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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Aug 03. 2023

한(恨)

주저흔#3

 벌써 두 번째 커피를 다 들이켠 상담사가 꼬았던 다리를 풀고 몸을 앞으로 숙이며 물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잦은 전학으로 많이 힘드셨을 거 같아요." 

희끗한 머리에 오십 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 상담사는 여전히 저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처음 만나본 중년여성에게 제 개인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낯설었습니다. 쑥스럽기도 했고, 그녀가 제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을 할까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말을 할수록 마음이 참 후련하더라고요. 그동안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였지만, 점점 더 깊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저는 하소연하듯 제 감정을 그녀에게 쏟아냈습니다. 

"힘들었어요. 혹시 제가 학교를 그만두게 된 것에도 이러한 경험들이 영향을 끼쳤을까요?" 

책상 위에는 그녀가 젊은 시절에 학사모를 쓰고 찍은 졸업사진이 액자에 담겨있었습니다. 뭔가에 홀린 듯이 그 사진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저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상담사가 말을 이어갔습니다. 

"성장과정에서 특별한 경험이나 감정이 해결되지 못한 채로 지속된다면, 어떻게든 생애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녀는 녹음기가 잘 작동되고 있는지 확인하더니 다시 시선을 저의 얼굴로 돌렸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했던 기억을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요?"

 엄마와의 기억을 묻는 그녀의 질문에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엄마는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난 때문에 제가 친구들에게 무시당할까 봐 세심하게 신경 쓰셨습니다. 기죽고 다니지 말라고 새 신발, 새운동화를 사러 사거리 시장에 갔던 장면도 기억납니다. 잘 다듬어진 고등어, 오징어젓갈, 제가 좋아하는 설탕을 듬뿍 묻힌 꽈배기를 검정 봉지에 담아 들고 쫄래쫄래 엄마의 뒤를 따라 다녔습니다. 주방에서 밥짓는 냄새와 함께 음식을 하실때면 저는 뒤에서 크레파스로 엄마의 뒷모습을 그리고 놀았죠. 스케치북을 찢어 냉장고에 붙여 놓고 서로 한참을 웃으며 된장찌개에 밥을 말아먹기도했어요. 엄마는 꽃을 좋아했고 여행을 가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저도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엄마 손을 잡고 저녁 산책을 나갔고 엄마 무릎에 앉아 TV를 보면서 아버지의 퇴근 시간을 기다렸어요. 물론 많이 혼나기도 했습니다. 늦잠을 자거나 씻지 않고 잠에 들면 찬물을 이부자리 위에 끼얹혀서라도 우리 형제를 깨우던 분이었죠. 그래도 엄마와 함께 있을 땐 행복했어요. 저희 형제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걸 분이었거든요. 그러한 온전한 사랑이 고스란히 느껴질 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퇴근하시면 우리 가족의 분위기도 180도 변했습니다. 강성적인 엄마의 성향과 아버지의 무던한 성격은 자주 마찰을 일으켰어요. 그중에 가장 큰 것은 아무래도 경제적인 이유였겠죠. 상담사의 질문에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다 보니 문득 엄마와 함께 했던 시간 중에 가장 기억나는 일이 한 가지 생각나네요. 지금도 가끔씩 꿈에 나오는 그때의 상황과 장면의 파편들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그날은 엄마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어요.

무얼 그리 골똘히 생각하는지 중요 회로에 퓨즈가 나간 것처럼 크게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종종 좋아하는 드라마를 켜놓고도 한참 동안 멍하니 화분만 바라보기도 했죠. 저녁 밥상머리에서의 대화가 줄고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습니다. 불만이 있거나 화가 나면 오히려 말이 더 많아지고 언성이 높아지는 평소의 반응과는 달리 입술을 꾹 다문 엄마의 반응이 어색했습니다. 오랜 침묵 끝에 내쉬는 긴 한숨은 평상시의 돈문제나 아버지의 술문제 때문에 내쉬었던 그 한숨소리와는 확실히 다른 결이었으니까요.

비슷한 시기에 같은 반 친구 배동철네 부모님이 이혼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배동철은 삼일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담임선생님은 배동철이 외갓집 식구들과 함께 경주로 여행을 갔다고 했지만 이혼소송이나 양육, 이사문제로 며칠간 학교에 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소문이미 학교 전체에 퍼져나갔습니다. 

설거지를 하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혹시 어떤 결심을 굳힌 것일까요. 그릇들이 물에 씻기면서 서로 부딪혀내는 소리들이 날 때마다 내 심장은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습니다. 계단밑 우편함에 꽂혀있던 '국세청'이라고 쓰여있는 하얀 봉투 때문일까요. 아니면 월세계약기간만료가 도래해서 또 이삿짐을 싸야 돼서 그런 것일까요. 갑자기 변한 엄마의 일상에 제 반응 또한 길을 잃고 헤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학교 정문엔 우산을 들고 자녀의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는 학부모들이 줄지어 서있었습니다. 곧이어 수업종이 울리고 책가방을 머리에 이고 뛰어가는 학생들 틈사이로 저도 정신없이 집까지 뛰기 시작했습니다. 신발에 물이 들어갔는지 발바닥이 바닥을 칠 때마다 내는 푸슈-거리는 소리가 영 찝찝하고 거슬렸었죠.

