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쓴 자본주의 비판 - 5
과잉공급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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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과잉공급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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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숲에 백 마리의 여우원숭이가 살고 있었다. 여우원숭이는 멸종 위기에 처한 몇 안 되는 영장류다. 전 세계의 야생동물보호단체와 정부 당국은 여우원숭이의 개체 수 감소를 막기 위해 대대적인 구호에 나섰다. 헬기를 이용해 매주 5백 개의 바나나를 숲에 뿌렸고 여우원숭이를 잡아먹는 원주민들의 관습을 법으로 금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소식을 들은 인도 최대의 바나나 생산업체는 여우원숭이를 살리는 일에 동참하겠다며 구호단체에 바나나 5십 톤을 보내왔다. 덕분에 여우원숭이들은 바나나를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매주 5백 개 남짓에 불과했던 바나나 공급량을 3천 개로 늘렸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과 달리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여우원숭이들은 서로 물고 뜯으며 치열하게 싸우더니, 심지어 수많은 여우원숭이가 죽기 시작했다. 겨우 한 달만에 여우원숭이는 50마리로 감소했다. 사태의 원인을 뒤늦게 발견한 연구진은 즉시 바나나 공급량을 줄였지만, 여우원숭이들은 동족상잔을 멈추지 않았다. 이를 보다 못한 구호단체 사람들은 보호복을 입고 숲으로 들어가 그들의 싸움을 말리고 일부 여우원숭이는 격리시켰다. 그러나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6개월 만에 여우원숭이는 고작 스무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결국 모든 여우원숭이는 보호시설에 격리되었고 2년 후, 그들은 지구에서 완전히 멸종됐다.
이 이야기는 과잉공급의 해를 잘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례다. 비록, 여우원숭이는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과 같은 영장류이자 사회성을 가진 포유류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바나나 공급량이 크게 늘자 여우원숭이들은 배가 불러서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바나나를 소유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나나를 하나라도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동료와 사소한 다툼을 벌였다. 사소한 다툼은 격렬한 몸싸움으로 번졌다. 약 일주일 사이에 대부분 싸움은 일단락되었지만, 비극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싸움에서 승리한 개체들은 자신들에게 덤비지도 않는 비교적 약하거나 어린 개체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단지 폭력을 생존수단으로 여기기 시작한 걸 넘어, 바나나를 더 소유하기 위해 잠재적인 위험을 제거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었다. 이것은 과잉공급의 비극이다. 통제가 어려운 사회일수록 초과 공급분은 기존의 분배 방식 전체를 뒤흔든다.
'물질적 풍요가 곧 개인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격언 속에는 황금만능주의에 대한 경각심만 들어있는 건 아니다. 어떤 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다고 해서 합리적이고 안전한 분배가 보장되는 건 아니라는 냉혹한 현실도 들어있다. 공급이 부족한 상태도 나름의 문제를 지니지만, 공급이 과도하게 많은 상태 또한 문제를 일으킨다. 생명을 유지하는 조건은 자원과 소모의 관계에 놓여 있기에 생태적 수요에 대한 안정적인 공급은 문명을 이어가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 유지조건을 훨씬 초과하는 공급, 즉, 과잉공급이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는 초과 공급분에 대한 사회 전체의 통제력 상실이 주원인이다.
