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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Aug 11. 2023

아버지의 고장 난 미싱기

주저흔#10

 고장 난 미싱기 한대가 집 한쪽 구석에 놓였습니다. 

집도 좁은데 쓰지도 않는 미싱기를 집안으로 들였다고 엄마는 성화를 내셨습니다. 십 년은 족히 넘었을 것 같은 미싱기는 곳곳에 상처가 난 것처럼 페인트가 벗겨져있었고 드러낸 속살에는 녹이 슬어있었습니다.

"이게 얼마 짜린 줄 알아."

저도 그 미싱기가 기억납니다. 아버지는 십 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하다 산업단지에 공장을 내셨습니다. 형과 저도 아버지의 사업장 정리를 돕기 위해서 몇 번 공장을 들렸던 적이 있습니다. 열 두대 정도의 새 미싱기가 오와 열을 맞춰 가지런히 나열돼 있었어요.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 아버지는 깨지기 쉬운 청자를 다루듯 새 미싱기를 닦고 또 닦습니다.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나자 돗자리를 펴고 몇 가지의 과일과 떡을 놓았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절을 올렸고 우린 일렬로 선 뒤 눈을 감고 마음을 모았습니다. 조상께 제사를 지내고 단 장의 발이 되어줄 새 봉고차 바퀴 주변으로 막걸리를 빙 둘러 부었죠. 

그렇게 십 년, 정말 오랫동안 고생한 끝에 공장은 결실을 맺는 듯했습니다. 처음으로 우리 집이 생겼고 직원 수도 늘었습니다. 땀 흘려 오른 오르막길 너머에는 평평한 평지가 있을 줄 알았는데, 다시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봉우리가 높게 솟아있었어요. 산업단지에 자리했던 공장 지금은 동네골목길에 위치한 작은 상가의 지하로 옮겨졌습니다. 쩍이던 새 싱기도 어느덧 몸통의 색이 바래진 채 그 수가 6대로 줄었네요. 고장 난 미싱기를 버리지 못하고 아까워하는 아버지의 마음 콧등이 시려집니다.


"내일부터 공장에 나와서 짐이라도 날라."

제 나이 서른이 되었습니다. 서른이면 손주까지 안겨줄 나이인데, 골방에 누워있는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얼굴에도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습니다. 어느덧 아버지보다 더 커져버린 몸뚱이. 그런 제가 러닝만 입고 집안을 서성이는 걸 보고 있노라니 속이 뭉그러진다고 하셨죠.

십 년 만에 찾은 공장은 처음 봤던 모습과 많이 달라져있었습니다. 지하에서 풍기는 유의 한 냄새, 20평 남짓한 공간에는 미싱기 몇 대와 재단틀, 그리고 돌돌 말린 원단 수십 개가 피라미드 모양으로 겹겹이 쌓여있습니다. 저의 첫 임무는 원단을 둘러메고 1층으로 올라가 봉고차에 실는 것이었습니다. 밑에 깔려있는 원단을 빼느라 위에 있는 원단을 빼냈고, 허리를 굽혀 원단을 들쳐 어깨에 올려놓는 순간 엿가락 휘듯 몸이 휘청였습니다. 환갑이 다 되신 아버지가 이리도 무거운 원단 두 개를 양쪽 어깨에 둘러메는 모습을 보고 속이 상해 저도 모르게 짜증을 부렸습니다.

"뭘 그렇게 두 개씩 들고 그래. 그러니까 맨날 허리 아프다 그러지."

"그걸 그렇게 잘 아는 애가 누워서 아까운 청춘을 다 보내고 있냐? 나와서 아버지 일도 좀 도우고 그러지 그럼."

제가 우울증 약을 먹고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을 때 아버지는 저에게 쓴소리를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한 번씩 공장일을 도와드리는 게 내심 좋으셨는지 아버지는 제 등짝을 치며 호탕하게 말하셨습니다.

"이제 너도 사람답게 살아봐야지. 나와서 일 좀 배우고 그래."

아버지와 이렇게 오래 대화를 나눈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원단을 다 나르고 가득 찬 봉고차를 보니 왠지 모르게 뿌듯함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동안 내리고 올라타는 것을 얼마나 반복했는지 좌석 시트 가죽이 다 벗겨져 있었어요. 아버지의 일상은 얼마나 치열했을까요. 다시 고개를 드는 죄책감을 정면으로 응시한 채로, 옷에 묻은 원단 가루를 털어내고 봉고차를 집 주차장으로 몰고 들어갔습니다.  

