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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재 Feb 14. 2023

어느 시간여행자와의 인터뷰





1. 만남

  겨울의 끝자락이 지나고 있었다. 찬 바람에 뒹굴던 낙엽더미가 잘게 으깨져 다시 흙이 될 무렵, 남산 위에서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던 그녀의 실루엣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녀와의 만남은 하늘에서 떨어진 매의 깃털이 어느 창문으로 들어가 어느 아기의 이마 위에 사뿐히 앉는 일처럼 순전히 우연한 일이었다.
  더 이상 시계를 볼 필요가 없어졌을 때, 나는 길 위에 잠시 멈추어 그녀를 차분히 바라봤다. 검은색 후드티에 검은색 반코트를 걸치고 다시 검은색 레깅스에 하얀 운동화를 신은, 그러나 푹 뒤집어쓴 후드 밖으로 살짝 삐져나온 그녀의 코는 너무도 새하얳다. 검은색의 짧은 머리칼은 찬 바람에 실려 후드 밖으로 넘실댔고, 작은 키에 긴 다리, 그리고 코트 주머니에 찔러 넣은 두 손 사이 가늘게 뻗은 그녀의 허리는 작은 머리 하나를 받치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누구보다 평범한 그녀였지만, 한 걸음을 사이에 두었을 땐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국적이지만 익숙한 얼굴, 낯설지만 닮고 싶은 향기, 무엇보다 진한 눈썹 아래로 흔들림 없이 세상을 바라보던 그 차가운 눈빛은 시시콜콜한 현실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어떤 커다란 비밀을 간직한 듯 보였다. 그런 눈빛은 처음이었다.


  그날은 내게 특별한 날이었다. 10여 년의 기자 생활을 정리하고 머릿속에 들어있는 시한폭탄이 제발 느리게 터지기만을 바라며 하염없이 걷던 날이다. 몽골의 유목민들은 화가 아주 많이 나면 일단 화가 풀릴 때까지 걷는다고 하던데, 나는 왜 그리 내게 화가 나 있었을까.

  회사에서 가져온 짐들을 대충 방 한구석에 내팽개치고 밖으로 나와 걷기 시작했다. 당연히 목적지는 없었다. 아니, 더 이상 목적이 필요하지 않았다. 인생은 생각보다 짧고 누구에게나 끝이 있다는 사실을 되뇌며 천천히 걸었다. 열 걸음마다 추억 하나씩, 스무 걸음마다 또 다른 후회를 얹으며 회한과 초월의 심경을 넘나들었다. 잠실대교 아래로 초록빛 강물이 흐를 때쯤, 고작 한 시간도 걷지 않은 종아리가 아려 왔지만, 이제 겨우 안정을 되찾은 이 마음을 집에 혼자 남아 다시 우울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다섯 시간을 더 걸었다. 죽을 맛이었다. 고통은 오히려 얼어붙은 현실 감각을 녹였다. 은 정말 아이러니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자기 연민에 빠져 있었고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지지리 궁상이었다.
  한강을 따라 하염없이 걷다 보니 문득 남산 타워가 보였다. 정상에 올라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며 이 처량한 짓거리의 대미를 장식하리라 마음먹었다. 거의 자정에 가까운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전망대에는 사람들이 즐비했다. 가족, 연인, 연인, 연인, 연인.. 이토록 재미없는 사람 구경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 또 여기에 오른 이유가 가장 이상한 사람이 나일 거라는 쓸데없는 상상도 지우기로 했다. 그리고 우연히 그녀를 발견했다. 조망데크 위에 묵묵히 서 있던 그녀는 마치 뱃머리에 달린 검은색의 선기 같았다.
  당장 벤치에 누워 밤하늘을 감상하는 척 다리의 노곤함을 잊고 싶었지만, 내 낭만파 기질은 끝내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아무 감흥 없을 서울의 야경 대신 그녀의 특별한 분위기를 벗 삼아 묘한 안식을 느끼고 싶었다. 마침 비어 있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난간에 팔을 올리고 서울 시내를 내려다봤다. 야경은 충분히 눈부셨고 역시나 아름답지 않았다. 나를 놀리듯 너 없이도 세상은 아주 잘 굴러갈 거라며 도시의 간판들과 자동차들이 숙덕거렸다.
  시답잖은 광경을 피해 아래로 뻗은 시선을 잠시 옆으로 거두자 그녀의 무뚝뚝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도 나 만큼이나 야경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아무 감정도 없는 하얀 얼굴에 검게 파인 눈동자 속에서 도시의 불빛들이 반짝거렸다. 왠지 그녀도 나와 비슷한 이유로 이 자리에 있을 것만 같은 동질감이 들었다. 게다가 예뻤다. 그녀는 정말 미인이었다. 단지, 여성적인 매력으로는 그녀가 가진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없었다. '언젠가 한 번 봤던가?'. 누구나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미인의 초상을 대충 백지에 그려 넣으면 그녀의 몽타주가 완성될 듯싶었다.

