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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Aug 14. 2023

나를 일으킨 건 죄책감과 후회였다

주저흔#11

 어질러진 화장대 위에 펼쳐진 성경책을 덮고 엄마는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같이 일어나 묵주를 잡는 우리 어머니. 어쩌면 엄마가 잡은 건 묵주가 아니라 삶을 향한 투쟁심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도를 할 때 엄마의 뺨에 붙은 눈물 한줄기가 삶에 대한 절실함을 느껴지게 했으니까요. 기도를 마치신 엄마는 젖은 머리를 대충 털어말리며 립스틱을 발랐습니다. 출근 전, 계약이 예정된 보험가입서를 다시 한번 살펴본 엄마는 형을 보며 말했습니다.

"동생 손 꼭 잡고 다녀. 저번 같은 일 또 생기면 혼날 줄 알아."

당시 제 나이와 같은 서른한 살의 엄마는 파출부, 미싱 시다, 보험영업사원 등 생계에 보탬이 될 만한 일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정장을 입기 전 항상 착용하던 허리복대 엄마의 전투복 같았어요. 퇴근 후 허리에 부항을 뜨시며 얼굴을 찡그리시던 장면치 액자에 보존된 사진처럼 제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엄마가 일을 나가시면 형이 저를 돌봤습니다. 저는 유치원에 다닐 때도 자주 선로를 이탈했습니다. 형이 무서운 표정으로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라고 해도 전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해요. 형과 저는 두 살 터울입니다. 하루는  형이 저를 돌보다가 순간 저에게 둔 시선을 놓쳤다고 합니다. 일을 하다 뛰쳐나오신 엄마와 아버지가 넋이 나간채로 저를 찾다가 파출소에 들렸는데, 제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경찰관이 건네준 귤을 까먹고 있었다고 해요. 당시의 자세한 장면들은 잘 기억나질 않지만, 그날 저녁 형이 엄마에게 무진장 혼났던 것은 선명하게 기억이 납니다.

가난한 가정환경덕에 학교를 다니지 못한 것은 엄마의 한으로 남아있습니다. 초등과정부터 틈틈이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셨고 보험영업에 필요한 운전을 배우기 위해 운전 연수도 받으셨죠. 성당 일도 도맡아서 하셨습니다. 어떨 땐 아버지보다 훨씬 더 힘이 센 게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가구를 끄는 일이나 쌀포대 같은 걸 들어 나를 때를 보면 거침이 없으셨죠. 세네시간만 주무셔도 다음날 쌩쌩한 것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엄마는 힘이 셌던 것이 아니라 마른 수건에 물기를 빼내듯 온몸을 쥐어짜 냈던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공장에 들어간 돈은, 엄마가 하루 24시간씩 한평생을 일을 해도 갚을 수 없을 만큼 의 금액이었으니까요.


"빚 있는 월 천보다 빚 없는 월 삼백이 더 낫다!"

엄마는 형과 저를 보며 말했습니다. 빚에 허덕이며 사는 것이 얼마나 숨이 막히는지에 대해서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이야기하셨어요. 제가 중학생 때부터 시작된 이야기. 부모님의 수십 년 묶은 한을 어린 저에게 쏟아내는 것이 너무 버거운 적도 많았습니다. 우리 집이 왜 이 모양인지에 대한 서사는 십 년이 지나도, 이십 년이 지나도, 삼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배설되는 감정의 찌꺼기들은 온전히 제 정서에 묻어 저를 괴롭혔습니다.

거래처에 결제 대금을 주지 못해서 집으로 걸려오는 독촉전화는 모두 엄마가 받았습니다. 이런 전화가 온 날이면 전 방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주방에서 고성이 오갔기 때문이죠. 이와 같은 날이 반복되다 보니 평범한 일상에서 TV를 보다가도 전화벨이 울리면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게다가 남편을 대신해 사죄를 해야 하는 엄마의 십자가는 아버지의 사업난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현관문 바로 옆방, 십삼 년째 우울증에 걸려있는 아들 엄마의 한쪽 어깨에 눌러앉아 살아 숨 쉬고 있었죠. 제가 방에 누운 채로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것들에 괴로워하고 있을 동안에 아버지와 엄마는 가족의 생존과 관련된 실체 하는 무게를 견디고 있었습니다.

버지의 휴대전화 역시 한시도 쉬지 않고 울렸니다. 거래처는 결제대금을 독촉했고 은행에서 더 이상 이자를 밀리면 압류를 진행한다고 했습니다. 전화 너머 고성이 들리면 아버지는 전화를 붙잡고 연신 고개를 숙였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집을 담보 잡아 몇 차례에 걸쳐 빌릴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고 그때부터 엄마의 마음에도 큰 병이 들어서게 된 것이죠.

