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호동 구옥舊屋의 힘

가난으로부터 온 기적

by 주부맥가이버

천호동은 오래된 도시의 모습을 보인다. 신도시의 쭉 뻗은 도로와 깔끔한 거리, 계획된 집짓기로 네모반듯한 동네와는 사뭇 다른 곳이다. 이곳에 꽤 오랜 기간 머물며 살았다. 친할머니가 계신 작은집에서 서울살이를 시작하였다. 번번이 좌절되는 면접에서 단번에 합격된 직장을 다니기 위해 고향에서 부랴부랴 올라왔다.


천호동 할머니 댁의 문간방에 짐을 풀었다. 오래된 상가아파트는 로데오 거리의 복잡함과 화려함 가운데 자리했다. 출근길에 나서면 골목골목 꽉 들어찬 식당과 술집이 줄을 섰다. 아침나절에도 소주를 까며 밥 먹는 이들을 종종 보곤 했다. 살아있는 것 같지만 뭔가 번잡스러웠다. 해가 내려앉기 무섭게 네온사인이 번쩍였다. 길엔 담배꽁초와 쓰레기가 난무하여 다소 격이 떨어지는 곳이었다.


그러다가 신을 받고 고향에서 법당을 하던 엄마가 서울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금싸라기 서울 땅에서 없는 집이 세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더구나 엄마가 법당을 차리는 것을 허락하는 집주인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번에도 격이 있는 것과는 동떨어진 자양동 시장 골목 상가건물 2층에 월세 집을 구하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엄마는 영빨이 꽤 좋았고 젊고 날씬한 아줌마였기에 돈벌이가 꽤 괜찮았다. 그러나 매달 백만 원에 육박하는 월세를 감당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법당을 차릴 수만 있는 곳이라면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해도 세를 얻어야 하는 것이 돈 없는 무당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자양동 집은 꽤 깔끔하고 널찍했다. 제일 큰 방은 엄마의 법당이 차지했고 작은방 두 개를 여동생들과 내가 사용하였다. 법당으로 늘 큰방을 내줘야 하는 무당 엄마는 거실이 자신의 방이자 침실이 되었다. 엄마의 돈벌이가 좋아도, 내가 돈을 벌어도 서울에서 살림을 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린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더 허름하고, 집을 보고 온 동생 표현에 의하면 귀신이 나올 것 같다는 집으로 이사를 갈 수밖에 없었다. 천호동 구옥舊屋에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었다.

구옥은 오래전 파이롯트 만년필 공장이 있었다 하여 파이롯트 공원이라 불리는 공원 근처에 있었다. 길가에는 실내 포장마차나 작은 순댓국집 같은 것들이 쓰러져가는 오래된 건물들 속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나마 낡아빠지지 않은 건물에 들어선 건 모텔들뿐이었다. 새것을 보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다. 다 오래되고 늙고 후진 것들만 자리하고 있었다.

길을 좀 걷다 보면 차 한 대가 지나가고 옆에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는 작은 골목이 보였다. 미로처럼 생긴 골목으로 수십 걸음만 들어가면 있는 끝집이 바로 그 구옥이었다. 몇 십 년이 되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집을 둘러싼 빨간 벽돌은 제 색을 잃을 정도로 낡아빠졌다. 철로 된 녹슨 대문도 잠금장치 따위 고장 나 버린 지 오래된 집이었다. 2층으로 된 양옥집은 반지하 같은 두 아랫집에 한집은 부부와 아들들이 세 들어 살았다. 다른 한집엔 인상이 고약한 여자 하나가 세 들어 살고 있었다. 누가 누가 더 가난한가, 뽐내기라도 하는 듯한 분위기의 셋집들이었다. 반지하 같은 1층이 아닌 널찍한 2층 전체에 세를 사는 우리가 그나마 덜 가난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가난은 표현하지 않아도 그냥 스며져 나오는 체취 같았다. 셋집을 사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무겁게 존재하고 있었다.