"저 실례지만.. 사진 한 장만 찍어 줄 수 있을까요? 셀카봉을 가져온다는 게.."
"네. 폰 주세요."

  용기를 냈다. 나답지 않았지만 허무함과 피곤함 사이, 그 어딘가에 갇혀 있다 보니 망설임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고리타분한 수법에 불과했지만 꽤 자연스러운 전략이었다. 그녀에게 말을 걸어볼 요량이 생긴 까닭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비록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오랜 기자 생활로 단련한 내 탁월한 안목은 그녀조차 비켜갈 수 없었다. 정면에서 보니 더 예뻤다. 하물며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하늘거렸다. 조금 쌀쌀맞은 톤을 제외하면, 아니, 오히려 그게 더 매력적이었다. 어정쩡한 포즈를 취하며 나는 연신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물론, 카메라 렌즈를 보는 것처럼 보여야 했다. 촬영과 동시에 섬광이 터졌고 섬광은 내 망막에 맺혀 그녀의 배경을 파란빛으로 물들였다. 미약하게나마 하루의 대미를 장식하는 순간이었다.

"감사합니.."
"근데 제 얼굴은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요? 카메라 렌즈를 봐야죠."
"네? 아하핳 아니에요. 제가 그쪽 얼굴을 쳐다봤어요. 아니! 쳐다봤어요? 렌즈가 밤에는 잘 안 보이니. 아참! 제가 눈에 좀 사시가 있어요. 사시가. 아하핳."

  상대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이 쌀쌀 맞고 직설적인 모습, 과연 매력적이었다. 원래 당혹감과 부끄러움은 생물학적으로 수컷의 몫이다. 남자라면 이 정도 곤욕은 당연했다. 사진이 잘 나왔는지는 관심 밖에 두고, 나는 얼른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 빨개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다시 야경으로 얼굴을 묻었다. '역시 오늘은 이래야지..'. 한숨을 푹 쉬는데, 마침 옆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시 보다 종양인데, 아저씨 머리에."
"?!"

  안경이 흘러내릴 정도로 다짜고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뇌종양이 시신경이나 안구 근육을 움직이는 뇌신경을 압박하면 갑자기 사시가 올 수 있어요. 심한 경우에는 시력 상실도 와요. 후두엽과 측두엽 사이에 종양이 있는 걸로 봐서는 충분히 가능한 얘기예요. 병원 가서 치료하세요."
"지금 무슨 말이에요?!.. 네? 다 필요 없고, 학생 같은데 사진 하나 찍어주고 이런 농담하면.. 진짜 혼나요!"
"제가 틀린 말 한 건 아닌데, 아 여기서는 못 고치나? 2023년이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나?"
"그만! 진짜 혼난다고!!"
"왜 화를 내요? 이상하고 못생긴 아저씨네."