저는 자책했습니다. 십수 년간 저는 도망자였고 방관자였습니다. 피붙이라는 신분적 위치를 이용해 부모님의 노동에 대가를 착취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겁니다. 엄마는 제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는 좋아하셨지만 아버지의 공장에서 일하는 것을 그리 반기지는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아버지가 제 명의로 대출을 받는다던가 공장의 빚이 제게 떠 넘어갈까 걱정하신 것이죠. 저도 아버지의 공장에서 일을 계속하는 것보단 다른 직장에 취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언제까지고 이런 형식으로 일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제 하루 일당도 결국 아버지의 지갑에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일단 급한 불이 사그라들 때까지 공장에 나와 돕다가 언젠가 저도 직장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의 휴대폰은 마치 갓난아이가 밤잠을 설치듯 쉴 틈 없이 울어댔습니다. 아버지는 전화를 받기 전에는 짧게 한숨을 들이켰고, 전화를 끊이신 다음은 길게 한숨을 내쉬셨습니다. 

"내일까지 시간을 좀 주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사정이..."

물류창고에 물건을 내리다가 문득 아버지가 창고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봤습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 아버지의 키가 더 작아지신 것 같았어요. 열 살 이상 차이나는 제 동생보다 더 왜소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한 번도 아버지의 모습 전체를 관찰한 적이 없었는데,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아버지의 모습 역시 점점 제 시야에 오래 머물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지방에 납품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우린 봉고차 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버지는 집에서 말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공간이 주는 분위기 때문일까요. 봉고차 안 밀폐된 좌석에서 아버지는 그동안 자녀에게 감춰왔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마치 뒷주머니에서 부치지 못한 오래된 엽서 한 장을 꺼내는 것처럼요. 제가 처음 걸음마를 뗐을 때의 이야기, 열이 많이 나서 마음 졸였던 이야기, 제가 입대를 했을 때 엄마와 아버지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함께 눈물 흘렸던 이야기, 학교를 그만두면서 방황하고 은둔했던 13년간 가슴이 시커멓게 타버렸을 테지만 아버지는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제가 주눅 들고 의기소침해할까 봐 저를 배려한 것이겠지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공장에 도착했습니다. 공장 바닥에는 실뭉텅이들과 원단 가루들이 수북하게 쌓여있었죠.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깨끗이 정리했습니다. 하루종일 분주했던 공장에도 고요함이 찾아왔어요. 불을 끄고 공장을 쓱 한번 돌아본 다음 공장의 문을 잠갔습니다. 아버지가 공장 셔터를 내리고 바닥과 연결된 걸쇠에 자물쇠를 채우기 위해 쪼그려 앉았습니다. 

"머리 좀 털어. 머리에 원단가루랑 다 묻었네."

속이 상했습니다. 아버지의 머리를 털어드리다가 내려본모습에는 아버지의 앙상해진 등뼈 밑으로 엉덩이골이 훤히 드러나있었어요. 하루종일 빨개진 얼굴로 사죄를 하고 허리를 부여잡으며 원단을 나르시던 우리 아버지.  

 어렸을 때 가로등 밑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작업복을 털면서 돌아오시는 모습이 보이면 전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갔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저에게 정말 큰 사람이었습니다. 작업복을 입고 가방을 들고 있는 모습은 참 멋있어 보였죠. 목욕탕에서 제 등을 밀어주시던 아버지의 팔뚝은 어린 제 눈에는 큰 기둥 같았습니다. 그랬던 아버지가 행색에 개의치 않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있는 모습을 보니 제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날 이후로 전 제가 당장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장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부모님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제 한 몸에 들어가는 돈이라도 스스로 벌어야 한다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습니다. 더 이상은 '내 인생은 너무 힘들어.'라는 생각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어요. 만약 제가 이불을 걷어차고 밖으로 나와 취업을 한다는 소식을 전한다면 부모님이 얼마나 좋아하실까요. 40만 킬로를 뛴 낡은 봉고차 안에서 운전대를 잡고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렇게 주변에 무시당하고 가난에 허덕이면서도 서른이 될 때까지 누워만 있었던 제 자신을 원망하면서요. 눈물이 멈출 때까지 뺨도 때렸습니다.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아마도 없는 허공에 소리를 지르기도 했지요.


남들이 뛸 때 누워있었고 가족들이 힘들 때 외면했습니다. 이제 제가 해야 할 일들을 더 미뤄둘 수는 없습니다. 저는 다른 방법을 알거나 다른 길을 가고 싶어서 도전하지 않은 게 아니었습니다. 이미 늦었거나 해봤자 안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전하지 않은 것이었죠.

전 미래의 휴식을 미리 가불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범람하듯 제 인생을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언젠가 제가 진 이 모든 빚을 청산하는 날, 아버지에게 좋은 양복 한 벌을 사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뒤에 글)

저를 십수 년간 괴롭혔던 우울감은 지금도 감기처럼 불쑥불쑥 찾아옵니다.

다행인 건 저도 이 우울을 이제는 흔한 계절감기처럼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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