법당을 하려면 장구와 징을 두드려야 한다. 남의 소원을 빌어주기 위해선 요란뻑적지근하게 풍악을 울려줘야 그것이 이루지는 법인가 보다.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의 사람이 낮엔 일터로 나갔다. 법당을 하며 울리는 소리는 이웃들의 큰 불만을 사지 않고 잘 지나가는 날들이 많았다. 하지만 고약한 이웃을 잘 못 만나면 시끄럽다는 항의를 받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어떤 방법을 쓰든지 간에 그들을 구워삶았다. 법당 일을 할 때마다 나오는 떡이며 전이며 갖은 종류의 과일로 그들의 입막음을 하곤 하였다. 때때로 그런 음식을 나르는 일이 나와 동생들의 몫이 되었는데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법당을 할 수 있는 셋집이기에 엄마에게나 같이 살고 있는 우리에게나 참 고마운 곳이었다. 하지만 심각하게 낡은 이 집의 문제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하이샤시가 아닌 나무틀로 이루어진 창이 다 비틀어져서 문이 잘 열리고 닫히지 않았다. 그 틈새에서 새어 들어오는 겨울의 외풍은 흡사 밖에서 자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였다. 이불을 아무리 뒤집어써도 이불 밖으로 내놓은 코를 시리게 만들었다. 주방엔 창도 하나 없어 늘 많은 음식을 지지고 볶으면 쾌쾌한 연기가 부엌에서 뿜어져 나왔다. 겨울에 손이며 코가 시리듯이 여름엔 죽음의 더위와 맞서야 하는 곳이었다. 골목 속에 푹 들어가 있어 맞바람은커녕 실바람도 잘 불어들지 않았다. 아무리 창문을 열어젖혀도 바람 따위가 들어올 리 없었다. 자다가 흐르는 땀에 연신 선풍기를 틀어대도 금방 땀범벅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 견딜 수 없으면 화장실에 들어가 찬물을 끼얹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었다.


내가 쓰고 있는 방에 비가 오면 창틀로부터 물이 배어 나왔다. 그 주변으로 땅따먹기 하듯 곰팡이가 번지고 있었다. 첨에 들어가선 도배를 해놓은 상태였지만 숨어있던 곰팡이가 점점 그 영역을 넓혀갔다. 한쪽 벽엔 다락이 있었는데 문을 열면 꽤 너른 다락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왠지 오싹해서 열지도 들어가 보지도 않았다. 문제는 다락문의 틈이었다. 특히 여름날에 자다 보면 뭔가 바스락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나서 의아해했는데 그것은 왕바퀴가 틈을 기어 다니는 소리였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바퀴벌레를 죽도록 혐오하는 나는 바퀴가 호환마마나 귀신보다도 무서웠다. 투명 스카치테이프로 다락문 틈을 다 붙여버려서 속이 다 시원했다. 세상에, 그 틈으로 바동거리는 바퀴벌레가 때론 보이기도 하여 (심지어 출근 준비를 하는 이른 아침에도) 끔찍한 날도 너무 많았다. 하지만 막힌 테이프를 미물인 바퀴가 뚫을 리는 만무했다. 스카치테이프가 인류 최고의 발명품 인양 새삼 놀랍고 고맙게 여겨졌다.

그 집의 월세 65만 원은 평생 잊지 못할 숫자가 되었다. 늙은 할아버지 주인이 월세를 주는 날에서 하루만 늦어도 전화를 하거나 찾아와 싫은 소리를 하였다. 엄마는 한 번도 주눅 드는 일이 없이 왜 준다는데 전화하고 찾아오냐, 며 되레 큰소리를 치곤했었다. 엄마 돈벌이가 시원찮은 달엔 내 월급으로 월세를 내기도 했다. 알량한 월급에서 65만 원이란 숫자를 빼곤 늘 쓸 돈은 모자랐다.

법당이 깔끔해야 손님도 많은 법인데 엄마의 법당은 너무 낡아 후졌고 간판 하나 걸어 올릴 곳도, 흔한 홍보물을 부착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그저 키가 큰 몇 미터짜리 대나무에 빨간 깃발을 휘날리게 한 것이 법당을 알리는 딱 하나의 징표가 되었다.


이 집에 살며 여름엔 많이 틀지도 않는 에어컨 때문에 전기세가 많이 나왔다. 겨울엔 보일러를 연신 가동해도 외풍과 함께 손과 코가 시렸다. 가스세는 한 달에 몇 십만 원을 훌쩍 넘기기가 일쑤였다. 진짜 가난하면 이래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인가. 돈을 벌기도 전에 무섭게 이미 나갈 곳을 찾아서 우리 집을 떠나갔다. 돈을 아껴 쓰고 열심히 벌어야 부자가 아니라 가난을 면할 수 있는데 가난은 자꾸자꾸 돈을 더 쓰게 만드는 신기한 재주가 있었다.