땀을 흘리니 자연스럽게 화장실로 향하게 되더라고요. 쏴-하고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에 머리를 대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눈을 감고 과거의 후회됐던 일들을 떠올렸습니다. 비 오던 날에 뒤돌아보았던 학교 정문의 모습, 요동치던 제 마음과는 달리 고요했던 창문 밖 새벽의 풍경도 떠올랐고요. 비누 거품 씻겨 내려가듯 이 기억들도 모두 씻겨 내려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전엔 일주일이고 이 주일이고 몸에 물 한 방울도 묻히지 않았던 적이 많습니다. 차거나 뜨거운 무언가가 몸에 닿는 것조차 침해받는 것 같아 왜 그리도 불편했는지 모르겠어요. 방에 수북하던 쓰레기를 치우고 몸에 달라붙은 묶은 때를 물로 씻어내리는 이 평범한 행위가 제 인생을 바꿔줄 씨앗이 되어줄지 누가 알았을까요. 참 길었습니다. 이 두 가지 행위를 하는데 무려 십삼 년이나 걸렸으니까요.


그다음 날, 새벽 5시에 일어났습니다. 밤낮이 바뀐 채 십수 년을 살면서 새벽 5시에 잠든 적은 많지만 그 시간에 일어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처음 하는 일이 많아졌네요. 새벽에 일어난 것도, 방 정리와 몸 씻기를 시작한 것도, 아버지와 이렇게 오래 대화를 해본 것도, 모두 제겐 처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아주 조금씩, 정말 아주 조금씩 제 몸은 끝이 없을 것만 같던 터널 출구를 향해 몸을 틀고 있었습니다.

봉고차에 원단을 가득 실고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물류창고로 향했습니다. 창문을 반쯤 내리자 밤새 케묵은 매연과 먼지가 중력에 의해 바닥으로 가라앉았는지 상쾌한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도 도로엔 각자의 생계를 짊어진 수만은 차들이 내달리고 있더라고요. 도 그들과 함께 제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함도 들었습니다.


상했던 시간보다 일찍 물류창고에 도착했습니다. 아직 달이 하늘에 걸려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반장'이라고 불리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회색 봉고차에서 내리는 저를 보고 말했습니다.

"경기도 감사장댁네서 오셨어? 아이고 젊은 사람이 새벽부터 열심히네."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인사치레라 하더라도 '열심히 산다.'라는 말을 단 한 번이라도 들었던 기억이 없거든요. 전 그분이 건넨 '인정'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산다는 말 앞에 당당하고 싶었고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박스를 나르고 주변을 정리했습니다. 먼저 얘기하기 전에 움직였고 물품의 수량을 두 번 세 번 꼼꼼히 체크했습니다. 출발하기 직전엔 편의점에 들러 캔커피를 직원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습니다. 질책과 분노 앞에서 움직이지 않던 제 다리가 인정의 말 한마디에 움직이게 되었네요.  


원단의 검수를 마치고 다시 봉고차에 올라 고가대로 옆으로 운전대를 돌렸습니다. 어느새 해가 구름에 걸려 일렁이고 있었죠. 고속도로엔 새벽보다 훨씬 더 많은 차들이 빼곡히 서행하고 있었습니다. 땀도 나고 원단을 내리느라 몸도 뻐근했어요. 근데요. 신기하게도 기분이 참 좋더라고요.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을까?'에서 '나도 무언가를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고개를 빼꼼 내미는 거 같았습니다.

근 후에는 책방에 들러 물품 유통에 관련된 책도 샀어요. 그리고 인터넷에 접속해 대학교 홈페이지를 이리저리 클릭해 보았습니다. 사랑에 고백하지 못하고 빈종이에 두서없이 끄적이는 것처럼요. 대학교의 공지사항도 눌러보고 저와는 상관도 없는 학사 일정도 둘러보았어요. 너무 오랫동안 미뤄놨던 배움을 다시 시작해보고 싶었습니다. 교실에 앉아 수업을 들었던 열여섯 살의 그 모습을 떠올리면서요.


그때 제 나이 서른,

혹시 저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요...?


(뒷면)

뛰기 전에 '어떻게 뛰어야 하지?'라는 생각이 많으면 겁이 생겨서 뛰지 못합니다. 다치면 어떡하지, 소용이 없으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들이 자동적으로 침투하듯 제 머릿속에 들어왔습니다.

"일단 뛰면서 생각해야 하는구나."

갓난애 걸음마 떼듯, 저도 조금씩 세상을 향해 걷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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