자본주의는 분업화와 전문화를 가속했고 대량생산과 규모의 경제를 이룩하여 개인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었으나, 과잉공급은 수요자와 공급자 모두에게 통제력 상실을 안겨주었다. 여기에서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말은 일상적인 의미에 한정하지 않는다. 목적과 계획의 불일치는 물론, 목적을 잃어버린 경우까지 포함한다. 폭발적으로 증가한 경제재 앞에 수요자는 수요의 통제력을,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공급자는 공급의 통제력을 상실한다. 만약 통제력을 상실하는 빈도수가 통계적으로 있을법한 수준에 그친다면, 소수의 통제력 상실은 시장의 일관성과 상쇄되어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하지만, 모든 참여자가 욕망의 보상회로를 동기화한 시스템 안에서는 통제력 상실 또한 동기화할 수밖에 없다. 참여자의 통제력 상실이 문제 되는 이유는 여우원숭이의 사례처럼 지켜야 할 사회적 가치들이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하는 데 있다. 순수한 욕망과 욕망의 다양성, 천부인권, 자연환경, 사회적 본성 등은 우리를 지속 가능하게 해주는 중요한 가치들임과 동시에 자본주의 안에서 점점 빛을 잃어가는 가치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보이지도 않는 손에 내팽개처진 통제력을 회복하는 일과 같다. 자본주의가 통제력을 상실하게 된 원인은 인구증가나 각종 분쟁이 아니라 과잉공급에 있다. 바꾸어 말해, 통제력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과잉공급의 원인을 밝혀내고 적절한 공급량을 합의하는 일이다. 과잉공급이 발생하는 가장 유명한 이유는 기술혁신이다. 이전보다 생산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면 유휴설비가 생길 때까지 생산량은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그러나, 기술혁신은 매우 드물게 일어나기 때문에 생산기술의 발전만으로는 항상 시장에 존재하는 과잉공급을 설명할 수는 없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여우원숭이의 사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핵심 키워드는 '인간의 지배행위'다. 여우원숭이를 실리기 위한 인간의 지배 행위가 과잉공급을 초래했고, 그들의 분배 방식은 일순간에 무너졌으며, 통제력을 상실한 그들은 서로를 공격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시장에 존재하는 인간의 지배행위가 과잉공급의 결정적인 원인이다. 지배행위는 시장을 지배하려는 행위, 곧 공급자 간의 무한경쟁을 의미한다. 과잉공급의 일반적인 이유는 경쟁에 있다. 시장에서 경쟁하지 않는 공급자는 존재할 수 없다. 독과점 시장 역시 다르지 않다. 다른 공급자와의 경쟁이나 대체 시장과의 경쟁, 독과점을 위협하는 잠재적 위험에 대한 경쟁 등, 공급자에게 경쟁이란 소비와 만나기 위한 험난한 여정과도 같다.
특히, 시장을 목표 이상으로 지배하려면 공급자는 가격경쟁력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이것은 공급자의 기본 덕목이다. 그리고 가격경쟁력은 규모의 경제를 통해 달성할 수 있다. 규모의 경제를 이루려면 생산량을 대규모로 증가시켜야 하고, 동시에 변동비용 대부분을 고정비용으로 바꾸어야 한다. 만약 어떤 공급자가 천문학적인 비용을 감수하고 다른 경쟁자보다 먼저 규모의 경제를 성공적으로 이루어 냈다면, 그의 시장점유율은 꽤 안정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반면, 이제 막 시장에 진입했거나 가격경쟁력이 없는 다른 경쟁자는 생산비용의 증가를 경험한다. 왜냐하면 그가 시장점유율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생산 유닛당 더 많은 비용을 들여 상대보다 높은 품질을 추구하거나, 비록 조금 늦기는 했지만 선점자와 같이 규모의 경제를 이루기 위해 설비 투자에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공공연한 사실은 곧 경쟁의 전략이 된다.
수학자, 존 포보스 내시가 제시한 내시 균형을 빌려오면 위의 상황은 다음과 같이 보기 좋게 정리할 수 있다.
공급자 B
전략 규모의 경제 품질
A 규모의 경제 (50, 50) (80, 20)
품질 (20, 80) (10, 10)
실제로는 시장점유율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지만 명확한 설명을 위해 상황을 단순화했다. 이 경우 만약 공급자 A와 B가 모두 규모의 경제를 경쟁 전략으로 선택하면, 각각 시장을 50%씩 양분하여 점유할 수 있다. 반면, A가 규모의 경제를 선택하고 B가 품질을 선택한다면 A는 80%, B는 20%의 비율로 시장을 점유하게 되며, 이때 B는 A보다 시장점유율이 한참 낮음에도 불구하고 생산 유닛당 높은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둘 다 품질을 선택했을 때는 둘 모두 규모의 경제를 선택할 제3의 공급자에게 밀려 각각 10%밖에 시장을 점유하지 못한다. 즉, A와 B 둘 다 자본이 허락한다면 규모의 경제를 선택하는 게 내시 균형이다.
