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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재 Dec 03. 2022

거리에서 쓴 자본주의 비판 - 3

지속 불가능한 자본주의

2장. 지속 불가능한 자본주의


 경제의 지속 가능성은 무엇이 보장하는가? 더 많은 생산과 수출, 탄탄한 소비와 아낌없는 정부 지출, 그리고 기술 혁신과 활발한 재투자가 보장할까? 만약 이것들 중 몇 개가 부족하면 어쩌지? 경제를 지탱하는 수많은 요인들을 떠올리면 벌써부터 골치가 아프다. 하지만 골치가 아픈 이유는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지금, 경제는 무엇 때문에 지속되고 있는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는 욕망이 끊이지 않고 계속 실현될 때 지속 가능하다. 사실 경제성장률이란 실현된 욕망의 상승률을 의미한다. 경제 성장량을 계산할 때 생산 과정에 투입되는 중간재나 재고자산은 제외하고 경제재의 효용이 완성된 지점들만 더해야 하는데, 효용이 완성되었다는 말은 어떤 욕망이 충족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희일비하며 모든 정부가 쫓고 있는 경제성장률이란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충족되고 있는지 그 총량의 증가를 수리적으로 가늠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욕망은 무한하지만 무한히 충족될 수 없다. 무한하지 않은 것은 반드시 끝나기 마련이다. 더구나 그 상승률이 0을 넘으려면 이전에 필요했던 조건보다 더 많은 자원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따라서, 마치 0을 향해 천천히 수렴하는 무한소처럼 욕망의 상승률은 엄연히 극한값을 가진다. 이런 사실을 애써 부정하며 더 많은 성장과 혁신만을 강조하는 태도는 거북이는 영원히 따라 잡히지 않을 거라는 제논의 역설이 현실이라고 믿는 것과 다르지 않다. 환상에 빠져있는 경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결국 환상이었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진다면, 대중의 처절한 비명과 함께 경제는 무너져 내릴 것이다.


경제의 지속 가능성은 성장의 본질적 한계에만 갇혀 있지 않다. 기후 위기와 불평등 문제 역시 경제를 지속 가능하지 않게 한다. 생물다양성이 급격히 감소하고 더 이상 인간이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이 된다면, 사회가 분열되고 자살률이 폭등하며 결국 소비할 사람이 모두 사라진다면 경제가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분리수거를 좀 더 열심히 하고 소비를 줄이거나, 아니면 기업의 ESG 경영(environmental, social and corporate governance)을 강제한다고 해서 기후 위기를 막을 수 없고, 공공지출과 복지정책을 늘리거나, 아니면 영구임대주택을 더 많이 짓는다고 해서 불평등을 해소할 수는 없다. 폐암에 걸렸다면 당장 담배를 끊고 수술로 암덩이를 제거해야 하는 것이지, 여전히 담배를 피우긴 하지만 하루 반갑으로 흡연량을 줄인다고 해서 폐암이 저절로 없어질 일은 없다. 1992년 유엔에서 기후변화 협약이 처음 채택된 이후 지금까지 100차례가 넘는 공식 회의가 진행되었지만 기후 위기는 여전히 위기로 남아있다. 그들은 내가 태어난 날부터 지금까지 테이블에 앉아 협상만 하고 있고, 2015년에는 지속가능 발전목표를 결의하며 열 번째 목표로 불평등 해소를 내걸기도 했지만 나는 그들의 활약을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지금의 경제, 아니 앞으로의 경제가 지속 가능하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전개가 필요하다. 더 현실적이고 겸손한 자세로 원래 있던 낡은 공리들을 수정해야 한다. 퇴보를 향해가는 성장은 당연히 성장이 아니다. '발전'의 개념에 대해 새로운 사회적 합의가 뒤따라야 한다. 과학기술이 발전하거나 수익이 증가하는 것은 자본의 발전이지, 사회의 발전이 아니다. 사회 내에 있는 부의 총량이 증가하는 것을 사회의 발전, 나아가 국가의 성장으로 바라보는 것은 사회와 국가를 자본의 공간으로 왜곡하는 관점이다. 사회는 자본의 틀이 아니라 사람의 집합이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돈도 있고 공장도 있지만, 환경과 문화, 예술, 교육, 철학, 과학, 윤리, 언어 등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많은 것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위험들이 코 앞으로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여전히 자본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자본주의의 순환논리에 있다. 가령, 산업 자본주의의 '생산력 지상주의'가 대표적이다. 생산력이 증가할수록 자본의 증가와 부의 축적이 보장되므로 경제는 그 이전보다 지속 가능하다고 여긴다. 따라서, 생산력을 증가시키기 위한 자본가와 국가의 노력은 정당하며, 경제를 지속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생산력을 증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산력을 증가시켜야 하는 이유는 (자본주의니까) 생산력을 증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이유는 (자본주의니까)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논리다. 이밖에도 자본주의를 성장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순환논리는 많다. 자원을 선점한 자들의 양보 없는 무한경쟁, 소비를 촉진하기 위한 양적완화, 대기업을 위한 탈규제 등은 자본주의의 영속성을 갈망하며 성장 아닌 성장을 쫓는 일이다. 마치 너무 목이 말라서 자꾸 바닷물을 마시거나 니코틴에 중독되어 자꾸 담배를 피우는 모습과 같다. 자연에서 끝없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암세포밖에 없다.


