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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Aug 07. 2023

바짝 엎드려서 본

주저흔#6

#6

30초. 우리 집 수도꼭지에서 녹물을 빼내는 데 걸리는 시간입니다. 미리 수도꼭지를 돌려놓고 성애 낀 거울을 손바닥으로 닦아냈습니다. 그러다 무심결에 '아 집에 가고 싶다.'라는 말이 중얼거리듯 입 밖으로 새어 나왔습니다. 이미 집에 있는데 집에 가고 싶다니, 저는 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중얼거렸을까요. 이 말은 사실 제 심경을 가장 정확히 대변해 주는 문장이었습니다. 거실과 화장실, 가족들과 마주치는 곳이 이제는 불편한 공간이 되어버렸습니다. 2평 남짓한 제 방을 넘어선 구역은 저에게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었던 것이죠. 우여곡절 끝에 고등학교를 진학했지만 부모님과 갈등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부모와의 갈등으로 인한 잦은 가출과 반항, 자식의 일탈을 저지하려는 부모의 통제와 회유. 저는 끊임없이 갈등의 원인을 제공했고 제 우울의 원인은 부모의 탓이라며 책임을 돌렸습니다. 마주 보며 내달리는 차 안에서 둘 중 하나가 핸들을 돌리지 않으면 충돌해 결국 모두가 파멸에 이르는 치킨게임을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화장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습니다. 누런 물이 다 빠졌는지 수도꼭지에 맑은 물이 쏟아붓고 있었지요. 전 수도꼭지 밑으로 머리를 가져다 대고 허리를 굽혔습니다. 찬 바람이 화장실 창문 틈사이로 삐져 들어왔습니다. 장맛비가 바닥을 치는 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왔고, 전 어깨를 잔뜩 말아 움츠린 채로 머리를 털어 말리고는 현관문을 빠져나왔습니다.    

 

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선 동네를 벗어나 버스 정류장에서 12-1번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쳐다보며 교복을 입은 또래 학생들의 책가방을 멍하니 바라봤습니다. 그날, 저는 교복을 입지 않았고 가방도 메고 있지 않았습니다. 버스에 올라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오늘 꼭 해야 할 말을 머릿속으로 복기했습니다. 사거리 모퉁이를 돌자 저 멀리 학교의 정문이 보였습니다. 학교가 가까워지자 제 심장이 쪼그라지는 것 같았어요. 잠깐이지만 그냥 이대로 버스 종점까지 가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엄마는 오전 업무를 끝마치고 곧장 학교로 찾아온다고 하셨습니다. 긴장되는 마음에 휴대전화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곧이어 띠잉-소리를 내며 버스의 뒷문이 열렸고 전 접었던 우산을 펴고 학교 정문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하아-이 쌩양아치 같은 놈이 막 나가네. 이제 교복도 안 입고 학교를 와?"

담임 선생님을 만나러 교무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옆반 선생님과 마주쳤습니다. 선생님은 제 오른쪽 귀를 있는 힘껏 잡아당기시더니 벽으로 몰아세웠습니다. 순간 반항심에 선생님을 노려봤습니다. 찰싹. 찰싹. 뺨 맞는 소리에 옆 반 학생들이 전부 저와 선생님이 서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 뺨 열일곱 대를 때리신 선생님은 그제야 분이 풀리셨는지 저를 교무실에 데려다주었습니다.

"네가 아주 학교에 먹칠을 다 하는구나?"  

저는 고개를 숙이고 담임선생님의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평소에도 반 평균성적을 떨어뜨리더니 결국 이 사달을 내냐면서 언성을 높이셨습니다. 똑. 똑. 그때 엄마가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엄마는 평소답지 않게 단정하게 차려입고는 선생님을 향해 고개를 숙이셨습니다.

"우리 애가 학교에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엄마는 마치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두 손을 목으로 제 옆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았습니다.

"엄마 고개 들어. 왜 엄마가 그러고 있는 건데. 엄마가 무슨 죄지었어?"

찰싹. 그때 담임 선생님의 손이 치켜세워지더니 제 뺨을 후려쳤습니다.

"이게 어디서 어른들이 대화하는데 껴들어! 넌 학교에 수치야 수치! 알아?"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선생님과 뺨을 부여잡고 있는 저를 번갈아 쳐다봤습니다. 엄마는 너무 놀란 나머지 쉽게 입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잠시 침묵이 돌았고 엄마는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제가... 잘못 키운 죄입니다. 제가..."


