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영재 Feb 21. 2023

그 사람



그는 정작 화가 나면 정말 무서웠다. 그의 눈매는 송곳니처럼 날카로웠고 목소리는 우렁찼으며 덩치는 산만하여 누구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또한, 그는 철인이었다. 강철로 만든 피부 위로 따뜻한 눈물 한 번 흐른 적 없는, 어쩌면 녹이 슬까 봐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굳은 표정은 별일 없이 한결같았다. 가끔씩 어느 차갑고 거친 손이 꿈마다 찾아와 내 이마를 쓰다듬을 때면 그의 손이라 지레짐작하며 쇠 냄새에 몸서리쳤다.


나는 그런 그가 싫었다. 케케묵은 냄새 뒤로 꺼림칙한 온기와 적막이 느껴질 때마다 나는 나의 섬으로 도망 가 안식일을 보냈다. 그의 몸은 천근만근쯤 되어 바닷물을 결코 건널 수 없을 거라는 안도감이 좋았다. 내 두 다리에 힘이 생길 때부터 나는 그와 적당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는 하루 중 대부분을 보이지 않다가 어느샌가 불쑥 나타나 나의 평안을 깨곤 했는데     몇 초의 불편함은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이상한 취미가 있었다.

그는 아침마다 뜨거운 용광로에 들어갔다.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녁까지 버텨내기를 무수히 반복했다. 어쩌다가 그의 강철이 녹아 버리는 바람에 살갗으로 파고든 지옥 같은 고통이 그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이윽고 살의 빈자리는 또 다른 강철이 덧대었다. 그는 고통을 사랑했고 날 미워했다. 나도 그가 미웠다.


그래서 그는 내게 복수를 하려는 듯했다. 그는 틈만 나면 내 사진을 버릇처럼 모아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보관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은밀히 물증으로 남겨 남 모를 대의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그 취미는 그칠 줄

몰랐다. 나는 그것이 정말 싫었다. 내 순수함을 가로채어 황량한 철의 양분으로 삼으려는 그의 유희가 내 속을 어지럽혔다. 그래서 그와 함께 사진을 찍는 일은 불쾌하고 어색한 일이 되어버렸다.


한때 그도 나처럼 이름이 있었다. 물론, 나는 그의 이름을 영영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친구들과 강아지의 이름은 늘 혀 밑에서 감돌았지만 그의 이름은 오래된 서류 뭉텅이 속에서나 간간히 발견할 수 있었다. 먼지 쌓인 글자 그대로 그의 이름은 내 마음속에서 먼지로 흩어져 희뿌연 모래로 쌓여갔다. 그는 내 공기를 탁하게 만들면서까지 내 안에 무엇을 남기고 싶었던 걸까?


마음을 걷다 보면 바닥의 모래 한 자락이 발걸음을 잡는다. 푹 파인 모래 속으로 그의 오래된 물건들과 얼굴이 보인다. 오래된 양복과 구두, 낡은 작업화, 낡은 양말, 낡은 강철들 사이로 진부한 속삭임이 들린다.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연민의 존재로 남아, 먼지 같은 세월을 견딘 그가 마침내 기억났다. 따뜻한 눈시울을 붉히던 그의 얼굴은 한 때, 작디작은 내 발을 어루만지던 따뜻한 그의 손은 한 때, 추운 달밤에 급하게 가져온 그의 뜨거운 미소는 한 때, 내 삶을 먹이던 그의 순결한 손은 한 때, 모두 내게 남아 있었다. 운명의 바늘 위에서 온 지붕을 부둥켜안은 그의 온기가 아직도 내게 남아 있다.










작가의 이전글 어느 시간여행자와의 인터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