갈수록 많은 경제 협의체와 글로벌 기관들이 자본주의의 지속 가능성을 가장 큰 화두로 삼고 있다는 점은 자본주의의 지속 가능성이 위협받고 있다는 방증이다. 2020년에 열린 다보스포럼(WEF)의 주제는 ‘상호 협력하며 지속 가능한 세계를 위한 이해관계자들’이었고, 국제결제은행(BIS)과 바젤 은행감독위원회(BCBS)는 기후 위기를 금융 위기로 인지하기 시작했으며, 신자유주의 진영의 대표주자인 국제통화기금(IMF)조차 최근에는 정책을 통한 포용적 성장을 강조하고 있다. 참고로 국제통화기금은 2015년에 발표한 '소득불평등의 원인과 결과' 서문에서 불평등의 순기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불평등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사람들이 경쟁하고 투자하는 유인책이 되며, 기술 혁신과 기업가 정신을 자극해 경제적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어쨌든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여러 주체가 인식의 전환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기조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걱정스럽다. 각각의 주체가 대안을 논의할 때, '지속 가능한 경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영속'을 전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서, 몇 가지 핵심 문제만 완화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으니 자본주의는 계속 삶의 바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는 역시나 동의하기 어렵다. 순전히 위험을 측정하고 관리하는 차원에서 자본주의의 지속 가능성을 평가할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태생적인 속성으로 말미암아 경제의 지속 가능성이 위협받고 있다는 긴박한 위기감이 있어야 한다. 정녕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뒤늦은 상상을 시작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시대가 마주하고 있는 과제들을 문제의식에 집어넣는 것은 시대를 속이지 않는 솔직한 자세이기는 하지만, 문제를 정확하게 보지 않으려는 것은 비겁하다.


자본주의의 지속 가능성이 아니라 경제의 지속 가능성을 고민해야 한다.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되물으며 자본주의의 순환논리를 끊어내야 한다. 자본 중심의 수학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의 유기적인 생각으로 전환해야 한다. 시스템의 수정과 변화로 인한 고통은 이전 시스템의 수혜자들이 짊어져야 하며, 모든 변화의 과정은 특정 집단이 아니라 대중이 주도해야 한다. 타인의 욕망 어린 동기화를 경계하고, 무엇을 위한 경제인지 항상 점검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삶의 질을 화폐 가치로 축소하는 기존의 측정 지표들을 과감하게 거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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