유한한 소비를 지배하려는 무한경쟁은 공급자에게 규모의 경제를 주문한다. 그런데 규모의 경제는 필연적으로 과잉공급을 수반한다. 규모의 경제에 맞게 이미 생산 설비와 비용의 성격이 고정되어 있으므로, 목표 생산량에 못 미치거나 초과하는 생산량은 비규모의 경제로 이어진다. 따라서, 공급자는 탄력적으로 생산량을 조절할 수 없게 되고, 부족한 유효수요만큼 빈번하게 초과공급이 발생한다. 시장을 지배하려는 의도가 결국 과잉공급을 낳은 것이다. 18세기 경제학자, 장 바티스트 세는 공급은 수요에 시간적으로 후행하므로 수요의 부족에 따른 과잉공급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일시적으로는 초과공급이나 초과수요가 발생할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시장은 언제나 균형 상태를 유지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그의 또 다른 견해를 확장해보면, 공급자에게는 유효한 수요를 계산하는 것보다 시장을 먼저 지배해서 경쟁에서 승리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게다가 실제로 수요와 공급은 시간적 선후관계를 따르지 않으며, 수요를 창출하는 생산 과정과는 상관없이 독창적인 아이디어나 신기술이 잠재 수요를 유효 수요로 견인하기도 한다. 따라서,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과잉공급은 항상 존재한다.
그럼 이쯤에서 규모의 경제를 유지하는 공급자의 입장을 떠올려보자. 그에게 매분기 최대 이슈는 '초과공급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이다. 창고에 쌓여가는 재고를 바라보며 머리를 쥐어뜯는다고 그의 걱정은 해결되지 않는다. 비단, 제조업 분야에만 한정되는 문제는 아니다. 서비스업 역시 유휴인력과 서비스 제공에 필요한 자산의 감가상각이 문제 된다. 경기가 아주 좋거나 소비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서 초과 공급분이 모두 해소된다면 다행이겠지만, 날개가 달린 행운의 여신이 매번 그를 위해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상식적인 공급자라면 매번 초과 공급분이 쌓일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다양한 전략을 구사한다. 공급자가 초과공급을 해소하는 일반적인 전략은 다음과 같다. 일부는 초과공급으로 인한 손해를 소비자에게 전가시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ㆍ한시적 가격 인하 또는 덤핑
ㆍ공격적인 마케팅
ㆍ'채찍효과'를 방지하는 통합 공급망 구축
ㆍ자체적인 수요예측 시스템 개발
ㆍ생산성 증가와 원가 절감
ㆍ경쟁사간 전략적 제휴
ㆍ설비확장 억제와 구조조정
ㆍ구조개편 : 기술과 지식의 집약, 고부가가치화
그런데 얼핏 보면 유연하고 스마트해 보이는 이 방법들은 하나같이 과잉공급을 근본적인 문제로 지적하지 않는다. 과잉공급은 이미 기본 중의 기본이다. 사실 초과공급을 해소하는 방법은 너무나 쉽고 단순하다. 과잉생산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나서서 섣불리 규모의 경제를 철폐하지도, 선주문-후제작 방식을 따르지도 않는 이유는 어느 공급자조차 적정이윤을 결코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잉생산의 기회비용이 과잉생산으로 얻을 이익보다 크지 않은 이상, 규모의 경제를 포기할 경제적 이유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공급의 어떤 노드(node)에서 규모의 경제가 단 한 번이라도 성공했다면, 사회의 모든 공급망은 과잉생산을 위해 공급하게 되는, 자본주의의 순환논리에 빠지게 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ㅡ> 시장지배 추구 ㅡ> 공급자 간 무한경쟁 ㅡ> 규모의 경제 일반화 ㅡ> 과잉공급 ㅡ> 초과공급을 해소하며 적정이윤 추구 ㅡ> 과잉공급 유지
과잉공급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초과공급의 정체와 해소는 경기를 인위적으로 변동시킨다. 시장이 초과공급을 소화하지 못할 때는 불경기, 그 반대의 경우에는 호경기로 돌아선다. 수요 측면에서 보았을 때, 불경기의 원인을 총수요가 감소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애당초 총수요가 감당하지 못할 재화를 제공한 건 과잉공급이다.
