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벌어들이긴 참 힘들다. 티끌모아 태산이란 말도 있듯이 세월이 페스츄리처럼 겹겹이 쌓여 돈 한 푼 두 푼이 종자돈이 되고 큰돈이 모이게 될 것이다. 우리 부모는 풀빵 장사를 시작으로 식당, 정육점, 옷가게, 슈퍼를 거쳐 돈을 좀 벌어들이고는 인삼재배, 식용견 키우기까지 수많은 장사와 소규모 사업을 했었다. 한때 부모는 제법 많은 재산을 가졌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고 나서 돈이 사라져 버리는 일은 하루 밤 자고 일어나는 순간처럼 아주 짧기만 했다.
우리 오빠가 죽고 난 한국이 낳은 희생의 대표주자 K장녀가 되었다. 어느 집의 장녀나 모두 K장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본인의 선택과 가족의 협심이 단단히 이루어져야만 비로소 K장녀로 탄생하게 된다. 장사를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나는 특히 엄마에게 항상 장녀로서의 역할에 대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살았다. 엄마가 둘째 딸이었지만 장녀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었을까. 엄마는 언제나 도리가 중했고, 내가 집안의 큰 딸로서 타의 모범이 되기를 바랐다. 나 또한 엄마 아빠의 자랑스러운 첫째 딸이고 싶었다. 타고난 것인지, 그렇게 자란 것인지 정확히 따질 순 없었지만 내 성격도 엄마처럼 도리를 중요시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중고등 시절에 정육점을 할 땐 종종 부모를 대신하여 고기를 팔았다. 부모가 침목 회에 부부동반으로 가거나 급한 볼일을 봐야 할 때 가게에 나가 앉았다. 집안에서 부모 빼고 제일 나이가 많은 내가 그 일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고기를 사 간다고 연락이 온 사람에게 포장해서 고기를 내주는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약속한 손님이 아니라면 냉장고 문을 덜컥 열고 들어가 알맞은 고깃덩어리를 꺼내오는 일부터 시작했다. 엄마 등 뒤로 배운 얄팍한 실력으로 칼질을 야무지게 하여 고기를 썰어 팔았다. 한 번은 꽤 고난도의 작업이 필요한, 갈비를 찾는 손님이 오셨다. 기계는 스위치를 켜면 아주 굉음을 내며 쇠톱이 빠른 속도로 뼈를 썰어준다. 능숙한 기계사용으로 자랑스레 갈비를 판매했다. 나는 어쩌면 뼛속부터 K장녀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우리 집 경제파탄의 길은 급경사처럼 아주 가파르게 찾아왔다. 세모집에 이어 시골에 5천 평이나 되는 땅을 사고 초원 위의 집처럼 또 다른 우리 집을 짓고 산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모든 것은 은행으로 빚으로 다 바스러지고 없었다. 세모집이 우리 손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아빠는 정육점을 그만두고 슈퍼를 시작하였다. 엄마는 내가 대학교 3학년을 마치자 신내림 굿을 받기 위해 집을 떠났다. 아빠는 매일 일기를 쓰며 떠나간 엄마를 그리워하고 툭하면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며 집안 살림까지 패대기칠 땐 언제고, 엄마를 그렇게 보고 싶어 하다니······. 당시 애증의 관계인 우리 부모를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억척스러운 살림꾼인 엄마가 떠나고 아빠는 사 남매를 데리고 살아야 했다. 그동안 늘 엄마의 장사 수단에 기대 산 아빠에게 무엇도 흥할만한 장사거리가 되지 못했다. 어떻게 슈퍼를 할 결심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대학 3학년 겨울방학을 끝으로 휴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고교생인 동생들도 돌봐줘야 하고 매일 술로 사는 아빠를 위해 잘 못하는 국이라도 끓여내야만 했다. 그리고 편의점은 아니었지만 밤새 슈퍼를 보는 아빠를 대신해 낮엔 슈퍼를 봐야 하는 슈퍼 가게 아가씨로 거듭나게 되었다.