자퇴서를 내고 학교 정문을 빠져나왔습니다. 우산을 내던지고 비를 흠뻑 맞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엄마는 아무 말없이 제 앞을 걸어갔습니다. 앞서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서 '엄마!'하고 말을 건네고 싶었어요. 하지만 입술이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말을 좀 해봐!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을 마음에 품고, 우린 버스에 올라타 집으로 향했습니다.

엄마는 집에 도착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퇴근하시고 나서야 엄마는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너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네가 뭐가 부족해서!"

부모님은 아직 저의 이탈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엄마는 말을 하던 중간에 울음이 터져 나와 다음 말을 이어하지 못했습니다. 날카로운 송곳이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그만 좀 해!"라며 소리를 지르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와 방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손발이 떨렸고 얼굴 근육조차 굳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때 사실 제가 아버지와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그만 좀 해!'가 아니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걱정 안 끼치게 잘할게."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왜 그렇게 제 마음과는 반대되는 말이 나오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퇴를 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저는 완전히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주변에서는 '호되게 때려서라도 말렸어야지!'라며 부모님을 볼 때마다 한 마디씩 거들었습니다. 그 이후로 전 한 달 동안을 방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잠을 잤습니다. 꿈이 현실이고, 현실이 꿈이었기를 바라면서 다시 눈을 감았습니다. 당장 내일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로 잠에 들었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요. 창문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은 어둑해져 다시 돌아올 내일의 하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평범한 내일은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 후로 아주 오랫동안, 아무리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제 인생에는 해가 뜨지 않았습니다.





#7

교복을 버렸습니다.

엄마는 나중에 추억으로 한 번씩 꺼내 보라고 했지만, 저는 오바로크 된 이름표를 뜯어내고 헌 옷수거함에 교복을 밀어 넣었습니다. 모든 게 불만이었고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중학교 때 항상 반 1등을 놓치지 않았던 반장은 저를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널 보면 항상 자유로워 보여. 너무 부럽단 말이지."

반장이 말하는 자유는 아마 이런 것이겠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학교도 나오고 싶을 때만 나오고, 저도 사실 그런 자유로움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땐 알지 못했습니다. 모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요. 그 당시의 결정이 평생의 꼬리표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전 어떤 곳을 가더라도, 어떤 환경, 어느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질문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취업은 어떻게 할래? 앞으로는 또 어떻게 벌어먹고 살 거고? 결혼은 할 수 있겠니?"

'니 인생 도대체 어떻게 할래?'와 같은 질문들로부터 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제 신체를 해방했던 그 '자유로움'이 부메랑이 되어 저를 철저하게 감시하고 단단하게 꼬인 매듭으로 돌아와 정신과 행동을 속박했습니다.

그 이후, 전 스스로를 가뒀습니다. 등이 아픈 건지 허리가 아픈 건지 온몸이 영 불편한데도 몸을 좌우로 한 번씩 돌려 누울 뿐이었죠. 쉽사리 일어날 의지가 들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머리를 감지 않았는지 하얀 각질이 어깨 위에 수북했고 피부는 온통 빨개져 긁은 상처가 빼곡했습니다. 친구들이 모두 교복을 입고 학교로 발걸음을 옮길 시간에 전 밈춰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불을 껐어요.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게.


학교를 그만두자 엄마는 매일같이 우셨습니다. 외갓집 식구들은 너무나도 가난해서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고 합니다. 엄마는 밭일을 하면서 저 멀리 지나가는 교복 입은 친구들의 모습이 그리 부러웠다고 해요. 그래서 일까요. 엄마는 안방 옷장에 제 교복을 잘 다림질해 걸어놓았습니다. 제가 이따위 것 꼴도 보기 싫다면서 교복의 오바로크를 손으로 뜯어낼 때, 심하게 구겨지고 망가진 교복을 보면서 엄만 참 많이 우셨습니다.

"너 그렇게 나약하게 마음먹어서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러니!? 엄마가 너 어떻게 키운 줄 알아?!"

엄마는 하루종일 누워있는  모습을 보면서 리치셨습니다. 대부분의 내용은 아들이 망가져가는 모습을 어미로써 보는 것이 가슴 찢어진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속상함의 표현이 당시 저에겐 그저 원망처럼만 들렸습니다. 원망이 한차례 지나가면 이런 말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가난해서... 학원 한번 보내주지 못해서 그런 거지? 매번 전학이나 다니게 하고, 엄마 아빠가 가난해서 미안해."