경기의 하강국면에 등장하는 총공급의 감소 또한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총공급의 감소가 경기 침체를 부르는 이유는 과잉공급에 길들여진 시장의 분배 방식이 총공급의 감소에 대응하여 즉각적으로 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과 공급분은 사회의 분배 방식을 새롭게 규정하고 새롭게 규정된 분배 방식은 공급이 부족할 때도 여전히 적용된다. 가령, 매일 100명에게 100개의 귤을 주다가 101개의 귤을 준다고 가정해보자. 남은 1개의 귤을 과연 누구에게 주어야 할까? 가장 어린 사람 또는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 아니면 가장 힘센 사람에게 주어야 할까?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남은 1개의 귤은 썩기 전에 누군가에게 분배될 것이다. 그 방법이 합리적이든 윤리적이든, 또는 야만적이든 100명으로 구성된 작은 사회는 새로운 분배 방식에 적응한다. 일주일 후, 이번에는 101개 의 귤이 아니라 80개의 귤이 공급되면 어떨까. 사람 수에 비해 귤은 20개나 부족하다. 과연 이 상황에 즉각적으로 대응 가능한 새로운 분배 방식이 등장하게 될까? 정녕 그렇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분배 방식이 다시 일반적인 방법으로 자리 잡는 데는 꽤 많은 시간과 갈등이 필요할 것이다. 하물며 100명이 아니라 10,000명의 사회라면? 백만 명이 살고 있는 사회라면? 더 거대하고 더 다양한 이해관계 집단이 존재하는 사회일수록, 새로운 공급량에 적응하기 위한 마찰과 에너지는 당연히 클 수밖에 없고, 새로운 분배 방식에 적응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경기는 더 오래 침체될 것이다.
거시경제학파가 제시하는 실물적 경기변동 이론에 비추어 보면, 과잉공급의 가부에 따라 변동하는 분배 방식은 경제학자, 에드워드 프레스콧이 그의 논문에서 언급한 '기술적 충격'에 대응한다. 그는 생산성의 무작위적인 변동이 경기 추세에 충격을 준다고 표현했는데, 결국 생산성을 불규칙하게 만드는 것은 자본과 노동의 효율성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 즉, 시스템의 분배 방식에 대한 사회의 '합리적 기대'인 것이다. '합리적 기대가설'을 제창한 경제학자, 로버트 루카스가 경제 정책의 무력성에 주목한 것은 분배 방식의 인위적인 조절이 참여자의 시장적응력을 압도할 수 없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현대 경제학은 경기침체를 유발할 수밖에 없는 과잉공급의 본원적 속성을 인정하고, 경기변동에 대한 관점을 성장 중심의 체계적 오차에서 분배 중심의 근본적 오류로 옮겨야 한다.
이번에는 부족한 공급량에 허덕이는 원시 경제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과잉공급이 일시적으로 무너졌을 때와는 달리, 이 사회의 분배 방식은 꽤 오랫동안 일정할 것이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부족한 상태가 한결같이 지속되는 한 분배 방식에 대한 사회의 기대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초과공급이 발생하지 않는 지점까지 생산량이 어느 정도 증가하더라도 사회는 평화로울 것이다. 만약 총공급이 총수요보다 아주 조금 모자란 상태가 지속되었고, 단 한 번도 잉여생산물이 발생한 적이 없다면, 생산물을 바닥에 내려놓고 서로 다툴 여유 또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인간의 생산력은 문자 그대로 상상을 초월했다. 과잉공급이 출현한 이래, 분배를 받지 못한 사람, 분배받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 투쟁하다가 죽은 사람,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한데 뒤섞여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마치 여우원숭이처럼 말이다. 인간의 감정을 배제하고 오직 자원 개발과 경제적 효율성만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매주 하늘에서 무수히 많은 바나나가 지상으로 떨어지는데, 우리는 왜 통제력을 잃고 서로를 죽이고 있는가? 과잉공급을 초래한 인간의 지배 심리가 맨 처음의 원인이지만, 나는 이 이상한 일의 다음 원인은 왜곡된 수요에 있다고 생각한다. 욕망 바이러스에 잠식되어 수요의 본질을 잃어버린 사회, 소비에 상징을 부여하고 소유의 환상에 빠져버린 상상의 시대가 우리 모두를 이상하게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