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자루에 담았던 정육점
박복한 우리 부모가 집안을 일으켜 세운 정점이 된 사건은 나의 고향에 작지만 세모난 땅에 3층짜리 건물을 올린 일일 것이다. 아빠는 잘 모르겠고 생활력 강한 엄마가 그간 식당을 해서 모은 돈으로 지은 것이라 짐작해본다. 어쨌든 부모가 건물주가 된 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획기적인 사건임에는 틀림없었다.
집안의 첫 자동차인 포니도 이때 뽑았던 것으로 기억난다. 세 자매에게 총천연색 한복을 입히고 귀한 막둥이 아들까지 차에 앉혀놓고 우리 부모는 카메라 셔터를 눌렀더랬다. 그저 이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부모가 가장 행복한 때가 아니었을까, 마음이 아련해진다. 어린 시절 기억이 흐릿한 나이지만 그곳에서 살며 겪었던 일들을 떠올려본다.
이 건물에서 우리 부모는 정육점을 시작하였다. 1층 입구에 '수입 소고기 전문'이란 글자를 유리문에 새겨 넣고 작은 골방도 한편에 마련해놓았다. 엄마도 아빠의 고향도 아닌 곳에 내려와 이렇게 팔자가 피게 되리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결혼 초 찢어지게 가난하고 첫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부모에게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여태껏 삶을 되돌아보건대 모든 것은 엄마의 지휘 하에 이루어진 일임이 분명했다. 키가 160센티미터도 되지 않고 야리야리한 젊은 여자는 무엇으로 이리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일까?
부모는 세모집에서 10년이 넘도록 정육점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고기를 만진다는 것은 아주 오래전 과거에는 홀대받던 백정들이나 하는 일이었다. 귀한 고기를 먹는 이들은 귀한 고기처럼 귀하디귀한 사람대접을 받았고, 귀한 걸 만지는 사람들은 세상 하찮은 존재가 되었다. 왜 남들에게 편안함을 제공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홀대해온 것일까? 나도 커가면서 우리 엄마 아빠의 일터인 정육점을 부끄러워한 적이 많았다. 커갈수록 부모의 일에 대해 내려 보는 시선을 느꼈다. 어쩌면 나도 그런 하찮은 마음이 가슴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정육점을 시작하곤 자루에 쓸어 담을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했다. 대형면허까지 따러갔다던 호기로운 엄마의 증언대로 엄마는 용달차를 끌고 돼지를 실러, 소를 실러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피가 뚝뚝 떨어지고 S자형 갈고리가 목덜미에, 가슴팍에 끼워진 분홍색 통돼지와 시뻘건 소고기가 가게의 철봉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검붉은 고무다라에 물을 받아 시멘트색 수세미처럼 생긴 천엽을 담갔다. 소의 간이라든지 선지 등도 철통에 한가득 이었다. 늘 기름에 절어있는 가게에 학교 갔다가 들어설라치면 운동화가 바닥에 쩍쩍 달라붙었다.
등골은 마치 하얀색 마시멜로우 같이 생겼다. 기름장에 찍어주면 대여섯 살 밖에 안 된 둘째 여동생은 날름날름 잘도 받아먹었다. 억척스럽게 입덧하고 일하며 동생을 낳고 엄마는 바로 일터로 쫓겼다. 유난히 밖으로 도는 아빠 때문에 힘들어한 시기에 셋째 아이를 배고 낳았다. 아기가 3킬로도 되지 않게 태어난 것이 아빠 때문이라며 대대적으로 흉을 보곤 하였다. 그 부러질 것 같이 작은 아이에게 좋은 것이란 좋은 것은 다 먹였다. 자식들에게 내어준 갖가지 음식은 표현이 서툰 엄마의 질긴 사랑이었다.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지만 통돼지와 크게 잘린 소를 발골 하는 작업 역시 엄마와 아빠의 몫이었다. 하얗고 깨끗한 목장갑을 끼고 작업을 하기 시작하면 이내 목장갑이 피로 발갛게 물들었다. 피 묻은 장갑이 쌓여갈수록 못난이로 태어난 나에겐 부르뎅 아동복 같은 고급 아동복이 입혀졌다. 3층에 자리한 우리 보금자리에는 촌스럽기 짝이 없는 프릴 장식의 커튼이 달렸다. 이름 없는 작가의 청자, 백자 같은 것들도 장식장에 채워졌다. 우리 사 남매는 엄마, 아빠가 1층에서 장사를 하는 동안 3층 집에서 옹기종기 모여서 놀았다. 늘 대장은 장녀인 내 몫이었고 나무 빗자루를 휘두르며 어리기 짝이 없는 나는 늘 부모 노릇을 하였다.