다세다주택에 다다른 저는 계단을 한걸음에 뛰어올라갔습니다. 관문 밑에 우유투입구 마개를 밀고 손을 쑥 집어넣었죠. 연히 에 찰랑거리는 물체가 잡혀야 하는 것이 수순인데, 제 얇고 새까맣게 그을린 손은 허공만 헤집을 뿐이었습니다. 열쇠를 놓고 가야 한다는 것을 잊으신 건지, 엄마가 일을 마치고 집에 올 때까진 2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순간 짜증이 확 솟구쳐 올랐어요. 예전에도 한번 이런 적이 있었죠. 비에 홀딱 젖은 채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계단에  앉아있는데 처량한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그때, 현관문 너머 집안에서 인기척이 들렸습니다. 분명 엄마의 목소리였어요.

"엄마! 뭐 해! 문 열어줘!" 아무리 현관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자 다시 허리를 굽혀 우유투입구에 얼굴을 대고 소리쳤습니다. 분명히 집안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작게나마 들리는데... 순간 인간의 상상력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끔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 계단을 다시 뛰어내려 가 밑에 집 현관문을 사정없이 두드렸습니다.

"아줌마! 집에 엄마가 대답을 안 해요! 제발." 저도 모르게 '제발'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습니다. 눈시울이 그렁해져 사색이 된 제 얼굴을 보고 밑에 집 아줌마가 뛰어 놀라셨어요. 아줌마는 우유투입구 쪽으로 엎드려 큰소리로 엄마를 불렀고 전 계속해서 문고리를 흔들며 두드렸습니다. 그때 전 처음으로 이혼이나 갈등, 가난의 회색빛 그림자가 아닌 어쩌면 죽음일 수도 있겠다는 시커먼 그림자가 마음에 내리 앉았습니다. 연탄가스를 두 번이나 마시고도 살았습니다. 도둑이 든 적도, 집주인한테 쫓겨나 친척집 다락방에서 산적도 있었습니다. 수십 번을 이사 다니면서도 살고 남의 집 파출부로 일하면서도 살아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우리는 살아냈습니다. 그런데,

철컥.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문고리가 움직이는 소리에 싹 사라졌습니다. 엄마는 멍한 표정으로 현관문 앞에 서있었죠. 문을 열어주고는 이내 방으로 들어가다니 이부자리 위에 누우셨습니다. 밑집 아줌마는 누워있는 엄마의 상체를 일으켜 물이 담긴 컵을 엄마의 입에 가져다 댔습니다. 아무 감정도 엿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물을 들이켜는 엄마는 비에 홀딱 젖어있었죠. 팔뚝, 무릎과 종아리에는 어딘가에 긁힌 상처 수십 개가 빼곡했습니다.

"엄마 도대체 왜 그래? 어디 다쳤어?" 

너무 놀란 나머지 그렁이던 눈물도 차갑게 말라버렸습니다.

"산에 갔었어."

"산에? 왜?" 

창문밖 너머 보이는 동네 뒷산에는 점점 더 강한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어요.

"모르겠어. 산에 갔다가 넘어져서 굴렀는데  잘 기억이 안 나." 

엄마의 몸에 빼곡한 생채기들은 나뭇가지나 바닥에 있는 돌에 긁힌 상처였습니다.

엄마는 항상 대장부라고 생각했어요. 목소리도 크고 행동가짐도 시원시원했죠. 제가 친구들과 싸우거나 위험한 장난을 했을 때는 사정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제가 넘어지거나 다쳐서 왔을 때도 '이놈의 자식이 또 다쳐서 들어왔네 또!"라고 하시면서 오히려 등짝을 때리는데, 서운한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그렇게 엄마는 항상 강한 사람이었죠.

결국 엄마는 우울증 약을 복용했습니다. 엄마는 친구들도 있고 익숙한 성당도 있고 자주 가던 사거리 재래시장이 있는 예전에 살던 동네에서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이삿짐을 쌌습니다. 익숙한 거리, 익숙한 동네, 익숙한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다행히 엄마는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갔죠.


그런 일이 있은 후로부터 전 오히려 엄마한테 모진 말을 많이 했습니다. 엄마가 길을 잘 모를 때, 컴퓨터를 못 다룰 때,  무거운 걸 들고나서 저녁에 허리가 아파 누워있는 모습을 보면 너무 답답하고 신경질이 났습니다. 

"그냥 집에 있지, 뭣하러 나가서 사서 고생을 해!" 왜 유독 엄마의 사소한 행동에도 예민해지고 신경질이 났을까요. "넌 남들한테도 못할 말을 엄마한테만 하니.", "엄마도 나 다쳤을 때 오히려 더 혼냈잖아!"

서로가 서운함을 표출했습니다. 그땐 왜 그렇게도 치열하게 비난했는지, 엄만 왜 그렇게 나에게 화를 냈는지, 저 역시 엄마에게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었는지, 그땐 알지 못했어요. 훗날 제가 부모가 돼서야 알았습니다. 제가 다치거나 세상을 살아갈 때 강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엄마가 왜 그토록 화를  냈는지.


어쩌면 서로가 다치거나 깨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차라리 내가 아프고 내가 다치는 게 낫지, 걱정되고 또 걱정되는 마음. 우린 모두 그 마음을 표현하는 데엔 서툴렀지만 서로를 걱정하는 그 마음만큼은 우린 서로 같은 곳을 바라봤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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