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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Oct 08. 2021

언차티드와 공시생의 엘도라도

플스 할 시간이 없어서 인생을 플스 하기로 했습니다#3

There must be a beginning of any great matter,
but the continuing unto the end until it be thoroughly finished yields the true glory.

어떤 위대한 일에도 반드시 시작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을 마침내 달성할 때까지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과정이야 말로
진정한 영광의 참된 의미가 있다.

Sir Francis Drake, 1587
UNCHARTED.




"여러분, 왜 도전하지 않으십니까?

지금 당장 시작하세요."


온라인 강의 속에 한 강사가 수업 오리엔테이션에서 학생들의 동기부여에 열을 올리고 있다. 강사는 분필을 칠판에 갑자기 던지기도 하고 발차기도 시전 하면서 공시생들의 이목을 확실히 쥐어잡았다.

나는 GTA5의 트레버, 스파이더맨의 킹핀과 대전을 겪은 후에 나만의 무기가 없다면 더 이상 빌런들과의 대결에서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몇 년 전 좌절을 맛봤던 그 시험. 무려 20만 명이 그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공무원 시험에 다시 한번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대한민국 청년 3명 중 1명은 이 시험을 준비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우리 공시생들은 여기저기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지금은 하고 있지 않지만 공무원 시험공부를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사회적 문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말 많은 사람들이 공무원이라는 직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교 줄 세우기에 포함되지 못한 사람들은 취업이 거의 불가능했고 평생을 고졸이라는 낙인이 찍혀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 억울한 노릇이었다. 공무원 시험은 공평했다. 등학교를 졸업한 누구라도 경쟁을 통해 선발되고 임용됐다.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무슨 대학이네 무슨 대학을 나왔네'라는 규칙은 통용되지 않았다. 고졸 출신들에게 있어 이만큼 도전해볼 만한 취업 루트는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았다.


'그래. 더 이상 내 인생에 포기란 없다.'


난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철저한 준비. 정갈한 마음가짐. 공부 스케줄 등 모든 걸 하나씩 준비해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언차티드 게임 속 주인공 네이선 드레이크가 모험을 떠나기 전 지도와 좌표를 가지고 공략 계획을 세우는 것처럼-

언차티드 게임속 모험을 떠나는 네이선 드레이크

게임 속처럼 주인공을 도와주는 설리반이나 여자 친구 클로에는 없었지만 철저히 혼자만의 싸움. 그 고립된 기약 없는 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에 나 자신을 몰아붙였다.


-라고 거창하게 오프닝을 열었지만 사실 현실은 대단할 것이라곤 없었다. 한 달에 몇십씩 하는 노량진 학원에 직접 가서 직강을 들을 수 있는 경제적 처지가 되는 것도 아니고 1인 독서실을 끊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는 짧지만 그동안의 빌런들과 싸워 남은 돈으로 '합격할 때까지 120만 원!'이라는 패키지를 결제하고 집에서 한 시간 거리인 시립도서관에 다니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자리는 도서관 3층에 위치한 열람실 2. 창가 쪽 4번째 줄인데 이 자리는 적당히 고립되어있고 고개를 들면 창문밖에 나무들도 보였다.


"어? 혹시 00 중학교...?"


내 앞 책상에 앉은 사람의 얼굴이 굉장히 낯이 익었다.

긴가민가한 마음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갈 때 따라나가 봤다. 그는 흡연실로 향하고 있었다.


"맞지? 00 중학교."


"어? 너도 공무원 준비해?"


흡연실에서 우리는 단번에 서로를 알아봤다. 이미 십수 년이 흘렀지만 중학교 3년 동안의 기억은 우리의 마음속에 단단히 각인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날 이후 점심 같이 먹으면서 앞으로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논의했다. 심을 먹고 도서관 주변을 한 바퀴 걸으면서 나누는 이야기들에 우리 청춘의 마지막을 그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도 동료가 생겼다. 네이선 드레이크와 빅터 설리반처럼 우리는 공무원 시험이라는 기나긴 여정을 함께 탐험해나가고 있었다.

모험을 떠나는 네이선과 설리반


"야, 너네 어울려 다니면서 부는 언제 하려고 그러냐?"


몇몇 주변 친구들은 서른이 넘어서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는 우리를 한심하게 생각했다. 어떤 한 친구는 내가 전에 다녔던 회사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곳들을 그만뒀으면 절대 안 됐다고 얘기했다. 그들은 내가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너의 자리는 지금 바로 거기야', '넌 지금 그 자리가 어울려.'라고 얘기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나도 대략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술자리에서 서른이 넘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나를 안주거리 삼고 있었다는 것을..

회사를 그만두면 보이지 않을 거 같던 빌런들이 다시 한번 내 앞을 가로막으며 내 인생에 다시 나타났다.

SNS를 열어보면 결혼하고 애를 낳은 친구들도 있고 런던으로 신혼여행 중이라는 사진. 회사에서 승진파티를 한다는 사진들. 그런 사진들을 보면서 내 모습을 돌아봤다. 삼선 슬리퍼에 후줄근한 나이키 티셔츠... 그 당시 가장 처절했던 것은 서른이 넘은 내 나이였다.


"넌 왜 공무원이 되고 싶어?"


점심을 먹고 도서관 옆 화훼단지를 걸으며 그 친구가 물었다. 그동안 공부를 같이 하면서 수많은 얘기들을 나눴지만 왜 공무원이 되고 싶은지에 근본적인 대화들은 나눈 적이 없었다. 난 그동안 다녔던 회사들에서 있었던 얘기들을 조잘조잘 얘기했다.


그동안 너무 자유롭게 살았던 것 같다고.
이제는 소속감을 가지고 보호를 받고 싶다고. 자유에 뒤따르는 책임이 나한텐 너무 무겁게 다가왔다고.