제법 큰길가에 지어진 건물은 위치가 좋긴 했지만 땅이 세모 모양이었다. 세모 모양이든 동그라미 모양이든 우리 부모에게 모양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양 때문에 집 구조는 효율적이지 않았지만 우리의 첫 건물, 세모집은 더없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한 평 남짓한 직사각형 방이 제일 먼저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의 방이었다. 한편에 책상을 두고 반대편에 장롱을 하나 두면 책상 밑으로 발을 뻗어야 제대로 누워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비좁았다. 그 방에서 나를 키워주신 우리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세모 모서리 끝 쪽이 안방이었는데 방한편이 삼각형의 꼭짓점처럼 뾰족했다. 안방 화장대에 놓인 엄마의 립스틱을 바르며 여동생들과 놀았던 기억도 떠오른다. 부엌에선 우리끼리 튀김인지를 하다가 불을 낼 뻔한 적도 있었다. 밤이면 바퀴벌레가 몸을 기어 다니는 듯한 오싹함에 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집에서 나는 세상에서 제일 혐오하는 바퀴벌레를 만났다. 꼬랑지에 팥알처럼 생긴 알주머니가 터져 깨알 같은 새끼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목격하곤 했다. 아침결엔 세수를 하다가 옆 변기에 앉아있는 여동생 머리로 엄지손톱만 한 바퀴가 떨어져 생난리를 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후로 나는 바퀴벌레를 세상에서 가장 공포하는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어느 날은 자다가 불꽃이 파파박하는 소리에 놀라 잠옷에 맨발로 3층에서 뛰어내려온 적도 있었다. 다행히 큰 불은 아니었지만 불이 나면 이렇게 무섭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1층에서 3층으로 연결되는 전화기가 한대 있었다. 삐삐하고 벨소리가 울리면 엄마나 아빠가 1층에서 전달할 내용이 우리에게 배달되었다.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였고 차려놓은 밥을 먹었는지 아이들 끼리 잘 놀고 있는지 확인 수단으로 쓰였었다. 숱하게 전화기로 호출을 당하는 바람에 하루에도 몇 번이나 계단을 오르내렸는지 몰랐다.
하루는 1층에서 바로 밑에 여동생이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며 올라왔다. 엄마가 소주잔을 가지고 내려오라고 하였단다. 동생은 엄마가 꼭 나를 오라고 했다며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내려가 보니 엄마는 그런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다기에 여러 번 나를 이런 식으로 골탕 먹인 동생에게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언니, 실은 거짓말이었어!, 라고 웃으며 말하는 동생에게 무심코 옆에 있는 비닐봉지를 던졌다. 그런데 하필 서예 용품인 벼루가 들어있었던 것이 아닌가! 대박사건! 동생이 신음 소리를 내며 벽지를 타며 쓰러졌는데 피가 벽지에 쓱 묻어났다. 뒤통수가 터져버린 동생을 업고 엄마인지 아빠인지가 건너편 외과로 뛰었다.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집에서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너무 나쁜 짓을 해버린 나였지만 지금은 동생이 얘기한다. 자기가 장난이 좀 심했다며, 자신이 공부를 못한 건 다 언니 탓이라고. 지금에야 동생에게 깊은 위로를 전한다.
저 포니 자동차 위에 사 남매의 웃음처럼, 이 세모집에서의 나의 기억은 바퀴벌레를 빼면 모두가 아름답기만 하다. 우리를 살찌우고 기름이 번지르르하게 해 주었던 부모의 정육점도 지금은 그립고 그립다. 부모는 가끔 대판 싸우기는 했지만 젊었고 삶에 당당했다. 우리 사 남매를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며 그 시절을 살아내었다.
지금도 저 건물은 고향 한편에 자리하고 있지만 더 이상 우리 집이 아니다. 점점 기울어진 가세에 어느 날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차라리 건물이 허물어져버렸다면 마음이 편할 것을. 아직도 굳건히 세워져 있는 세모집은 나의 마음을, 이제는 다 커버린 사 남매의 마음을 서글프게 한다. 세모집에 부모가 쏟아낸 열정과 집에서 가장 넓었던 거실에 옹기종기 누워있었던 여섯 식구의 수많은 밤을 새겨본다. 더없이 콧등이 찡하게 그리워진다. 이젠 영원히 안녕, 나의 세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