  정신이 아찔했다. 황당하고 화가 나고, 또 무서웠다.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되는 치부를 온 세상 앞에 드러낸 기분이었다. 온몸이 부들거렸다. 얼마나 깊을지 모를 시커먼 물속으로 연약한 두 발을 담그는 기분이었다. 이어서 야릇한 공포가 머리를 가득 웠다. '대체 이 여자는 뭐지? 사람이긴 한 걸까?'. 미지의 존재와 마주하면 급기야 현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방어기제가 내 안에도 숨어 있었다. 사실 그녀의 짧은 몇 마디는 모두 진실이었다. 내가 못생겼다는 그녀의 마지막 말 보다 내 머리에 종양이 있다는 그녀의 직언이 더 객관적이었지만, 내 머리로는 도저히 그녀가 정직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는 다시 용기를 냈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좇아 냉큼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당신 대체 뭐야?! 어떻게 안 거야? 어떻게 안 거냐고! 무당이야?"
"아 왕짜증. 사진 찍을 때 다 보여요. MRI 만큼은 아니지만, 스마트폰의 플래시를 터뜨릴 때도 아저씨의 수소 원자핵들이 아주 조금은 공명하거든요."
"으응?..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내 핸드폰에도 MRI 기능이 있다는 거야?"
"뭐 비슷하죠."
"아.. 아 그렇구나? 그러면 MRI가 왜 필요해? 의사 선생님이 갑자기, 에헴 환자분 이리 오세요. 셀카 한 번 찍고 가실게요. 오우 저런! 암이시군요! 김간호사 이 환자분 내일부터 항암 치료 시작해. 막 이러겠네? 솔직히 말해. 너도 내가 다니는 병원 다니잖아?!"
"저는 단지 그쪽이 순수해 보여서 도움을 주려던 것뿐이에요. 착각은 자유지만 내 자유까지 침범하지 말아 주세.."
"오호라.. 당신 딱 걸렸어.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더라! 당신 삼성의료원에서 간호사로 일하지? 맞지? 어쩐지 의학 지식도 있고 낯도 익고.."
"아! 괜한 오지랖 부렸어. 아우 짜증 나! 피곤하네. 아저씨 저 진짜 갈 거예요. 한 번만 더 따라오면 그땐 원펀치 강냉입니다!"
"거기 잠깐! 아직 내 말 안 끝났(퍽!)"

    싸늘했다. 턱에 주먹이 날아와 꽂힌다. 내 삶의 마지막 순간은 오롯이 내 것이어야 한다는 소망은 이룰 수 없는 걸까. 눈 덮인 들판에 혼자만 머리를 내밀고 있는 들꽃이 보였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아름다움은 아니었다. 차디찬 눈 송이로 둘러싸여 마지막 온기마저 빼앗기는 저 지독한 고독 속에서 들꽃 한 송이는 이윽고 시들고 말 것이다. 내가 구해야 했다. 정강이까지 수북이 쌓인 눈밭을 헤치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한 걸음만 더, 조금만 더,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좇던 지난날처럼 생의 의지는 어리석을 정도로 여전히 뜨거웠다. 함부로 쌓여있는 이 눈을 결코 모두 다 녹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마지막 남은 하나의 의미만은 지켜내야 했다. 나는 그렇게 간신히 들꽃 앞에 섰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두 손을 모아 꽃을 감쌌다. 해바라기를 닮은 꽃잎이 왠지 익숙했다. 수줍게 피어있는 꽃잎 사이로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예쁘긴 한데 너무 쌀쌀맞아. 맞아. 난 그녀에게 맞았지.. 어?'.

"엄마, 저 아저씨는 왜 이런 데서 자?"
"응.. 아저씨가 집이 없어서 그래. 그러니까 우리 경훈이는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꼭 멋진 집 사야 해. 이왕이면 강남으로. 알았지?"
"응! 엄마!"

  다행히 내 몸을 뒤덮고 있는 라면 박스 덕분에 동사는 피한 것 같았다. 하마터면 뇌관이 터지기도 전에 얼어서 객사할 뻔했다. 어젯밤 기억을 떠올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얼굴과 그녀가 나를 때린 것은 기억이 나는데, 내가 왜 맞았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우선 집으로 돌아가서 씻고 밥도 먹고, 잠 좀 더 자고, 일어나서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다리와 턱도 아프고, 온몸이 쑤셨다. 남산의 추억은 별로 간직하고 싶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남산을 내려왔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쏟자마자 금세 잠이 들었다.





