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영재 Dec 03. 2022

거리에서 쓴 자본주의 비판 - 4

욕망 바이러스


3장. 욕망 바이러스


 긴 시간 동안 많은 경우의 수를 뒤로하고 자본주의에 안착하게 된 인간의 사정을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가 보여주는 특이한 현상들로부터 상상에 필요한 단서들을 도출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단서는 단연 인간의 욕망이다. 자본주의를 보기 좋게 비판하기 위해 인간의 욕망을 욕보이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욕망은 모든 논의에서 항상 중요하다.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생산과 분배가 존재하는 모든 시스템은 욕망을 원동력으로 삼으며, 제도 속에서 욕망이 발산하는 궤적은 그 사회의 속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더구나 우리는 모두 욕망에 한해서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시스템의 모든 부분을 실증하지 않더라도 욕망이 실현되는 원리만 알면 앉은자리에서 시스템의 부작용도 유추할 수 있다.

사실 욕망은 그 자체로 생명에 충실하고 순수한 것이다. 개인의 순수한 욕망은 나쁘지 않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의 고통의 원인을 욕망으로 보았지만, 욕망이 곧 고통은 아니다. 욕망은 인간에게 존재의 이유와 창발성을 부여하는 우주의 에너지다. 사과 한 조각부터 우주왕복선까지, 인간이 마주하는 모든 것은 욕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욕망은 세상을 바라보게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규정하며, 세상을 살게 한다. 그런데 순수한 욕망이 아닌 불순한 욕망은 나쁘다. 시스템과 타인에 의해 복제된 욕망은 불순한 욕망이다. 이 욕망은 궁극적으로 개인의 주체성과 인간의 존엄성, 환경의 중요성을 간과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복제된 욕망은 더 많은 에너지와 자원, 그리고 또 다른 욕망을 필요로 하며 바이러스와 같이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더 많은 부와 더 큰 성장을 위해 이런 불순한 욕망마저 필요하게 만든다. 자연스러운 욕망만으로는 성장에 필요한 조건을 충족하기 어렵다. 만약 불순한 욕망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자본주의는 지금쯤 피날레를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오직 순수한 욕망만 존재하는 세계였더라면, 더 많은 부를 축적하려는 자에게 질타가 쏟아지고 서로가 가진 욕망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각자가 추구하는 욕망의 궤적이 인구수에 가까웠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 규정하면서 욕망을 제도와 관습의 산물로 보았다. 2천 년이 흐른 지금도 마찬가지다. 제도와 관습은 새로운 욕망을 학습할 좋은 기회의 창이고 대중의 욕망은 다양한 문화 산업과 정치를 통해 해소되기도 한다. 자본주의 또한 인간의 욕망과 아주 밀접하다. 자본주의는 욕망의 산물이고 욕망은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오직 자본주의만이 인간의 욕망을 확대 재생산한다는 점이다. 욕망을 확대해서 다시 만들어 낸다는 뜻은 단순히 욕망을 자극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쉽게 말해, 욕망을 더 원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즉, 자본주의에서 욕망은 본성이나 행동의 동기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사회는 맹목적으로 욕망을 욕망한다. 나는 이것을 욕망 바이러스라고 부른다.

호모 데지데란스(homo desiderans)는 욕망 바이러스에 걸린 인간이다.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의 경제적 목적이 욕망을 향하기 시작하면 호모 데지데란스가 된다. 그는 더 많은 욕망을 갖기 위해 욕망을 실현한다. 더 많은 욕망만 가질 수 있다면, 수단을 필요악으로 여기며 목적을 정당화한다. 그는 이기주의자며 결과주의자이고, 동시에 욕망에 중독된 나르시시스트다. 그는 충분히 많은 부를 가지고 있지만, 남들보다 더 많은 부를 가지지 못하면 괴로워한다. 그의 눈에 세상은 오직 자신보다 더 가진 자와 덜 가진 자로 구분된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는 것. 그의 인생은 끝날 때까지 욕망을 채우는 과정으로 가득 차 있고, 인간의 존엄성이나 자연의 소중함은 끼어들 곳이 없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욕망 바이러스는 공기를 통해 전염된다. 그가 평생 동안 일구어낸 사회 분위기와 성공의 뉘앙스를 다른 인간들이 학습하기 시작한다. 욕망에 중독된 그의 퀭한 두 눈은 고집 가득한 눈으로, 차가운 심장은 냉철한 이성으로 미화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결국 그는 못 다 이룬 욕망을 뒤로한 채 죽음을 맞이하지만, 또 다른 호모 데지데란스가 그의 궤적을 답습한다. 자본주의는 그들 덕분에 엄청난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그렇다면 욕망 바이러스는 대체 왜 생기는 걸까? 자본주의는 어떻게 욕망 바이러스를 만들었을까?
욕망의 확대 재생산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자본주의의 파생 원리들부터 짚어보자.

ㆍ마케팅
: 광고는 팔고 싶은 것을 살 수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ㆍ자본시장과 금융의 대중화
: 금융의 대중화는 대중의 투자 활성화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투기 심리와 불로소득 추구, 그리고 한탕주의를 부추긴다.

