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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재 Dec 03. 2022

거리에서 쓴 자본주의 비판 - 8

약탈적 금융


7장. 약탈적 금융


 머니 게임은 금융 시스템의 귀중한 먹거리 산업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문을 통과하기 위해 대중은 금융에서 지렛대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러나 그곳에 천국의 계단은 없다. 금융은 명목에 불과했다. 마치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구르는 얼음 덩어리처럼, 공급자의 자본소득을 제외한 산출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작아졌으며, 자금유통에 대한 모든 위험은 수요자에게, 자금유통을 위한 모든 재원은 공급자에게 돌아갔다. 책임 없는 채권과 책임만 있는 채무, 불완전판매와 부실감독은 금융의 도덕적 헤이를 부추기고 있다. 이것은 어느 분야에나 흔하게 흩어져 있는 조각난 윤리 문제가 아니다. 자본의 유혹으로 힘없는 자원을 긁어모으는 약탈적 경제다. 지금의 금융 시스템은 가치의 유통이 아니라 실물 경제를 흐릿하게 만드는 탐욕을 유통하고 있다. 금융은 화폐경제에 유동성을 부여하는 자본가의 또 다른 생산수단일 뿐, 서민들의 지렛대가 아니다. 막대한 초과수익을 얻길 바라는 자본가는 교묘한 상술로 버블을 일으키고, 승자가 되기 위한 진영 간 끊임없는 헤게모니 전쟁은 외환시장의 불안과 지정학적 긴장감만 키우고 있다. 서민금융은 복지의 대체제가 아닌 유동성 잔치의 부유물이며, 금융의 세계화는 위기의 세계화와 다르지 않다.

이렇게 안팎으로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금융은 정말 우리가 더 잘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시스템일까? 자본주의에서 금융의 이로운 점은 무엇인가? 경제 원리와 통화 제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면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금융의 해에 대해서 만큼은 경제학을 몰라도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을 만큼 그 폐단이 작지 않다. 금융은 기본적으로 저장된 가치를 유통하여 자본의 수요와 공급을 원활하게 하는 시스템이지만, 불로소득과 과도한 이윤을 추구하는 공급자의 지배행위로 인해 머니 게임의 무대로 전락했다. 성장과 경쟁, 그리고 승자독식이 현실이라고 믿는 자본가들의 횡포가 금융을 잠식하고 있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그의 저서,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금융 파국을 방지하기 위해 연방준비은행이 7000억 달러나 되는 구제금융을 민간 금융사에 지원한 것을 두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그런 조치는 빈자가 아닌 부자를, 돈을 빌리는 자들이 아니라 빌려주는 자들을 돕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자본가들이 그토록 질색하는 사회주의가 어떻게 그들을 구원하는 일에는 아무 거리낌 없이 용인될 수 있는지, 혀를 내둘렀다.

금융의 본질적인 문제는 역시나 자본주의에 있다. 금융은 자본주의가 낳은 하나의 권력 양식(mode of power)이기 때문이다. 지난 백 년간의 굵직굵직한 전 세계의 금융위기들을 살펴보면, 위기를 일으킨 장본인은 열심히 일하지 않는 서민들이나 애국심을 내팽개친 공무원들이 아니라, 오직 성장과 팽창만을 목적으로 삼는 '선택적-전략 자본'이었다. 따라서 시간과 지역을 단위로 하는 위기 대부분은 끝난 것처럼 보여도, 금융을 권력 팽창의 양식으로 인식하는 자본이 존재하는 한, 금융위기는 현재 진행 중이다.

<세계의 주요 금융위기 개요>
ㆍ1929년~1933년 미국 대공황
: 해외자본의 급격한 유입으로 인한 주가 및 부동산 가격에 과도한 버블이 발생 ㅡ> 연방준비위원회의 긴축 통화정책 ㅡ> 주가 폭락, 부동산 대출 부실화 등 버블 붕괴 ㅡ> 은행들의 연쇄적 파산


ㆍ1980년대 중남미 외채위기
해외자본 유치를 통한 급속한 경제성장 ㅡ> 대외채무의 급격한 증가 ㅡ> 경기침체 ㅡ> 석유파동, 국제금리 상승, 아시아 시장의 부상 등 외부 악재 발생 ㅡ> 해외자본의 급격한 유출과 통화가치 하락 ㅡ> 멕시코, 브라질 등이 대외채무상환불능 선포


ㆍ1982년~1989년 미국 저축대부조합(S&L : Savings and Loan Assoiciation) 위기
연방준비위원회의 단기금리 인상 ㅡ> 저금리로 단기자금을 조달하여 장기 주택담보대출에 자금을 운용하던 S&L의 수익성이 크게 악화 ㅡ> S&L은 경영악화를 극복하기 위해 위험 자산으로 투자 확대 ㅡ> 주가와 부동산 가격의 하락으로 인한 경영부실 심화 ㅡ> 1천 개 이상의 저축대부조합이 파산 ㅡ> S&L의 예금보험 기구인 연방 저축대부 보험공사가 파산