아빠는 슈퍼의 이름을 함께 가게를 보기로 한 내 이름이 아니라 제일로 귀엽고 아끼는 막내딸의 별명을 갖다 붙였다. 빨간색 간판에 노란색 글씨로 '깐돌이 슈퍼'라고 이름이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며 왜 슈퍼를 보고 앉아있는 내 이름을 쓰지 않았는지 꽤 오랜 기간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였다.
슈퍼를 보는 일은 엄청난 노동력을 필요로 하진 않았다. 우선 아침에 나오면 간단하게 청소를 했다. 짝으로 쌓여있던, 푸른색 깡통에 '레쓰비'라고 써진 캔 커피를 마시며 하루가 시작되었다. 슈퍼를 보면서 원 없이 커피를 들이켤 수 있었던 건 참 좋았다. 물처럼 하루에 몇 깡통이고 마셔대며 마음속의 갈증까지 무마시켰다. 좁은 선반에 과자 대리점에서 빼곡히 쌓아놓은 색색 깔의 과자봉지를 손으로 훑었다. 초콜릿과 껌이 켜켜이 놓이고 샤니에서 가져온 진열대에 쌓인 빵들을 보고 있노라면 늘 달콤한 만족감이 들었다. 심심할 때마다 좁은 진열대 사이를 거닐며 골라먹었던 갖가지 간식들은 나의 헛헛함을 어느 정도 채워주기엔 충분했다.
겨울이면 호빵 찌는 기계가 들어왔고 결국 팔리지 않는 다 불어 터진 호빵은 내 차지가 되었다. 아빠가 나오기 전인 저녁나절에 홀로 카스며 오비맥주를 한 캔씩 뜯어 마셨다. 운이 좋은 날은 놀러 오는 친구들과 앉아서 조미 오징어나 새우깡을 하나 뜯어놓고 맥주 캔을 기울이기도 했다. 친구가 있으면 화장실에 갈 때도 문을 잠그지 않아서 편했다. 유일하게 틀어놓았던 자그마한 텔레비전 말고는 재밌을 게 없었던 슈퍼 가게 아가씨에게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재밌는 시간이었다.
사실 슈퍼가 불티나게 잘 된 것도 아닌데 귀가 얇은 아빠는 도매업자들이 와서 권하기만 하면 턱 하니 뽑기 기계 같은 것을 설치했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물건을 덜컥 받아 오랜 기간 팔리지 않았다. 아빠 마음에 쌓이는 걱정처럼 그것들 위에도 뽀얀 먼지가 쌓여갔다. 철제와 유리로 된 뽑기 기계를 밖에 내놓았다가 들여놓는 일도 내 차지였다. 스물세 살, 예뻐 보이고 싶어서 입었던 원피스에 목장갑을 끼고 무거운 기계를 들어다 놨다 힘쓰는 일도 나는 척척 참 잘 해내었다. 일용잡부처럼 고된 일이야 많이 없었지만은 여름이면 바지런히 파라솔과 의자 세트를 들어 날랐다. 맥주 캔이나 음료 캔이 냉장고 진열 칸에서 떨어지면 득달같이 으쌰하고 들어 올려 빈칸을 채워놓았다. 그렇게 나는 슈퍼 가게 아가씨의 일과에 익숙해져 갔다.
가세가 기울며 우리가 타던 차의 종류도 점점 등급이 내려갔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포니가 우리 집 첫 차였고 다음 차는 갤로퍼였다. 그러다가 누비라도 뽑았었는데 쫄딱 망한 후에 아빠가 중고로 산 차는 배달용 미니 트럭 라보와 하얀색 그레이스 봉고차였다.
