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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재 Dec 03. 2022

거리에서 쓴 자본주의 비판- 7

불평등은 필요악일까


6장. 불평등은 필요악일까


 지난 30년간 국가 간 불평등 격차는 다소 줄어들었지만, 한국을 포함한 선진국 내부의 불평등은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하다. 신자유주의는 분배 없는 성장의 어머니가 되었고, 북유럽식 성장모델을 제시한 조셉 스티글리츠조차 불평등의 완벽한 해소에는 회의적이다. 온 국민이 한 자리에 모여 시스템의 공리를 변경하고 새로운 분배 방식을 동기화하지 않고서야 자산의 불평등은 피할 수 없다. 그 누구도 소유권을 천부인권으로 여기지 않고 자원의 수집, 이용, 수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오직 순수한 욕망에만 충실한 수요 중심의 경제를 일상으로 받아들인다면, 자산이라는 상상의 합의체가 아예 사라지므로 자산의 불평등은 성립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물론, 이건 현실성이 없다. 경제는 마음의 거울이다. 인간의 마음은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물질적 평등에는 항상 관습적인 오차가 따를 수밖에 없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다. 관념론과 유물론만으로는 체계에 선행하는 자연의 원리를 앞지르지 못한다. 물질적 평등을 완벽하게 정복하려면, 인간뿐 아니라 지구의 모든 생명체로 논의를 넓혀 완벽한 리바이어던이 등장해야 한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자산의 불평등을 부정하는 건 크게 얻을 게 없다. 완벽하게 물질적 평등을 보장할 새로운 상상에 힘을 보태자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우리가 정녕 주목해야 할 근본적인 불평등은 자산이나 물질의 불평등이 아니라 상징을 앞세우는 관념의 불평등이다. 자본주의는 부와 연결된 모든 관념에 계층을 부여하고 불평등을 생산한다. 부자라서, 능력이 좋아서, 가난해서, 학벌이 좋지 않아서와 같은 상징이 끊임없이 생산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가 실질적 불평등의 핵심이다. 자산의 불평등은 제도적으로 완화할 수 있지만, 욕망의 우열에 기대어 계속 상징을 쌓아 올리는 자본 중심의 관념은 제도만으로는 해소되기 어렵다.

자본주의가 진정한 평등을 훼손하는 방법은 확대와 편향이다. 자본주의는 자본의 범위를 확대하기 위해 자본과 연결된 현상에 상징을 부여하고, 상징은 가치의 기준이 된다. 또한, 가치의 높고 낮음은 유무형의 계층을 만들고 모든 계층은 낮은 가치를 회피하려는 속성을 가진다. 이 속성이 바로 불평등을 만든다. 이 때문에 가치의 상대성이 인정되지 않는 사회일수록 불평등은 클 수밖에 없다. 평등과 불평등을 인식하려면 기본적으로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만약 어떤 기준도 제시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평등 여부도 판단할 수 없다. 아예 평등의 개념조차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별다른 가치 기준이 성립되어 있지 않은 사회라면 불평등조차 인식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모순적이게도 이론적으로 가장 평등한 상태는 가장 무가치한 상태가 된다. 자산이나 권력, 명예 등 그 어떤 가치에도 절대성이 부여되어 있지 않다면, 적어도 실질적 불평등을 토론할 일은 없을 것이다.

가치의 상대성을 실질적 평등의 기본 배경으로 보아야 불평등에 대한 뚜렷한 관찰이 가능하다. 어떤 기준에 따라 형식적 평등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그것이 실질적 평등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이미 그 기준 자체가 가치의 서열로부터 파생된 불평등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천만 명의 시민이 모두 똑같이 천만 원을 가지고 있는 사회가 평등한 사회일 수는 없다. 물론, 자산의 양극화는 그것대로 사회 정의를 위협할 테지만, 그 경우에도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자산의 불평등이 아니라 자산의 불평등을 초래한 확대와 편향이다. 이상적으로 평등한 사회에서는 돈이 많은 사람, 키가 작은 사람,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 영어를 잘하는 사람, 잘 먹는 사람이 모두 동등하다. 자산의 불평등에 뒤이어 분배, 기회, 교육, 직업, 정치 등 사회의 거의 모든 요소로 불평등을 확대하고 자본을 기준으로 그 가치들을 편향하려는 시스템은 불평등한 시스템이다. 확고한 기준을 제시하는 낡은 고집에 속아 불평등의 주역을 자처하는 수많은 욕망들, 그 속에는 상상만 가득하다.

불평등 문제를 고찰할 때, 자본의 개념은 부를 더 축적하기 위한 부에만 한정하지 않는다. 부잣집 자녀가 좋은 학벌을 얻었을 때는 후광효과가, 명품 브랜드를 걸쳤을 때는 전시효과가 생기듯이 화폐로 측정하기는 어렵지만, 욕망의 계단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어떤 상징은 나름의 주관적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모두 자본이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이 문제다. 성장과 발전을 기준으로 뭐든지 상징을 부여하려는 관습 체계가 문제다. 산에서 열심히 도토리를 줍고 있는 다람쥐에게 다가가 왜 어제보다 볼품없는 도토리를 다섯 개나 주웠냐고 화를 낼 것인가? 느티나무에게 다가가 작년보다 가짓수가 줄어든다면 베어버리겠다고 협박할 텐가? 인간은 다람쥐나 느티나무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오만이 비생산적인 것들에 대한 거부반응을 일으켰고, 실존에 대한 거부는 현실에 거대한 공백을 남겼다. 자본주의는 그 공백을 허상으로 채우고 있는 것이다.