ㆍ1989년~1993년 북유럽 3국의 금융위기(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금융규제 완화, 대외개방 확대 ㅡ> 국내 대출과 해외 차입의 급격한 증가 ㅡ> 자산시장 버블 형성 ㅡ> 정책 당국의 강력한 긴축 통화정책 ㅡ> 버블 붕괴 ㅡ> 은행의 대규모 부실채권 양산 ㅡ> 외환위기 발생(스웨덴 및 핀란드)


ㆍ1992년~2000년 일본의 장기불황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엔화 강세에 따른 경기침체가 예상되자 정책 당국은 확장적 통화정책을 시행 ㅡ> 자산 가격의 급격한 상승과 신용 팽창으로 인한 버블 발생 ㅡ> 당국은 1980년대 후반부터 금리를 인상하기 시작 ㅡ> 주식과 부동산 등의 버블이 붕괴, 은행들의 부실채권 증가, 신용경색 발생 ㅡ> 수많은 기업이 도산


ㆍ1997년~1999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자본자유화 이후 투기적 성격의 거대 외국 자본이 아시아로 급속히 유입 ㅡ> 동아시아 각국의 단기외채 규모가 급격히 증가 ㅡ> 투기자본의 유출로 인한 각국의 통화가치 급락('97 태국 바트화의 폭락이 신호탄) ㅡ> 외채불상환 사태 발생


ㆍ1995년~2000년 닷컴 버블
인터넷과 통신 관련 첨단주의 부상과 투기열풍 ㅡ> 같은 기간 나스닥은 400% 이상 상승 ㅡ> 초기 기술의 한계와 낮은 품질로 시장에 불신 확산 ㅡ> 2001년, 버블 붕괴 ㅡ> 인터넷, 통신 관련 기업들의 줄도산


ㆍ2008년 세계 금융위기
2000년대 초반, IT 버블 붕괴로 인한 경제적 충격을 흡수하고자 연준은 저금리 정책을 유지했고 정부 당국은 주택금융자금 지원사업을 대대적으로 실시 ㅡ> 정책 기조에 더해 주택담보대출채권을 증권 상품화하여 유동성까지 확보되자 금융사는 주택담보대출 남발 ㅡ> 부동산 가격에 버블 형성 ㅡ> 2006년, 최고점을 찍은 미국 부동산 가격이 하락 사이클에 진입 ㅡ> 저신용자들의 주택담보대출 상환불능 사태 발생(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ㅡ> 주택담보대출 채권의 부실화 ㅡ> 주택담보대출 채권으로 만든 증권화 상품의 부실화 ㅡ> 베어스턴스, 리먼브라더스, AIG 등이 파산 ㅡ> 글로벌 증시 급락, 연결 자본에 의지하던 기업과 기관들의 도산, 국가부도, 모라토리엄 등이 발생하고 세계적인 경제위기로 확산

이 위기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점은 버블이다. 실물 경제의 성장 없는 형식적 성장이 버블을 만든다. 형식적 성장이란, 현실의 경제적 효용과는 무관한 기대 가치만의 상승을 의미한다. 가격은 가치를 화폐로 표시한 것인데, 가치가 과대평가될수록 가격은 상승하기 마련이다. 즉, 버블은 현실 가치와 시장 가치의 오차이며, 더 남은 기대나 새로운 신념이 없을 때 버블은 붕괴된다. 문제는 현재의 금융 시스템 안에서는 버블조차 자본의 성장에 기여하는 경제적 요소로 인식되는 점이다. 심지어 거의 모든 전략 자본은 실물 경제에 미칠 부정적인 파급효과를 알고 있으면서도 버블을 기회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자본가의 입장에서 자본시장은 곧 실물시장이고, 자본은 엄연히 생산요소이므로 버블을 버블로 인식할 필요가 없다. 대중을 속여서라도 형식적 성장을 추구할 명분은 충분하다. 자본가에게 금융은 유동성을 이용해 버블을 일으킬 유용한 수단인 셈이다. 참여자들의 기대 가치를 자극해 형식적 성장과 버블을 이끌고 자본을 늘리는, 그러나 파국의 말로에 절벽 아래로 한없이 추락하는 대중들의 절규가 금융의 역사다.

그런데 이러한 근본적인 폐단에도 불구하고 금융 제도는 여전히 자본가들에게 유리한 구조로 남아 있다. 유동성 유인의 역할을 하는 '자본소득'이 그 자체로 자본가들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금융 거래로 얻을 수 있는 자본소득은 부의 축적에 관한 한 전통적인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 자본소득의 수원은 직접적인 경제활동으로 얻는 자원이나 부가가치에 있지 않고 타인의 자산에 있다. 즉, 자본을 공급하는 자의 이익은 수요자가 실물 경제에서 창출하는 부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적정이윤이 예상되지 않으면 제대로 돌아갈 수 없는 실물 경제에서 자본 공급자의 이윤율이 높으면 높을수록 생산성을 비롯한 경제의 효율성은 떨어지고, 자본의 선순환은 끊어지며, 경제활동의 중요성은 실물시장에서 자본시장으로 옮겨 갈 수밖에 없다. 결국, 자본소득의 파이가 커질수록 실물시장에 대한 자본시장의 지배력은 커진다. 포스트 케인스주의는 이를 ‘금융주도 자본주의’로 규정한다.