2. 탐색

  나는 가끔 꿈에서 우주를 유영한다. 거대한 플레어를 내뿜는 어느 뜨거운 항성을 지나면 차가운 진흙으로 둘러싸인 붉은색 행성이 보인다. 나는 분명 빛 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물리법칙이 없는 나의 우주에선 숨을 쉬거나 압력을 견뎌야 하는 그런 자질구레한 문제들은 일어나지 않는다. 수많은 별 빛이 내 몸통을 관통한다. 수 조개의 별들은 저마다 고유한 심장 박동을 가지고 있다. 미지의 젤리로 가득 차 있는 우주 공간은 별들이 내뿜는 파동에 밀려 파도처럼 들썩인다. 막연한 경외심도, 불친절한 두려움도 전혀 느낄 수 없다. 적당한 온도에 알맞은 습기, 조금 어둡지만 충분히 밝은 공간, 마치 엄마의 자궁처럼 나의 우주는 편안하고 안전하다. 내 심장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차오른다.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덩달아 '모차르트 교향곡 40번 G 마이너'도 들리기 시작한다. 모든 별들이 단순한 점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직선으로 변한다. 이윽고 웜홀이 보인다. 이 아름다운 여행을 끝내러 온 불청객이다. 살짝 몸을 비틀어 궤도를 바꾸려 했지만, 녀석의 중력을 이길 수는 없다. 교향곡은 어느덧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 속도를 늦추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젠장 너무 빨라.'. 이대로라면 웜홀에 빨려 들어가기도 전에 내 몸이 먼저 원자로 흩어질 것 같다. 눈을 질끈 감는다. 아주 높은 곳에서 추락하듯 미간은 아찔하고, 심장은 이미 배밖으로 나와 있다. '으어어아 아~'

"아아악.. 여보세요?"
"어? 경훈 선배! 살아있었네? 무슨 일 있어요? 설마 아직까지 잔 거? 어제 우리 팀 전부 다 선배 기다리고 있었다고오!"
"아.. 이선미. 미안. 어제는.. 내가 술 들어갈 타이밍이 아니었어. 그리고 선배는 무슨, 이제 선배 아니니까 그냥 오빠라고 불러."
"어머 경훈 오빠~ 어제 부장도 오빠 이별주는 꼭 줘야 한다고 광고주들이랑 저녁미팅 미루고 왔는데요~ 오빠가 잠수 타서요~ 어제 회식 분위기 완전 수박 씨발!라 먹었어요."
"히히..히힣 그랬구나.. 오빠 소리 듣기 좋네 히힣"
"저 아저씨 웃지 마시고요~ 연락이라도 주든가!"
"아.. 그게.. 좀.."
"됐고요, 선배 송별회 일정 다시 잡기로 했으니까, 가능한 일시 적어서 문자 보내놔요! 바빠서 끊습니다. 보내놔요!"
"어.."

  시곗바늘은 벌써 오후 세시를 가리켰다. 기가 막힌 꿈을 꾼 거 같긴 한데 역시나 기억이 나지 않아 아쉽다. 약 기운 때문일까, 조금 몽롱하다. TV 옆에 있는 전신거울 속에는 남산 전망대에서 갓 노숙을 마치고 돌아온 40반의 백수 아저씨가 얼굴을 찌푸리며 침대 위에 앉아 있다. 왼쪽 턱에는 멍자국이 선하다. 다시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일단 계획대로 좀 씻고, 속 좀 채운 후에 이 멍의 출처를 좇아 탐사보도를 써내려 가자고 다짐한다.
  거의 2년 만에 누리는 완전한 휴식이다. 사회부 기자로 힘들게 얻은 명성 뒤에는 항상 밤만 되면 시뻘겋게 충혈된 두 눈과 피골이 상접한 두 볼, 그리고 볼 대신 볼록 나온 뱃살의 노고가 공로의 반 이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열 평이 채 안 되는 오피스텔에 방치된 전직 기자 아저씨의 말로는 명성은커녕 궁상으로도 봐주기 어려운 수준의 살림솜씨로 기울었다. 5분 후에 개를 키울 계획은 없었지만 개판 5분 전인 나의 집은 열역학 제2법칙을 충실히 따른다. 그래도 괜찮다. 사실 괜찮기보단 집 청소를 왜 해야 하는지 합당한 이유를 떠올릴 수 없다. 다만, 밥은 집이 아니라 나가서 사 먹는 게 좋을 것 같다.