ㆍ유한계급(leisure class)에 대한 동경과 모사
: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부유층의 삶은 항상 모두의 관심사다. 그들이 가진 삶의 양식은 대중문화의 일부가 되었고 일부는 그들처럼 살기 위해 산다.

ㆍ소비와 부를 미덕으로 삼는 사회 분위기
: 개인의 가치 기준은 사회 분위기에 대단히 좌우된다. 사회는 경제 성장에 필요한 조건들에게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ㆍ경쟁과 비교 심리
: 자원의 희소성은 자본주의를 거쳐 경쟁의 구실이 된 지 오래고, 지나친 경쟁심리는 구성원 간 심리적 밀도를 높여 긴장관계를 만들었다.

ㆍ계층주의와 전시효과
: 부의 양극화로 인한 계층 간 갈등은 비교 주의를 넘어 배타주의로 변질되었으며, 자신보다 높은 계층의 소비 수준을 모방하여 그들에게 배제되지 않으려는 욕망이 생기게 되었다.

ㆍ이기주의와 천민자본주의 등
: 황금만능주의는 공정성과 직업윤리를 상실하게 하고 물질에 대한 욕망을 부추긴다.

위의 현상들은 자본주의와 결합한 관습이 욕망을 어떻게 자극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자극된 욕망이 어떻게 실현되고, 또 어떻게 욕망을 확대 재생산하는지는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제도와 관습을 통해 새로운 종류의 욕망이 생산된다는 사실만 보여줄 뿐 맹목적으로 욕망 자체를 원하는 호모 데지데란스를 묘사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이 현상들은 욕망의 자기 복제에 관여하는 일종의 효소로 보아야 한다. 바이러스가 효소의 도움으로 상피세포를 뚫고 들어간 후 신체의 자원을 이용하여 자기 복제를 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욕망의 확대 재생산에 비유한다면, 자극된 욕망이 멈추지 않고 어떤 원리로 실현되고 어떻게 복제에 이르게 되는지, 그 근본적인 해답을 떠올려야만 우리는 바이러스를 정복하고 백신을 개발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 논의를 확장하려면 욕망의 대략적인 원리를 알아보아야 한다. 다음은 내가 생각하는 욕망의 세 가지 규칙이다.

첫 번째. 욕망은 주관적 조건이 모두 충족되면 반드시 실현된다.
두 번째. 욕망이 자극되기만 하거나 주관적 조건이 모두 충족되지 않는다면 실현되지 않는다.
세 번째. 욕망의 주관적 조건이 일정한 선으로 충족되면 완성된 조건이 지향하는 욕망이 자극된다.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누구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행동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는 참지 못하거나 비교적 적은 노력으로 욕망을 실현 한다. 왜냐하면 욕망을 실현하기에 앞서 각자가 가지고 있는 특수한 사정, 생물적, 물리적, 사회적, 심리적 조건 등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에이브라함 메슬로우가 제시한 단계적 욕구 이론에 견주어 보면, 여기서 말하는 욕망의 주관적 조건은 상위의 욕망으로 나아가기 위한 동기의 선결조건과 비슷한 개념이다. 그러나 이것은 메슬로우의 그것과 달리, 욕망의 자극과 실현을 함수관계에 놓는 수학적인 원리를 담고 있다.

주관적 조건에 포함되는 욕망의 실행능력을 예로 들어보자. 욕망의 실행능력이란 욕망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수단, 감정, 행동을 말한다. 욕망의 실행능력이 점점 증가하는 개인은 이전보다 더 높은 확률로 욕망을 실현한다. 이와 동시에 욕망의 실행능력이 증가하는 것만으로도 주관적 조건이 상당히 충족되므로 실현 여부를 떠나 욕망은 증가한다. 남들보다 탁월한 실행능력을 갖춘 자가 욕망을 억제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행능력이 월등히 낮은 사람보다 더 많은 욕망에 시달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금욕주의를 따르기 위해 빈자를 자처하는 수행자들은 이런 욕망의 원리를 잘 응용하고 있다. 그들은 욕망의 구체적인 실행능력을 과감히 제거하고 꽤 오랫동안 욕망을 억제한다. 못 하면 하지 못 한다는 확실한 장치가 그들에게는 곧 욕망을 억제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인 셈이다.