자본시장이 실물시장을 지배한다는 말은 시중의 자금이 실물자산을 창조하거나 소비에 더 쓰이지 않고 자본시장으로 모여든다는 뜻이다. 주식 시장은 호황인데 실물 경기는 불황인 경우, 통화 당국에서 경기부양을 위해 시중에 많은 자금을 풀었으나 정작 대기업과 인기 부문 위주로 그 유동성이 갇히는 경우, 경기는 하강국면을 그리는데 자산 상위 1%의 금융 자산은 오히려 증가하는 경우 등이 이를 증명한다. 확장적 통화 정책이 항상 부작용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 역시 이러한 금융의 구조적 한계에서 찾아야 한다. 단기적이고 제한적인 유동성 공급이 실물 경제에 일시적으로 활력을 불어넣을 수는 있겠지만, 유동성의 파급경로가 오직 자본소득을 부양하는 길목 위에만 놓여 있다면 장기적으로는 초기 유동성이 실물 경제를 옥죄게 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자본시장은 실물시장에 기름칠을 하지 않고, 때로는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태워 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지배 뒤에는 항상 약탈이 따라온다. 자본시장과 실물시장을 연결하는 지금의 금융은 가히 약탈의 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약탈이란 남의 것을 억지로 빼앗는 행위를 말한다. 비록 금융의 사전적인 의미가 약탈과는 일치하지는 않지만, 자본가가 지배하는 금융의 시작과 끝맺음이 실제 약탈의 모습과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약탈 : 금융>
첫 째. 무기를 든다 : 자본준비
둘 째. 상대를 제압한다 : 자본유통
셋 째. 상대의 재산을 빼앗는다 : 자본소득

자본소득의 정당성에 대해 이견의 여지는 있지만, 자본소득의 창출을 빼앗는 행위에 견주는 것은 과한 표현이 아니다. 약탈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이 약탈자가 원하는 것을 내주어야 하는 상황은 빼앗기는 상황과 별로 다르지 않다. 단지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자산을 내주는 것과 자산을 내주기 위해 약속을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경제적 형평성이 없는 거래는 불공정한 거래고 불공정한 거래에 의존하게 만드는 시스템은 가히 약탈적이다. 금융 시스템의 이면에는 수요자의 경제적 형평성은 안중에도 없는 다음과 같은 크고 작은 약탈 행위가 난무하고 있다.

ㆍ대출자의 상환 능력보다 담보물의 가치와 환가성에 우선순위를 두는 각종 대부업.
ㆍ카드사들의 무분별한 신용카드 발급과 부실채권 나눠먹기.
ㆍ위험률이 과대 계상된 변동금리.
ㆍ시중은행들의 자의적인 신용도 평가.
ㆍ고객의 위험보다 자본가의 실적을 염려하는 불완전판매.
ㆍ잔인한 고금리 사채.
ㆍ'부자 되기' 열풍을 일으켜 노동시장 개혁보다 재테크에 몰입하게 만드는 헤게모니.
ㆍ증귄 시장의 지나친 정보 불평등과 개미지옥.
ㆍ국가와 기업 경제를 위협하는 일부 헤지펀드.
ㆍ겸업화와 대형화를 통한 '그들만의 리그' 현상.
ㆍ기타 각종 금융사기 등

금융 시스템이 자본 증식과 약탈의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 배경에는 금융의 공공성을 지키지 못한 신자유주의 정부들이 있다. 그나마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을 비롯한 각 국 정부는 금융 개혁과 금융산업 구조조정에 힘쓰고는 있지만, 14년이나 지난 지금, 그 노력 대부분은 시장 전체의 충격을 줄이기 위한 시스템 리스크 관리에 기울어지고 있다. 교통사고에 대비하여 전보다 더 튼튼한 차체와 에어백을 준비하는 것도 좋지만, 음주운전을 강하게 처벌하는 등 교통 법규를 강화하고 강력한 준법체계를 만드는 게 더 확실한 대비책이 아닐까? 금융을 경제의 효율성을 위한 체계로만 여긴다면 머지않아 금융 시장에는 극소수의 참여자만 남을 것이다. 금융 시스템은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공유지다. 경제 민주주의를 이루고 싶다면 금융의 공공성부터 지켜내야 한다. 소수의 편익을 위해 이익을 포기해야 하는 다수가 모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시스템은 필요 없다. 그것은 시스템이 아니라 절대다수의 삶에 고통을 더하는 고문 기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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