소리 지르는 것도 지쳐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목소리. 저는 말이 너무나도 듣기 괴로웠습니다. 엄마의 말처럼 정말 가난 때문이었을까요? 저는 왜 그렇게 부모님이 가장 아끼는 저 자신을 볼모 삼아 협박하듯 엄마와 아버지의 마음에 대못을 박았을까요. 마치 뭔가에 복수라도 하려는 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엄마는 큰 빚을 지게 된 아버지를 향한 원망과 낙오자가 된 아들로 인해 생긴 마음속 출혈로 매일같이 괴로워했습니다.


어느 날, 학교밖 청소년들을 위한 쉼터를 알게 되었습니다. 가출을 하고 잘 곳을 찾다가 알게 된 곳이었죠. 부모님은 분노와 질책이 저를 움직이게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절망했습니다. 고성이 오가는 그 전쟁 같은 시간 속에서 저는 맨몸으로 뛰쳐나왔고 가출 청소년에게 잘 곳을 제공해 주는 복지시설에서 한동안 생활하게 된 것입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정문 입구에 붙어있는 한 문구에 시선이 갔습니다.

-우리가 함께 하는 공존의 세상을 위하여-

두 가지 이상의 사물이나 현상이 함께 존재한다는 의미의 공존. 학교 안에서의 그들과 학교 밖에서의 제가 어찌 됐든 세상에 섞여 함께 살아나가야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공감이 됐습니다. 왜냐하면 전 그저 다른 공간에 서 있을 뿐이지, 돌연변이가 아니었기 때문이죠. 있는 그대로 현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정과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해서 완전히 삶이 끝나버린 건 아니라는 것이죠. 자퇴생, 가출 청소년, 사회 부적응자, 끊질기게 저를 따라다니던 단어입니다. "너 어떻게 살래?"라는 말들, 아무리 항변하고 소리를 질러봐도 이 낙인은 좀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 저 역시도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은 놈이 뭘 할 수 있겠어.'라는 말이 입에 달라붙었습니다. 그러자 "너 어떻게 살래?"라며 제 열등감을 이끌어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렇게 피해의식이 있어서 어떻게 살래?"라고 대사를 살짝 틀어 제게 들려줬죠. 사람들은 제게 어떤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래요. 전 그런 놈입니다." 자신들 앞에서의 완전한 항복, 결국 제가 이 말을 스스로 뱉기를 원했던 것일까요.


그때 전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자퇴하고 한 달 후에 검정고시 학원을 등록했지만 수업을 거르는 날이 태반이었습니다. 부모의 이혼, 학대, 폭력에 노출되어 제도권으로부터 튕겨져 나온 사람들. 비슷한 환경은 공감대를 만들어줬고 그들과 저는 빠르게 가까워졌습니다. 며칠 동안은 매일 술을 마신적도 있었어요. 술을 마시고 자고, 다음날 다시 술을 마시고, 삶을 포기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살았습니다. 밖으로 나가지 않은 날은 하루종일 누워있다가 이유 없이 오열하며 이불을 끌어안았죠. 새벽까지 깨어있다가 종종 7층 높이의 창문에 걸터앉았습니다. 다리를 창문밖으로 빼고 아래 땅바닥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내려와 다시 침대에 누웠어요.

간혹 세상 사람들은 인생을 터널로 비유하기도 하잖아요. 저는 그 당시 어디쯤 서있었던 것일까요. 그땐 왜 창문밑으로 바라본 땅바닥이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의 유일한 출구라고 생각했을까요. 결국 정신과를 찾았습니다. 사실 그때 제가 정신과를 찾은 가장 큰 이유는 가족들에게 저의 상처를 알리려는 의미였습니다. 누워있던 저를 향한 말들은 제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게으르고, 나약하고,

무기력한 놈이라는 말은 창문에 걸터앉은 저를 힘껏 밖으로 떠미는 거 같았거든요.

처방받은 알약을 손바닥 위에 놓았습니다. 비참했습니다. 얼마 살지도 않은 놈이 왜 정신과 약이나 먹으며 살아야 하는지, 사람들 말처럼 제 인생은 답이 없는 것인지, 분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보한과 함께 뛰어놀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어둑해질때까지 뛰어놀았던 그때, 하염없이 웃다가 머리만 대면 곯아떨어졌던 그때를 떠올리면서, 삐집고 나오려는 무언가를 깊게 누른채 목 속 깊숙이 하얀색 알약 두 알을 꿀꺽 삼켜 넘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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