가난은 자꾸 펼쳐내고 꼿꼿해야 할 나의 어깨와 가슴을 움츠려 들게 만들었다.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들이 집을 데려다준다고 할 때마다 참으로 난감했다. 아파트에 살아야 아파트 이름도 대고 할 텐데. 그렇다고 집주소를 불러줄 수도 없었다. 난 늘 천호동 파이롯트 공원 앞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였다. 우리 집은 공원이 아니었지만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다고 해서 나의 가난이 절대 감추어질 리는 없었다. 동네 분위기로나 파이롯트 공원의 분위기로나 궁색함은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아도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옛말처럼 재채기와 가난은 절대 숨겨지지 않았다. 모든 남자들은 귀신같이 그걸 눈치 채고 말았다.


이 집에서 추억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엄마는 법당으로 돈을 벌었고, 서울 하늘 아래 발 뻗고 잘 수 있는 집이 있기에 나는 직장생활을 열심히 할 수 있었다. 볕이 좋은 날엔 어수선한 마당이긴 해도 가운데 놓인 툇마루에서 식구들끼리 삼겹살 파티도 즐겼다. 젊은이보단 노인들이 많았던 파이롯트 공원에서 늘 산책을 하고 운동을 하였다. 동네가 오래되긴 했어도 공원 조성은 참 예쁘고 알차게 해 놓은 곳이었다. 또한 한강공원도 가까워서 늘 한달음에 달려가 운동도 하고 동생들과 돗자리 펼쳐놓고 치킨을 뜯으며 깡 맥주를 기울였다.


다른 남자들에게 보여주지 못했던 낡은 집에 처음 남편을 데려갔다. 우리 첫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들은 날, 무작정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한 짜릿한 관계 몇 개월 만에 우리에게 큰애가 생겼다. 쪽팔림이고 뭐고 간에 나는 아기를 낳을 결심을 했다. 꽤나 가난했고 엄마가 무당이었지만 신기하게도 큰 탈 없이 지금의 남편과 결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돈이 없이 시작한 우리는 돈을 더 모으기 위해 그 집에서 엄마와 1년 반을 함께 살았다. 삼 개월의 출산휴가를 마치고 일을 나가면 애기를 봐줄 사람이 없었기에 엄마는 법당 일을 보며 아기를 돌보는 일까지 함께 하는 할머니가 되었다. 그렇게 덥고 추운 집에서 키우게 되어 큰 아이에게 미안했다. 무당일만도 힘겨운 엄마에게 또 다른 짐을 지운 것 같았다. 태어난 아기에게 아기가 지낼 공간도 모두 새것이고 깨끗한 것으로 해주고 싶은 것이 엄마의 마음이다. 모든 것이 세련되고 깔끔하고 새것 같았던 조리원에서 구질구질한 골목을 지나 아무것도 새것이라곤 없는 곰팡이 핀 내방으로 큰 아이를 데려와 눕혔다. 아이는 기억을 못 하겠지만 생애 첫 공간이 깨끗하지 않아서 엄마가 너무 미안하다고, 속으로 속으로 아기에게 많이 말해주었다. 우리 큰 아이는 기적 같은 아이다. 나에게 찾아와 지금의 남편과 결혼할 수 있게 해줬다. 천호동 구옥에서 큰 탈 없이 할머니와 잘 자라준 것에 감사했다.


나는 언제나 힘들 때면, 좌절할 때면, 지칠 때면, 휘달릴 때면 이 천호동 구옥舊屋을 떠올린다.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그때의 삶을 떠올리면 여기가 천국이고 궁궐임을 깨닫는다. 어떻게 그런 집에 살다가 서울 하늘 아래 깨끗한 나의 집에 살게 되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천호동 구옥이 나에게 계속 살아갈 힘을 주었다는 것이다. 일상에 무료 해질 때쯤,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며 부러움에 배가 아파올 때쯤, 구옥은 나에게 기적같이 기운을 불어넣는다. 거기에서 살아냈던 너를 뒤돌아보라고. 견뎌냈던 너를 떠올려보라고. 빛바랜 모든 존재가 나를 따스하게 에워싼다.



대문사진 © Karinamannott,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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