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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재 Dec 03. 2022

거리에서 쓴 자본주의 비판  - 6

왜곡된 수요


5장. 왜곡된 수요


 편의점에 가면 가끔 선택 장애에 걸릴 때가 있다. 제품이 진열된 매대를 배회하며 선택 장애에 걸리는 것은 어쩌면 내 안에 내재된 능동성이 초과공급을 마주하며 치열하게 저항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현명한 소비자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경제상황과 목적에 맞게 효율적으로 수요를 조절하는 것이 최선이다. 사실 우리에게 초코우유나 담배는 생필품이 아니며, 장롱에 쌓여있는 케케묵은 옷들을 모른 채하며 유행을 탈 필요도 없다. 투자 중인 기업의 재고자산을 줄여 재무건전성을 높이고 주식의 목표가를 높이려는 심오한 의도가 아니라면, 선택의 문제라고 여겨왔던 소비행위 대부분은 초과공급을 해소하고자 공급자가 내건 다양한 전략이 어느 지점에서 수요와 만난 것에 불과하다.

어떤 소비는 소비자의 욕망을 충족하는 수요일 테지만 맞춤 공급이 아니고서야 맞춤 수요는 아니다. 일부 부유층이 누리는 맞춤 수요는 여전히 대중적이지 않으며 현대 자본주의는 공급에 맞춤되어 있다. 계획경제든 시장경제든 간에 양자의 구별은 오직 공급 측면에서 다루어진다. 수요는 늘 따라와야 했다. 따라오지 않으면 분배 없는 성장이든, 전쟁이든 어떤 부작용을 감수하고서라도 따라오게 만들었다. 생산수단을 가진 자는 생산수단이 없는 자로부터 권력을 부여받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욕망의 파이를 누군가가 점유하도록 내버려 두면 경제는 오직 공급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개인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의존하며 길들여지기를 자처한다. 혹자는 이러한 공급자의 권력을 고객충성도나 시장 지배력과 같은 다소 부드러운 단어로 설명하지만 의미는 같다. 수요의 본질을 잊게 만드는 경제 시스템은 결국 더 많은 공급을 놓고 벌이는 권력의 각축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공급자의 규모나 능력을 불문하고 공평하게 적용된다. 아주 영세한 공급자도 마찬가지다. 다만, 영세할수록 수요자에 대한 지배력이 약하기에 더 강한 공급자에게 흡수당하거나 기생할 뿐이다.

공급을 중심으로 설계된 경제 시스템은 수요자에게 규모의 경제와 편리성을 제공하지만 근본적이고 어두운 문제를 남긴다. 생산 권력의 저 편에 서면 저 멀리 노예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왜곡된 수요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각자가 자신의 생산에 몰두하는 것은 생산물의 교환을 통해 각자의 소비를 추구하는 것이므로 경제적 의존성은 경제적 효율성을 담보한다. 하지만, 공급의 힘이 어느 한 점으로 쏠리고 공급 권력의 밀도가 너무 높아지면, 그 근처를 지나던 개인의 순수한 수요는 블랙홀을 향해 휘어버린 한 줄기 빛처럼 왜곡되기 십상이다. 왜곡된 수요가 소비중독이나 소비의 비합리성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수요의 전부 또는 일부가 노예처럼 변하는 것을 말한다. 노예는 자신이 받아야 할 합당한 대가를 주인에게 준다. 왜곡된 수요 역시 마찬가지다. 수요가 왜곡되기 시작하면 수요의 합당한 보상은 수요자의 안위가 아니라 공급자의 이윤으로 돌아간다. 그 간극이 클수록 공급자의 이윤은 증가한다. 설령 어떤 제품과 서비스가 아주 혁신적일지라도, 수요자의 영속성과 일치하는 진실한 보상을 얻지 못하는 수요라면 왜곡된 수요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매일 4,500원짜리 담배 한 갑을 피는 남성이 있다. 남성의 기대여명을 30년으로 가정했을 때, 그는 남은 30년의 소득 중 49,275,000원을 담배를 구입하는데 써야 한다. 할인율은 무시하고 또 담배 가격이 그대로일 경우에 말이다. 그의 소득 수준이 비교적 높으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고 사회의 중위 정도에 계속 머물러 있다면 그는 결국 기대여명 중 약 172일을 담배를 구입하기 위해 일하는 셈이다.