나는 대학 입학 전 1종 보통면허를 취득했다. 그때 연습용 자동차가 그레이스 봉고차였다. 필기를 97점에 붙고 실기를 합격한 후 연습용 운전면허증을 받았다. 아빠를 옆에 태우고 그 봉고차를 시험 장소까지 몰고 가서 도로주행에 단번에 합격하는 영광을 안았다. 라보는 진짜 장난감을 타는 수준의 자동차이고, 그레이스 봉고는 이미 낡을 대로 낡아빠진 중고차여서 파워핸들도 아니었다. 핸들을 돌릴 때다마 어찌나 세게 돌려야 핸들이 돌아가던지. 나는 친구들을 픽업하기도 했고 정육점을 그만두었지만 고기를 대주고 있는 한 식당에 그레이스 봉고를 몰고 고기 배달도 수없이 다녔다. 소, 돼지를 화물차로 실어 나르던 엄마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꽤 억척스러운 처녀 가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어떤 날은 아빠 심부름으로 배달을 갔다가 인적이 드문 시골길의 다리에서 뒷바퀴가 허공으로 빠지고 말았다. 길을 잘못 들어 차를 돌리려다가 바퀴가 빠져버린 것이었다. 한참을 난감해하고 있는데 경운기를 몰고 가던 아저씨가 나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한 번은 시골에 사는 친구를 집에 데려다주고 나오는 길에 2차선 도로를 운전하고 있을 때였다. 앞에 있는 차가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으니 뒤를 따르던 택시가 추월을 위해 움찔움찔했다. 하지만 시골길이라도 반대방향의 차가 꽤 쌩쌩 마주 달려왔다. 그러다 기회를 보고 택시가 추월을 했는데 나는 바보같이 택시를 따라 가다가 정면으로 오는 차와 충돌을 할 뻔하였다. 20대 초반의 나는 그렇게 세상에 겁이 없었다. 어쩌면 꽤 쪽팔릴만한 일도 용기 있게 해내는, 그레이스 봉고를 탄 슈퍼 가게 아가씨였다.
과거를 돌이켜보거나 현재를 살다가도 나는 늘 부끄러움을 많이 느낀다. 하지만 부끄럽고 창피함을 넘어선 일이 살다 보면 세상엔 참으로 부지기수다. 그럴 땐 부끄럽다거나 창피하다는 말이 아무리 생각해도 모자라기만 한 표현 같다. 나는 서슴없이 쪽팔리다, 라는 말을 꺼내본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넘어서 굉장히 부끄럽고 창피할 땐 그만한 단어가 없는 것 같다. 너무나 찰떡같은 말이다. 쪽팔림. 우리 집안 얘기를 쓰다 보니 쪽팔림이 왜 이리도 많은 것일까. 부모가 못 배워서, 쫄딱 망해서, 어린 내가 고기를 썰어 팔아서, 엄마가 무당이 되어서, 꽃다운 나이에 슈퍼에 들어앉은 슈퍼 가게 아가씨가 되어야만 해서, 핸들이 빡빡하고 녹슬어 낡아빠진 그레이스 봉고를 타고 다녀서. 부끄럽고 창피하다고만 할 수 없는 그 쪽팔림의 행렬들.
수많은 쪽팔림 뒤에 늘 나의 뜨거운 눈물을 눕혔다. 어릴 적부터 울음이 많았던 나란 아이는 누가 툭 치기만 해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게 여렸다. 살기가 팍팍한 우리 부모는 무슨 일만 생기면 서럽게 우는 나를 뜨겁게 안아주거나 울어도 괜찮다며 위로해준 적은 없었다. 나보다 젊었던 그때의 부모, 따뜻한 사랑이라곤 받지 못하고 살았던 나의 부모는 아마도 잘 몰라서 그랬을 것이다. 너무나 위로받고 싶었던 힘든 내 어깨를, 내 등을 따뜻하게 토닥여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알만한 나이가 되었다. 내가 쪽팔림에도 불구하고 해왔던 모든 일들이 최선이었듯, 그들에겐 그것이 최선이었음을. 우리는 미숙한 것 같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