"어따 기자 양반 누구랑 싸웠나 보네. 턱 주가리에 멍 좀 보소. 홀에 김치찌개 하나 있으요."
"저 오늘 김치찌개 안 먹을 건데요? 오늘은 특별히 빈살만 정식이요."
"오 플럭스~. 근데 얼굴은 왜 그런겨? 아줌마 시방 찌개 취소하고 스페샬 정식으로~! 응? 맞은겨?"
"아~ 사장님 플럭스가 아니라 플렉스예요. 에프 엘 에이 엑스. 플렉스. 맞은 게 아니라..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아하핳. 어제 여자친구랑 남산에 갔는ㄷ.."
"여자친구 없잖아. 총각. 나 지난 8년 동안 자네가 여자랑 얘기하는 걸 본 역사가 없어. 역사가."
"그게 관계가, 여자인 친구죠. 친구. 어쩠든요, 전망대에서 어떤 여자한테 사진 좀 찍어 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이상한 여자가 사진을 찍어주고 나서.. 갑자기 날 때리네?"
"으잉? 와? 자네를 왜 때려? 뭐땜시? 무신 이유가 있었을 거 아녀?"
"그.. 그러니까 이유가 있죠! 그러니까.."
"잉? 뭔데? 그 이유가?"
"그 이유가.. 글쎄.. 이유가.."
"뭐여, 있다가 보충혀. 설마.. 막 들이대고 그랐던건 아니지? 크크크킄. 암만, 궁해도 설마."
"어? 맞다! 제가 들이댔어요!"
"으잉, 참말인겨?"

  그저 농담이나 주고받던 천국집 사장님이, 그의 유도심문이, 끊긴 줄 알았던 기억의 지평을 이어 줄 줄이야. 스마트폰에서 터져 나온 섬광이 그녀의 짜증스러운 표정을 타고 귓바퀴에서 맴돌던 단어 하나를 고막으로 집어넣는다. 'MRI'. 어젯밤의 전율이 느껴지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든 그녀를 찾고 싶다. 지금껏 어영부영 돌고 돌던 운명의 수레가 멈추기 전에 내 생애 가장 이상하고 신비한 그 존재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싶다. 소녀였지만 소녀 같지 않았고, 아름다웠지만 지루해 보였던, 어쩌면 오직 그녀가 내 삶의 유일한 의미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확신으로 변한다. 동시에 두렵다. 그녀를 영영 찾지 못한다면, 또는 흐릿해진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삶의 무의미에 대해 씁쓸한 미소를 짓게 된다면, 나는 더 이상 우주의 이치를 거스르지 못하고 산산조각 날 게 뻔하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식당을 나와 곧장 문구점으로 달렸다.

"워메 기자 양반 어디 가? 스페샬 정식 먹고 가야지!! 돈은 어째?"

  나의 순발력은 눈부셨다. 내게도 다 계획이 있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녀는 날 폭행했고 난 기절했다. 그녀는 엄연히 가해자다. 게다가 내 스마트폰에는 그녀의 지문이 남아 있다. 사건 장소를 중심으로 목격자를 찾아 탐문하거나 주변의 CCTV를 모조리 뒤져서라도 그녀를 찾아낼 수는 있겠지만, 지문 보다 효율적인 단서는 없다. 스마트폰에서 액정필름을 조심스럽게 떼어낸 후 문구점에서 구입한 PVC 경질 봉투에 넣는다. 자칫 증거가 훼손되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어젯밤 그녀가 화면을 터치한 후 오늘 오후에 걸려온 전화를 받기 위해 내가 딱 한 번 터치한 게 전부였고, 셔터 버튼과 통화수신 버튼의 위치가 달라 지문이 섞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완벽한 증거보관까지. 이제 남은 일은 이 봉투를 들고 사건 관할지인 용산 경찰서를 찾아가 고소를 접수하는 일이다. 내 영혼은 벌써 남영역에 내려 1번 출구로 걸어 나가고 있다. '그녀를 찾은 후 피의자 소환조사와 대면 확인까지 대략 보름 남짓이면 충분할 테지.'.