자본의 영속성을 기약하는 많은 상징 가운데 능력주의 역시 대표적인 허상이다. 철학계의 록스타, 마이클 센델 교수는 불평등을 강화하는 능력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능력주의가 성공의 오만과 실패의 좌절을 정당화함으로써 공동체를 황폐하게 만든다고 역설한다. 인재를 선별하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인 줄 알았던 능력주의가 실상은 서로 다른 출발선을 감추고 불평등을 강화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허탈하기 그지없다. 능력을 개인 고유의 특성으로 오해하는 이상, 욕망의 계단은 더욱 높아지고 상징의 격차는 벌어질 뿐이다. 한편으로는, 능력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이 불평등에 대한 시대적인 통찰에만 머무른 것은 조금 아쉽다. 불평등은 능력주의가 시대정신이 되기 이전부터 있었다. 연공서열, 학벌과 학연, 출신과 지역, 인종, 국가, 성별 아주 과거에는 종교와 부족이 불평등을 자극했다. 이것들은 시대별로 존재했던 욕망의 계단에서 우위를 가르던 상징들이다. 능력주의 역시 다르지 않다. 단지, 자본주의 성장을 가로막는 비합리적인 상징을 제거하고 더 합리적으로 보이는 또 다른 상징을 추가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수명보다 한 없이 긴 역사의 축 위에서 그 모든 상징들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일은 일시적이고, 어쩌면 무용하기까지 하다. 우리가 들여다보야할 것은 톱니바퀴가 아니라 시스템이다.

*자본주의가 불평등을 일으키는 과정
성장 지상주의 ㅡ> 현실 공백
ㅡ> 상징과 허상
 ㅡ> 가치의 절대성 추구(가치의 상대성 무시)
ㅡ> 편향된 가치 판단
ㅡ> 실질적 불평등(분배, 기회, 교육, 정치 등)

상징이 현실이라고 믿는 관습은 가치의 절대성을 추구하게 만들었고, 결국 실질적 불평등을 일으킨다. 특별한 상징체계가 존재하지 않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에 절대적인 가치는 없다. 가치 판단의 근거는 대부분 학습된 것이다. 가령, 소유라는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자.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은 내 소유이므로 타인이 소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지를 둘 수 없다. 법적으로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집을 포함한 모든 물건은 시간이 지나면 썩어서 없어진다. 물건은 영원하지 않다. 그러면 소유라는 건 언젠가 없어질 물건을 법적으로 갖고 있는 상태로 볼 수 있다. 게다가 모든 물건은 자연에서 왔다. 인간이 창조한 것은 물건을 만드는 방법이지, 물질 그 자체가 아니다.

1)먼지 한 톨도 창조할 수 없는 인간이, 2)자연으로부터 조합한 물건을, 3)타인들의 동의하에, 4)유효기간 동안, 5)혼자서 독차지하는 상태가 소유의 본질이다. 소유는 절대적이거나 항구적인 가치가 아니라 다분히 많은 조건이 필요한 인위적인 가치다. 하지만, 소유를 인위적인 가치로 바라보는 어른은 거의 없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도 없거니와 소유의 절대성을 추구해야 부의 축적이 타당해진다.

노동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 역시 가치의 절대성을 추구하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사례다. 더 많은 부를 축적해야 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절대적인 가치다. 노동은 부의 축적에 대해 상대적인 가치, 즉, 그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고,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은 분배를 받기 위한 개인의 자구책일 뿐 문명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협동이 아닌 것이다. 사실 환경미화원은 의사보다 우리를 더 건강하게 만들어주지만, 그의 소득이 의사보다 훨씬 적은 이유는 청소 노동의 사회적 가치가 전혀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직업 간에 절대적인 소득 격차가 존재하는 까닭은 투입과 결과라는 생산의 논리가 직업에도 적용된 결과다. 청소 노동은 누구나 할 수 있기에 적은 투입이, 의료 행위는 누구나 할 수 없기에 많은 투입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 격차가 소득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회적 가치보다 자본의 원리가 더 중요한 사회에서는 노동은 자본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상징이 만연할 수밖에 없다.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가치의 절대성을 추구한다고 해서, 또는 가치의 상대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공동체의 통합 여부가 결정되는 건 아니다. 다수의 뇌리에 같은 주제에 대해 같은 가치가 박혀있다고 하더라도 가치의 속성에 따라 사회는 얼마든지 분열될 수도, 통합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다수의 가치판단이 얼마나 공동의 선을 잘 반영하는지, 편향된 가치판단이 그것을 왜곡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고민해 보는 것이다. 공동의 선은 다양한 맥락 속에서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내가 말하고 싶은 공동의 선은 '공동체가 마땅히 따라야 할 지극히 자연스럽고 평범한 인간성'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공동의 선을 망각하게 하는 비인간적인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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