아니야. 귀찮은 걸 싫어해서 그러고 다니는 거지. 그것보다 훨씬 위라고. 십이지(十二支) 알지? 그 양반이야. 대충 그리 알고 여기서 천요의 자리까지 노력해. 쓸데없이 사람들 놀라게 하거나 하지 말고."
'말씀은 감사하온데 전 지난 밤 모아둔 정기가 모두 사라져….'
"응? 네가 막 쏘던 그 여우 불? 영감이 다시 넣어줬는데? 몸속에 고루 퍼져서 못 느끼나?
여하튼 그런 줄 알고 지내라."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아! 너 까불었던 것 혼내주려고 꼬리털은 좀 뽑아서 가져간다. 쓸데가 있어서."
불여우가 고개를 돌려 꼬리를 보자 마치 피부병에 걸린 것마냥 꼬리털이 한 웅큼 뽑혀져 있었다. 놀라 꼬리를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지만 지난 밤의 죗값이라 생각하기로 하고 혼자 속을 앓았다.
"간다. 잘 살고 다음에 또 사람들 홀리면 영감이 목을 딸 것 같으니까 기억해라."
다소 살벌한 인사를 마친 맥이 산비탈을 빠르게 내려가며 점점 작아지자 불여우는 캥 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왔던 꼬리의 모습을 기억하며 짧은 울음을 토하고서 그렇게 산으로 깊숙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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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는가.'
"아이구..힘들어..간만에 달렸네."
'멀리 다녀왔나.'
"아니 그냥 뭐 근처 산에 놓고 왔어."
'소백이 근처인 줄은 몰랐네.'
"하여튼. 능구렁이 같다니까. 아! 영감 이거 봐. 불여우 털."
불여우의 꼬리털이 한 움큼 뜯긴 그대로 맥의 손 위에 놓여있었다.
'그걸로 뭘 하려고?'
"으흐흐. 붓 하나 만들까 해서. 비싸게 팔릴걸?"
'나는 가끔 자네가 신수였다는 게 믿기질 않네.'
“비싼 사료 사다 드릴 테니. 그만. 좀."
‘한데 내가 먹지도 않는 사료는 왜 사는 건가.’
“기분이라도 좀 내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