"이거 어쩌죠. 이상한데요? 지문 상태가 워낙 양호해서 운 좋게, 오늘 바로 조회가 되긴 했는데.. 없는데요?"
"네? 뭐가 없어요?"
"신원정보요. 그냥 없는 사람이라고 나오는데요."
"에? 그럴 리가요..?.."
"제 생각에는 외국인 같은데요? 외국인이면 법무부에 조회하면 나올 거예요."
"맞다. 맞아. 외국인이에요! 후."
"네, 근데 만약에 이미 출국했으면 문제가 좀 복잡해져요. 천기자님은 잘 아실 테지만, 그래도 미리 알고 계세요."
"네, 그래도 고마워요. 아무쪼록 빠른 처리 부탁드립니다! 진짜 잡히기만 해 봐, 아주 그냥 눈물 콧물 범벅을 만들어서 국산콩으로 지은 밥맛이 얼마나 맛있는지 본때를 보여줄 거야! 한 이틀이면 되죠?"
"네 걱정 말고 푹 쉬고 계세요. 나오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박경사님 파이팅!"

  이틀 정도야 아무래도 좋다. 그녀는 이미 붙잡힌 것이나 다름없다. 경찰서를 나와 집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내내 그녀와의 재회를 상상한다. 나와 다시 만났을 때 깜짝 놀랄 그녀의 동그란 두 눈과, 입건과 함께 굳어질 입술, 나를 향해 기도할 희고 고운 두 손과 고소를 취하하자마자 내 품으로 달려와 와락 안길 그녀의 가녀린 두 팔, 좋은 향기와 예쁜 미소, 자연스러운 애프터 신청과 초대,
'우리 집에서 라면 먹고 갈래요?', '좋아요.',
'집이 좀 어지럽죠?', '경훈 씨 실망이에요. 이건 집이 아니라 돼지우리라구욧!', 집에 도착한 나는 대청소부터 시작했다.
  장장 여섯 시간에 걸친 대청소를 끝내자 그동안 숨겨왔던 이 집의 반전매력이 드러났다. 투룸 치고는 꽤 넓어 보인다. 이것이 내가 이 집을 임대한 이유이기도 했다. 반쯤 젖혀놓은 창문으로 쌀쌀한 밤공기가 들어와 한껏 달구어진 이마를 천천히 식힌다. 불안감도 차츰 줄어든다. 아직까지 이렇다 할 특별한 통증은 없었지만, 처방받은 약 중 저녁 약은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열두 알의 약을 입에 털어 넣고 컵에 물을 따른 후 리모컨을 집어 든다.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확인해야 할 뉴스도, 보고 싶은 콘텐츠도 없었지만 잠시나마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위안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시 그녀 생각이 든다. 그녀에 대한 호기심과 조바심은 작아질 줄 몰랐다. 챗봇에 스마트폰 카메라로 암을 진단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 지, 오감만으로 타인의 병을 정획히 인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그것도 아니면 말기암 환자를 대상으로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신종 사기 사건이 있는지 등을 열심히 물어본다. 예상대로 그런 건 인공지능조차 답할 수 없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시 그녀와 재회하는 일뿐이었다. 이른 아침, 편의점을 다녀오다 박경사의 회신을 받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거 어쩌죠."
"이상하죠?"
"어? 네, 어떻게 아셨어요? 어쨌든 법무부에서도 조회가 안 돼요. 국내에 입국하는 모든 외국인은 면제대상이 아니고서야 지문 등록이 의무거든요."
"이런.. 뭘까요? 그럼 면제대상이거나 불법입국자 거나, 설마 불법체류자 아닌가요?"
"그쵸. 근데 생각보다 복잡해요. 이 외국인 지문 등록제가 2012년 1월부터 시행되었고, 장기체류 외국인 지문 등록제가 2003년 말 폐지되었다가 2011년 7월에 부활했거든요. 그러니까 정리하면, 제도 공백기에 입국한 후 지문 등록을 하지 않고 계속 불법으로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이거나, 제도 기간에 17세 미만이거나 면제 대상이어서 지문 등록을 하지 않고 계속 불법으로, 아니면 면제 상태로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일 수도 있다는 거죠. 물론, 그냥 불법체류자인 경우가 많긴 해요."
"하.. 복잡하네요. 그럼 이제 어떡해요?"
"지문만으로는 피의자를 특정할 수 없으니 일단 목격자를 찾아보거나 CCTV나 블랙박스를 뒤져봐야죠. 저도 은근히 기대했는데 이거 조금 돌아가게 됐네요."
"그렇군요.. 대충, 얼마나 걸릴까요?"
"넉넉잡아서 두 달 정도면 될 거예요. 찾는 건 문제없어요."
"두 달.. 일단 알겠습니다. 연락 감사합니다."
"네 또 연락드릴게요. 끊습니다."