ㆍ담배를 위해 남성이 희생하는 시간
남성은 하루에 8시간, 주 5일제 근무를 하며 연봉은 3,000만 원이다. 연봉 상승률은 고려하지 않는다.
49,275,000 ÷ (30,000,000 ÷ (209×12)) ÷ 24
= 약 172일

그가 담배를 계속 구입하려면 적어도 그 비용을 마련해야 하는 기간 동안은 자유롭지 않다. 또한, 담배가 가져올 질병과 그로 인해 발생할 의료비까지 감안하면, 그는 더 심각한 문제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담배와 같은 단순한 기호품에 그치지 않고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으며 크게 유익하지도 않은, 그러나 수요자의 욕망을 자극하는 모든 경제재로 시야를 넓히면 공급 권력에 예속된 왜곡된 수요가 얼마나 인생을 낭비하게 만드는지 알 수 있다. 각종 사치품, 자동차와 고급주택, 값비싼 소모품 등과 그것들을 구입하기 위한 제한된 삶의 양식, 또 그런 삶을 살기 위해 소모하는 시간과 에너지,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많은 고통과 갈등, 그리고 부작용, 과연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내제적 가치를 강화하고 죽음을 잊게 해 줄까.

소비는 공급자에게 미덕일 뿐 수요자에게 미덕은 아니다. 개인의 입장에서 소비가 미덕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경제분석을 위해 소비에 대해 논의할 때, 소비의 강도와 공급과의 안정적인 균형이 중요할 뿐, 수요자의 구체적인 안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정작 수요자에게 가치 있는 소비란 수요자가 쫓는 목적을 완성하게 해 줄 자연스러운 수단에 한한다. 이는 수요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수요의 과정은 총 4단계로 이루어진다.
ㆍ욕망ㅡ계획ㅡ행동ㅡ경험

수요는 욕망의 실현에 필요한 경험을 목적으로 삼는다. 수요는 어떤 물건이나 서비스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수단을 통해 욕망을 실현하겠다는 의지의 다른 말이다. 수요자는 욕망하는 존재다. 욕망의 대상은 항상 경험이다. 의식주뿐만 아니라 각종 교육과 여가 등도 모두 경험이다. 먹는 것과 입는 것은 경험의 종류가 다르지만 하고 싶은 무엇에 해당하므로 결은 같다. 이런 점에서 수요 활동은 경제 분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연속적인 인생의 모든 점은 수요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공급 위주의 수요는 빈번히 왜곡된다. 욕망과 계획 단계에서 공급의 지배행위가 수요자의 주체성을 흐리게 한다. 지금의 경제재 대부분은 수요자가 원하는 경험의 수단이 아니라 공급자가 의도한 경험의 수단이다. 명품 브랜드에 대한 전시효과와 우월감, 유행에 민감한 각종 기성품, 심지어 생애주기별 맞춤형 투자 상품까지, 문화와 관습에 실려 공급의 틀에 억지로 끼워지는 수요에는 영혼이 없다. 이것은 온기를 잃어버린 차가운 수요다.

자본주의의 파생원리에 굴복하여 이미지와 상징성을 욕망의 기준으로 삼는 순간, 수요는 현실 감각을 잃어버리고 껍데기만 남는다. 쾌락의 한계효용은 자신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것을 소비할 때 도달할 수 있다. 단지, 아무 생각 없이 쏠림에 몸을 맡기고 허상을 쫓는 일은 자신의 생명에너지를 그저 암흑 속에 흩뿌리는 행위와 같다. 수요가 계속 왜곡된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순수한 욕망은 자취를 감출 것이고, 급기야 개인의 자아는 시스템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렇게 최후에 남는 건 구조뿐이다. 불순한 욕망들 사이로 인간의 존엄성이나 환경의 중요성이 끼어들 틈이 있을 리 없고, 체계의 본분을 위협하는 모든 생각과 존재는 악덕으로 치부되어 배제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욕구를 과잉공급으로 이끌었고, 과잉공급은 분배의 불안정성과 경기침체를 초래한다. 그리고 경제의 이런 속성은 공급의 지배행위를 더욱 정당화한다. 자본주의에 혼을 불어넣는 건 영혼 없는 수요고, 수요에 영혼을 제거하고 거품을 일으킬 수 있는 건 공급 권력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수요 계획은 공급 권력을 증가시킬 수 있는 계획이어야 한다. 욕망의 보상회로는 수요자의 자급자족만으로는 유지할 수 없고, 공급자는 그것을 지켜주는 대가로 자본의 영속성을 보장받는다. 이것은 또 하나의 순환논리다. 자본의 증가를 위해 수요의 본질을 포기해야 하는 구조는 자본의 증가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습관적인 소비행위는 공급 권력이 미리 설정해 놓은 삶의 양식을 현실에 반복해서 재현하는 일종의 모사일지도 모른다. 필요해서 구매하는 것과 필요해져서, 또는 필요할 것 같아서 구매하는 것은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 많은 경우에 소비 대부분은 전자에서 출발하지만, 오소비와 과소비를 걷어내면 거의 몸밖에 남지 않는 현실을 되돌아봐야 한다. 그래서 과학기술의 발전이 자본주의의 먹거리가 되는 현실은 그다지 반갑지 않다. 인간의 호기심과 상상력은 분명히 귀중한 유산이지만, 필요하지 않았던 것을 필요하게 만드는 끊임없는 무한궤도는 문명의 지속이 아닌 자본의 영속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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