난 이제 이렇게 주변을 맴도는 인생에 진절머리가 났다.

나도 세상에 뛰어들어 결혼도 하고 승진도 하면서 인생 한 건 치열하게 살아보고 싶었다.

그 친구는 말없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난 이제 공부를 시작한 지 1년이 되었지만 그 친구는 3년 전부터 그 도서관을 다니고 있었다.


"부럽다. 난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어. 자유에만 책임이 따르는 게 아니고 자유 없는 삶에도 고통이 수반되는 거 같아."


그 친구와 나는 살아온 환경이 달랐고 정반대의 상황에서 오는. 그렇지만 같은 고통을 체감하고 있었다.


"우리 이번에 꼭 합격하자. 다들 우리가 안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데 꼭 합격해서 그들이 틀렸다는 걸 보여주자고."


나는 점점 무거워지는 이야기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목소리에 힘을 실어서 얘기했다. 힘내 보자고-


"글쎄, 3년이 넘어가니깐 이제 나도 잘 모르겠어. 이제는 합격해도 기분이 좋을까 싶기도 하고..."


친구는 많이 지쳐있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주고 싶었지만 밥을 같이 먹는 것을 제외하곤 나도 누군가에게 힘을 나눠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공부를 하면서 가끔 이런 생각들을 하곤 했다.

어느 날 내 자리에 앉은 그 친구가 더 이상 이 도서관에 오지 않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어느 순간부터는 나 혼자 밥을 먹고 나 혼자 화훼단지를 걸으며 담배 한 개비를 피고 저녁이 되면 혼자 집에 걸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내가 저 친구의 합격을 진심으로 내일처럼 같이 기뻐할 수 있을까. 물론 그 순간만큼은 같이 기뻐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난 다시 도서관 창가에 앉아 혼자 있어야 한다는 상상을 하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리고 그렇게 또 한 번의 봄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흘렀다.


"시험 잘 봤어?"


필기시험을 마치고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356일간에 노력들에 대한 결과가  이 100분 안에 정되어 진다는것이 참 허무했다.


"잘 모르겠어. 이번엔 좀 쉬웠던 거 같기도 하고.. 근데 뭐 도서관 가서 다시 공부해야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깐-"


"바로 도서관 가게? 방금 시험 봤는데 오늘은 좀 쉬지 그래. 같이 당구장에라도 가서 머리 좀 식힐까?"


1년 365일 동안 하루 10시간씩 공부해서 1년에 한 번 있는 시험을 끝마치고 돌아오는 길인데 오늘만큼은 쉬어야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이제 그냥 도서관에서 책 보는 게 오히려 마음 더 편해. 나가봤자 다 돈이고."


친구는 무덤덤하게 전화를 받았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아주 빠르게 평소와 같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

.

.

처음 합격소식을 들었을 때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지 못했다. 나는 그 친구의 연락을 기다렸다.


"합격했지? 맞지?"


"응.. 합격했어.."


"다행이다... 정말.. 정말 다행이야..."


우린 수화기를 붙잡고 펑펑 울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이 울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복받쳐 눈물을 쏟아냈다. 오늘은 눈물을 참고 싶지도 않았다. 그동안의 설움이 단 한순간에 보상되는 기분이었다.  


술자리에서 나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잘게 썰며 안주거리 삼던 친구들은 나를 떠났다. 내가 공무원 합격하면 장을 지진다는 그들은 30년 이상 옳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자신들의 가치관이 틀렸음이 증명되자 더 이상 내 주변에 나타나지 않았다. 인들 스스로도 민망했겠지.

처음으로 빌런에 쫓겨 게임 오버된 것은 내가 아니었다. 드디어 빌런들이 스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은 곱게 물러나지 않았다. 내가 잘난 척을 해서 싫다던가, 약속시간에 늦은 적이 한번 있었다던가 등의 어떻게든 책임소재를 나한테 떠넘기려는 시도를 마지막으로 내 인생에서 삭제됐다.

흔히 '좋을 때 다가오고 힘들 때 떠나는 사람을 피하라'라는 말이 있지만 더 경계해야 할 유형은 오히려 '힘들 때 다가오고 좋을 때 떠나는 사람'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해놓은, 본인들보다 낮은 위치에 타인을 가둬놓고 다른 위치로 가기 위한 노력하는 모습 자체를 불편해한다. '불행'에는 옆에 붙어 귀를 쫑긋 세워 동정하며 스스로를 높이고 '행운'에는 '자랑한다. 설친다.'라는 프레임을 씌워 입을 막는다. 그들과의 이러한 관계를 제삼자에게 의논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제삼자인 그들은 내용보단 단지 누가 더 분쟁을 일으키나에 관심이 있다. 그저 말을 멈추고 물러나라.


그리고 우리는 결국 우리만에 '엘도라도'에 도착했다.

탐험을 마치고 돌아오는 네이선과 설리번

게임 속에 미션처럼 지프차를 타고 사막을 달린다던지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려 낙하산을 펼치고 초원 위를 난다는지의 스펙터클한 모험은 아니었지만 끝이 보일 거 같지 않던 여정이 끝을 맺었다. 언차티드의 모험은 끝이 났고 나의 공시생으로의 여정도 끝이 났다.


하지만 여전히 빌런들은 내 인생에 나타날 것이다.

다양한 장면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그리고 여전히 내 인생을 건 게임은 계속된다.


#4화에 계속-


세상을 떠난 그 친구에게 같이 화훼단지를 걷고 싶은 밤이라는 말을 남깁니다- 너의 파란색 가방, 남색 필통이 생각난다 친구. 너를 그리워하는 친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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