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목격자
"속보입니다. 어제저녁 30대 여성이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은 용의자를 특정하여-"
중년의 아나운서가 또렷한 목소리로 살인사건을 보도했다. 카메라는 피해자가 살던 현관문에 붙어있는 노란색 폴리스 라인을 비췄다. 곧이어 하얀 방호복을 입은 과학수사대원들이 부산하게 카메라 앞을 지나갔다.
난 냉장고 위칸에서 맥주 한 캔을 꺼냈다. 퇴근 후에는 집에 존재하는 모든 불을 꺼두는 편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어둠이 안락하다. TV 화면에서 송출되는 빛에 의존해 알루미늄 캔 뚜껑에 손가락을 밀어 올렸다. 쉬이익-하는 소리와 함께 거품이 뽀글거리며 솟아올랐다. 허겁지겁 거품에 입을 가져다 대며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돌렸다.
마약 중독자의 검거 소식, 아동을 무차별하게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 SNS를 이용한 성폭력 범죄들, 어떤 채널을 돌려도 마찬가지였다. 저녁 9시 뉴스는 마치 인간의 심연을 기록한 백과사전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어느새 맥주캔을 다 비웠다. 술맛이 달다. 현실이 쓰기 때문일까. TV를 끄고 소파에서 일어나자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맥주가 한 캔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동공의 초점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서있다가 서재로 향했다. 책상 위에는 반쯤 읽다만 칸트의 [윤리 형이상학]이 놓여있다. 책장 맨 위칸에는 헤겔, 레비나스, 푸코, 프로이트의 철학이 담긴 책들이 서재에 꽂혀있고 인문학과 에세이도 그 아래칸에 잘 정리되어 있다. 책상 위 누워있는 책을 들어 책장에 꽂아 넣다가 맨 뒷페이지에 붙여놓은 포스트잇 한 장을 발견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내 필체다. 책을 다 읽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적어놓았던 것이 생각났다.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이 질문은 오랫동안 나를 붙잡았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 불리고 스스로를 이 세상의 주인이라 여긴다. 국가를 세우고 문명을 일으키며 법과 도덕, 규정을 규범 하지만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무너지며 눈을 마주쳤다는 이유로 사람을 살해하기도 한다. 인간은 위대하고 연약하며 악랄하다. 이렇게 모순적인 존재가 또 있을까.
어쩌면 인간은 신을 닮으려 했지만 짐승을 닮아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며칠 후, 30대 여성을 살해한 살인자가 검거됐다. 그가 반짝이는 카메레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걸어 나왔다. 모자이크 처리된 살인자의 얼굴은 알 수 없다. 검정 후드티, 깊게 눌러쓴 모자에 가려진 살인자의 정체에 수많은 추측이 달라붙었다. 그는 결국 법의 심판을 받았고 시민들은 안도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남자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다. 이 남자는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 사람을 살해하였으니 자신의 목숨도 박탈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칸트는 만약 살인자를 사형에 처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범죄에 대한 응당한 도덕적 책임을 방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율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자율적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그의 인간성을 존중하는 것이라 했다. 반면 제레미 벤담은 형벌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전체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형벌은 처벌뿐만 아니라 교육과 재활이 동반되어야 하며, 복수보다는 범죄예방과 사회질서의 실현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면서 말이다. 이들의 주장처럼 처벌과 재활, 복수와 예방, 가까운 듯 먼 이 두 체계가 공존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는 어떤 해답에 도달하게 될까.
법원은 사람을 살해했다 하여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선고하진 않았다. 그들은 다시 여러분의 이웃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분명한 건 범인의 흔적을 쫒고 검거하여 형벌의 기간을 늘리고 줄이는 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검거와 구속 이후가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같은 순환 속에 갇히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인간의 어둠을 직시해야 한다. 그 심연을 응시하며 기록하고 탐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같은 비극이 반복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가 희생자가 될 것이다.
대학원에서는 학자들의 이론을 배웠다. 책 속의 문장들은 논리적이었고 법은 정연했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그 너머에 있었다. 활자로 정리되지 않는 폭력, 분석으로 설명되지 않는 악의는 학계나 대학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인간의 어두운 심연을 가장 가까이에서, 또 가장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10년의 시간, 수천 개의 얼굴, 수만 가지의 내러티브, 그 속에서 나는 기록하기로 했다.
살인, 마약중독, 스토킹, 폭력, 사기, 성폭력, 그들의 얼굴을 직접 마주바라보며,
햇살이 철창에 잘려 들어와 분절된 형태로 회색 문을 비추는 그 공간에서.
나는 지금 교도소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