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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Aug 05. 2023

고해

주저흔#4

안녕하세요. 부님.

성사를 본지 어느덧 10년도 더 넘은것 같네요.  저의 생애사를 글로 진술하다보니 눈물도 참 많이 납니다. 오랜만에 이렇게 성당에 와보니 어렷을때 엄마 손을 잡고 성당에 갔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때 저음의 오르간소리와 깔리는 성가대의 목소리가 어린 저에게 다소 무겁게 느껴졌던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입니다. 주일마다 성당에 가야하는 것이 당연한 규칙처럼 느껴지는 환경에서 저는 엄마와 자주 부딪혔습니다. 규칙대로 움직이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건지, 아니면 게으르고 나태했던건지, 아마 제가 냉담하게 되고 사회에서 소외된 것이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집은 부유하지 못했습니다. 엄마는 집에서 묵주기도를 하셨고 또 성당에 가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 보다 어렵다고. 나누어주고 살아야 한다고. 이웃을 내 가족처럼 사랑하고, 오른쪽 뺨을 때린 사람에게 왼쪽뺨을 내어주고, 심지어 원수마저 사랑하라고. 그렇게 기도하고 또 기도하셨습니다. 엄마의 기도 내용처럼 저희집은 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못마땅했습니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데,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원하신것이 지금의 이 모습이냐고.     


아버지는 작은 원단 공장을 운영 하셨습니다. 여느 사업을 하는 아버지를 둔 가정이 어려움을 겪는 것처럼 저희집도 항상 사업난에 시달렸습니다.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 이사만 14군데를 다녔고 초등학교를 3군데를 다녔습니다. 전학을 다닐때마다 항상 그곳에 먼저 자리를 잡고 있는 무리와 싸우든지, 잘 융화되어 지내게끔 머리를 굴리든지, 어린나이였지만 항상 투쟁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하교길에 집 우체함에 꽂혀있는 세금과 관련된 하얀봉투만 봐도 심장이 떨렸죠.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면 어머니는 항상 묵주기도를 하고계셨습니다. 삭월세, 전세를 전전긍긍하다가 어머니가 오십이 다되어서 처음으로 장만한 아파트 한채가 있습니다. 처음으로 제 방이 생겼고 드디어 혼자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족 모두가 거실에 누워 한껏 웃으며 팔을 휘젓고 뱅글뱅글 돌았습니다. 방 문은 또 왜그렇게 많은지 어디가 화장실이고 어디가 방인지 구분이 잘 안갈정도였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살던 집은 방문 한개, 화장실 문 한개 였는데, 드디어 저도 제 친구들처럼 제 방이 생겼고 책상이 생겼습니다. 제일 좋아한건 어머니였죠.     


그렇게 간절했고 소중했던 집이였는데, 아버지의 사업난이 심해지자 아파트 담보로 대출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사업은 점점 더 어려워졌죠. 어머니는 그날 이후로 아버지에게 한이 생기셨습니다. '저 원수때문에 못산다.'라고. 그러고는 다시 성당에 가셔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기도하고 가난은 축복이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당이라는 공간에서 나와서 일상으로 돌아오면 가난때문에 울고 아버지를 원수라고 부르며 괴로워 하셨죠. 이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하루는 어머니에게 분노를 담아서 물었습니다. 왜 기도하는 공간에서만 가난을 축복이라하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냐고. 왜 일상으로 돌아오면 이웃도 아닌 가족을 원수라 부르고 가난함에 가슴졸이면서 불안에 떠냐고. 천국에 가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냐고. 천국에 가고 싶어서 하느님 제단앞에서만 좋은 사람인척하냐고. 가족앞에서만 불안해하고 분노를 표현하냐고. 사실 천국이라는 공간도 죽어서조차도 살고싶은 인간의 욕심과 오만이 만들어낸 공간이 아니냐고. 하지만 그런말을 하는 저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파트를 사고 그렇게 좋아하시던 엄마의 그 표정이 너무도 생생했기 때문이죠.


저의 청소년기 성장과정에서 가장 기억나는 건 학교를 그만뒀던 순간입니다. 잦은 전학으로 인해 이제 막 익숙해지려하면 다시 새로운 지역, 새로운 사람들과의 마주했습니다. 저는 제 어린시절을 간직했던 보금자리의 기억도 스승의 날에 찾아갈 법한 은사님과의 기억조차도 없습니다. 결국 저는 변화와 정착의 그 갈림길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매번 반복되는 일상에서 또래 친구들간의 서열싸움도 싫고 학생들을 줄지어 눕혀놓고 체벌을 하는 선생님도 싫었습니다. 한번은 쉬는 시간에 옆반 창문을 통해 반 내부를 쳐다봤다는 이유로 그 반 담임선생님께 뺨 열일곱대를 맞았습니다. 심지어 학교를 그만두는 날 어머니를 모시고 온 자리에서도 학교의 수치라며 선생님은 제 뺨을 때리셨죠.


사람이란 참 간사한가 봅니다. 아니면 제가 간사하던가요. 그렇게 비난했던 종교였는데, 살다보니 정말 너무 괴롭고 절실하다보니 저 또한 이렇게 성당을 찾아온걸 보니까요. 당시에 엄마도 도저히 현실에서는, 타인에게서는 그 어떤 도움을 요청할 수없고 길을 찾을 수 없어 성당을 찾으셨겠죠. 지금 와 돌아보면 엄마가 겪었던 그 모든 상황과 감정들이 감히 가늠조차 되지 않습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저는 방황했습니다. 스스로를 가두고 중독에 빠지고, 무시당하고 소외당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후회하고 또 후회하고... 어쩌면 저는 지금 제 인생에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고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글로 저의 성장과정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많이 위로가 되는 것 같습니다. 글을 통해 다시 저의 경험과 감정을 눈으로 읽으니 그때의 감정이 어느정도 이해가 되는 기분이 듭니다. 누군가 제 이야기를 읽어주고 들어주는 것만으로 미해결 과제로 남았던 그 당시의 감정들이 해소되는 것이 참으로 신기합니다.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아직도 제 마음 한 구석엔 아직 풀어내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학교밖 청소년, 위기 청소년, 자퇴생, 꼴통, 은둔형 외톨이, 낙오자, 패배자 등등으로 불리우며 살아왔던 지난 17년간의 이야기. 제가 그 어둡고 좋은 굴레에서 세상밖으로 나와 행복을 찾아 가는 여정에 대한 이야기.


조금 더, 제 이야기를 이어가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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