그러면 자본주의는 이러한 욕망의 규칙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까? 아쉽게도 금욕주의를 따르도록 내버려 둘만큼 현대 자본주의는 더 이상 호락호락하지 않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지닌 욕망의 속성에 교묘히 개입하여 불순한 욕망을 부추긴다. 욕망의 다양성을 훼손하고 새로운 욕망이 자극되기 위한 임계점을 낮추며, 욕망을 실현할 때마다 보상을 주어 욕망에 중독되도록 만든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자본주의가 사회에 제시하는 '선(good)'이 성장에 필요한 제한적인 삶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선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보상과 공포, 심지어 죽음이 저절로 주어지므로 개인의 순수하고 다양한 욕망은 왜곡되기 쉽다. 자연스러운 욕망은 훼손되고 단순해진다. 이곳이 바로 인간이 만든 시스템이 인간을 만들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이 과정이 몇 번만 반복되면 누구나 자본주의에 길들여진다. 삶의 양식은 자본주의의 영속에 힘을 보태는 궤적으로 제한되고, 보상에 대한 기억은 욕망의 주관적 조건이 일부 충족되기만 해도 쾌락 중추를 자극한다. 욕망의 보상회로를 갖게 되는 순간, 인간은 주관적 조건을 축소하고 더 많은 욕망을 원하기 시작한다. 각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불필요한 소비를 한 번이라도 해 보았거나 부의 축적을 목적으로 여기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욕망 바이러스에 걸린 것이다.

부의 범위를 돈으로 축소하면 현상은 더 뚜렷하다. 돈은 가치의 저장수단므로 돈이 더 많아질수록 더 많은 욕망, 더 큰 욕망을 실현할 가능성이 증가한다. 주머니에 10만 원이 생겼다면 10만 원어치의 욕망을 실현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돈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요의 유용한 수단이므로 예비비가 증가한 만큼 욕망의 주관적 조건은 더욱 충족된다. 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욕망은 더 쉽게 자극되고,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 항상소득과는 무관하게 더 많은 돈을 원하게 된다. 돈을 위해 돈을 벌기 시작하고, 노동의 존엄성은 사라지며, 개인의 선은 자본의 증식으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경제적 자유는 사실 욕망의 자유가 아니라 욕망을 덜 실현해서 얻을 예비적 고통으로부터 그나마 더 자유로워진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진정한 자유일까? 자본주의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혁신적인 기술이나 거대 자본에 있지 않다. 공포에 사로잡혀 환상에 자유를 반납한 평범한 참여자들에게 있다. 어느 참여자의 욕망이 아무리 순수하고 독특하다고 하더라도 욕망의 실현에 필요한 주관적 조건이 소비나 부의 축적과는 전혀 무관하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예비적 고통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가난, 실업, 손해, 실패, 그리고 죽음의 공포는 그가 맨 처음에 가지고 있었던 순수한 욕망을 짓누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정작 고통은 환상에 불과하다. 가령, 상대적 가난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욕망의 주관적 조건을 자본주의에 침식당하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다. 욕망을 증가시키는 대가로 욕망을 실현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심을 줄여주는, 이러한 등가교환이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원동력인 것이다.

이런 현상은 개인뿐 아니라 계속 앙의 수익률을 추구하는 기업의 경제 행위에도 부합한다. 기업은 개인보다 훨씬 거대한 집합이지만 욕망에 한해서는 비교적 단순하다. 기업에게 욕망의 실행능력이란 곧 생산성을 의미한다. 생산성이 증가하는 만큼 수익은 커질 것이므로 생산성은 수익의 주관적 조건이 되고, 강력한 신자유주의 기조는 수익의 주관적 조건을 단순화한다. 어떤 기업이 외부효과와 환경, 기업의 사회적 책임 등으로부터 더 자유로워질수록 수익의 주관적 조건은 더 단순해진다. 즉, 생산성의 증가만으로도 기업은 더 많은 수익을 원하게 되고, 이것은 다시 더 높은 생산성을 요구하게 만든다. 생산성을 증가시키기 위한 기업의 노력은 정당하다. 다만, 욕망의 확대 재생산이 발생한 지점부터 맹목적으로 수익을 추구하는 기업의 경제 행위는 결코 사회 전체의 경제적 이익과 일치할 수 없을 것이다.

혹자는 자본주의가 인간의 욕망에 가장 충실한 경제 체제라고 말한다. 이는 틀린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경제에 충실하도록 만드는 체제다. 어떤 시스템이 인간의 욕망에 충실한 경제 체제가 되려면 욕망의 확대 재생산이 없어도 문제가 없는 시스템이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욕망 바이러스 없이는 제대로 돌아갈 수 없는 시스템이다. 욕망은 자극되고 실현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이 떠오르고 심장이 뛰는 일처럼 욕망 역시 생명의 거품이다. 욕망은 무한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는 무지는 욕망의 수위를 높이기만 할 뿐 인생을 조금도 채울 수 없다. 실존하고 싶다면 자연스러운 욕망을 추구해야 한다. 시대와 분위기를 탓하며 표류하기만 한다면 생명의 거품은 이미 꺼진 지 오래다. 지금 자본주의는 엉덩이와 성기 사이쯤에 걸쳐있다. 아직까지는 욕구 해결에 사로잡힌 야만적 경제 체제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세련된 제품과 서비스가 등장한다고 해도, 욕망 바이러스를 치료하지 못한다면 결국 앓다가 운명할 시스템이다. 다음에 이어질 새로운 경제 시스템은 적어도 배와 심장 사이에 있어야 한다.

작가의 이전글 거리에서 쓴 자본주의 비판 -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