  남은 시간을 손가락으로 세어 본다. 남은 시한은 6개월이다. 그리고 시한은 어디까지나 확률에 불과하다. 날개 달린 행운의 여신이 언제나 내 곁에 머물러 있을 리는 없다. 당장 일주일 후에 황천의 뱃사공에게 뱃삯을 쥐어 줄수도 있는 처지가 아니었던가.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조바심이 손 끝을 흔들기 시작한다. 마냥 손을 놓고 박경사의 연락만을 목 빠지게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뭐라도 해야 했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새로운 추억 위에 또 다른 후회를 얹는다. 조금 더 차분하게 그녀와 대화를 이어갔더라면, 붓다처럼 아무 편견 없는 시선으로 그녀를 대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나는 영락없는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혼수상태가 아닌 이상, 의식 너머의 것을 의식으로 받아들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마침 모차르트 교향곡이 들린다. 선미다.

"어 선미야."
"아 경훈 선배! 문자 남겨 놓으라니깐! 바빠요?"
"아 맞다. 깜빡했네."
"아 이 오빠 속셈이 뭘까나.. 송별회도 싫고 그냥 마지막 인사도 싫고 다 싫다? 진짜 그런 거예요?"
"그런 건 아니고. 진짜 까먹었다니까."
"그래서 언제요? 난 이번 주 금요일이 좋은데요."
"어.. 그래 금요일에 봐. 7시까지 사무실로 갈게."
"카피댓.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요? 저번엔 비명 지르면서 받더니, 오늘은 마리아나 해구네."
"됐어. 그날 봐."
"선배, 일 관두고 뭐 하고 지내는? 단톡방도 나가고."
"그냥 쉰다. 깨톡 소리도 지겹고. 어쩔?"
"선배 관두고 우리 팀, 매일 아침마다 부장한테 개박살 나는 거 알아요? 하 진짜 그놈의 인수인계! 다음 달에 사람이좋다 플롯도 없앤다잖아요."
"아 몰라 몰라. 난 이제 구독자야. 업무 얘기 지겨워. 아니, 구독자도 아냐. 이 부장이랑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해."
"진짜 이러기? 선배가 7년 동안 공들인 탑 없앤다는데, 아무렇지 않아요?"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끊어라 써니텐. 금요일에 봐."

  들고 있던 쇼핑 봉투에 스마트폰을 넣고 발을 떼려는데, 등 뒤로 천국집 사장님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아침 바람 찬 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레기~ 우리 선생 계실 적에~ 외상 내고 가 주세요~ 천 원 말고 만 원이요~ 만 원 말고~"
"아아, 죄송해요. 그때 진짜 너무 바빠서요, 얼마였죠? 만 원인가?"
"만 원 말고 만 이천 원~"
"근데 저 그날 한 입도 못 먹었는데.."
"만 이천 원~"
"네.. 여깄 습니다! 사장님 만세! 대한민국 만세!"

 




"잘 지내요? 난 그저 지내요. 내가 그저 지낼 테니,
당신은 잘 지내야 해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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