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가깝고도 먼

살아간다는 것과 죽는 것

by 주부맥가이버

나는 시체를 두 번 본 적이 있다. 엄밀히 말해 확실히 죽은 시체를 육안으로 본 것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절명 직전의 송장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가진 죽음의 공포는 그저 하늘의 구름처럼 허공에 떠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주검을 마주한 순간, 죽음은 철저하게 이름과 상반되는 날것과 같았다.


천호동 구옥에서 살던 때였다. 새벽 2시인가. 엄마의 핸드폰 전화벨이 울렸다. 잠귀가 밝은 나는 부스스 눈을 떴다. 전화기 너머 소리를 듣자마자 엄마는 소리를 지르며 오열했다. 엄마의 우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핸드폰으로 전해 들은 소식에 깊은 밤처럼 나는 그저 침묵했다.


나의 부모는 첫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아이가 세발자전거를 막 타기 시작한 네 살 때였다. 신동이라던 오빠가 허망하게 죽으며 졸지에 나는 장녀가 되었다. 맏딸로서의 삶이 팍팍할 때마다 오빠를 원망하곤 했다. 내가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엄마는 오빠를 떠나보내고 어떻게 우리 사 남매를 낳고 길렀을까, 섧고 애달픈 세월이었다. 열 달의 순탄치 않은 임신 과정과 출산의 고통을 겪어보니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첫아들을 낳고 꼬박 서너 해를 키우고 나서야 상상조차 힘든 자식의 죽음을 가늠해 보았다.


언젠가 엄마는 죽은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낸 적이 있었다. 가히 충격이었다.


우리 부모는 몸이 다 부서져버린 첫아들의 무덤조차 만들어 줄 수 없었다. 엄마는 3년을 미친 사람처럼 살았노라고 회상하였다. 가루가 된 아이를 바람에 날려 보내고, 아빠는 뜨거운 콩나물국에 밥을 말아 욱여넣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어떻게 밥알이 목구멍으로 넘어갔을까,라고 말하던 엄마도 세월이 흘러 끼니를 때우며 아이를 갖게 되었다. 딸 셋에 기어이 원하던 아들을 막내로 얻었다.


아빠는 장남이었다. 차남인 작은 아빠는 아들과 딸 하나씩을 두었다. 나이가 고만고만한 우리들은 곧잘 만났다. 그 새벽 전화 한 통이 울려 퍼졌던 전날 밤에도 동생들은 어울려 저녁을 먹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늦은 시간까지 술을 먹고 각자 헤어졌는데, 사촌 남동생에게 사단이 난 것이었다. 추석이 이틀 뒤였다. 전화기 너머의 소식은 녀석의 죽음이었다.


엄마와 나는 병원 응급실로 내달렸다. 스물다섯 살, 장성한 아들을 잃은 부모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순간 첫아들을 잃었던 엄마를 눈으로 더듬었다. 누구보다 단장斷腸의 비애를 잘 알고 있었을 엄마, 그녀는 주저앉아 제 가슴만을 내려치고 있었다. 절절한 먹먹함이 나에게도 다가와 어느새 눈물이 차올라 떨어졌다.


하늘은 참으로 무심했다. 우리집과 작은집의 아들 하나씩을 그곳으로 데려갔다. 소리 없이 흐느꼈던 엄마의 울음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마치 그 옛적 죽은 아들에 대한 감정이 이제야 봇물처럼 터진 듯했다.


하얀 천이 사촌동생의 목까지 소복하게 덮여 있었다. 얼굴만 내놓은 동생의 표정은 이상하리만큼 편안해 보였다. 살면서 누구도 당장 1초 후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 예상하진 않는다. 녀석도 그런 끔찍한 상상은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죽음을 예견할 수 있었다면 녀석은 마지막 인사라도 남겼을까? 사촌동생을 내려다보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작은 엄마는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우두커니 넋을 놓고 서있었다. 작은 아빠는 떼를 쓰는 아이마냥 바닥에 앉아 땅을 내려쳤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통곡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사는 것이 지옥같이 힘들고 가난해도 작은 아빠의 유머감각 하나만큼은 늘 최고였다. 항상 얼굴엔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그득 담겨있었다. 덩치도 크고 키가 조금 더 큰 작은엄마를 먹여 살리기 참 힘들다며 종종 농담을 하던 그였다.


명절 때 할머니 집에 모이면 장롱 위에서 큰 교자상을 꺼내는 것은 늘 작은 엄마 아빠 담당이었다. 으레 덩치가 큰 작은엄마가 엎드리면 작은 아빠가 그 등에 올라타 상을 끌어내렸다.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족들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두 사람이 연출하던 재밌는 장면은 이제 기억 저편으로 영원히 사라져 갔다.


사촌 동생은 오토바이 뒷좌석에 몸을 싣고 가다가 추락했다. 평소 오토바이를 타지 않던 녀석이었다. 애꿎게도 죽은 동생이 누워있는 침대 맞은편에 오토바이 운전자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깨어있었다. 사고 경위를 들어보니 커브를 돌면서 속도를 줄이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중심을 잃으며 오토바이가 내동댕이쳐졌다. 핸들을 잡고 있던 운전자가 다친 곳은 대충 훑어봐도 팔 한 곳뿐인 것처럼 보였다.


잡을 것이 없었던 사촌 동생은 하늘에 맞닿을 듯 떠올랐을 것이다. 결국 날아올라 가로수에 얼굴을 처박았다고 했다. 왼쪽 이마와 눈두덩이 사이가 약간 함몰되어 있었다. 단지 얼굴엔 작은 상처 하나뿐인데, 왜 녀석은 숨을 쉬지 않는 것일까.


녀석의 정확한 사인은 과다출혈이었다. 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얬고 입은 굳게 앙 다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같은 오토바이에 앉아있었는데 한 사람은 살고 다른 이는 목숨 줄이 끊겼다. 가혹한 운명이었다.


작은집에게 매해 추석은, 이젠 명절이 아니라 지옥 같은 기억의 날들일 것이다. 그날이 어김없이 해매다 돌아온다는 것이 내 마음까지 저릿저릿하게 만들었다.


병원 침대에 누워있던 사촌동생이 내가 처음 목도한 죽음이었다. 마지막 선물처럼 동생의 주검은 가지런하고 깨끗했다. 슬프도록 평화로워 보였다.


죽은 송장이나 다름없었던 주검의 기억은 막내 이모였다.


오랜만에 이모가 천호동 우리 집에 찾아왔을 때, 평소보다 더할 나위 없이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보랏빛이 도는 핑크색 투피스 정장을 입고 온 이모는 촌스럽기 짝이 없었다. 친척 결혼식을 위해 걸친 어색한 옷의 가짜 보석이 유난히 빛나 보였다. 재회의 기쁨도 잠시, 이날 엄마는 다시 눈물을 쏟아냈다. 막내 이모는 위암 말기였다. 그저 소화가 안 된다며 약만 달고 살았다고 했다. 이모 등짝을 내리치며 엄마는 목메어 울었다. 또다시 먼저 떠나간 오빠가 떠올랐다.


이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에 입원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다. 곧 출산을 앞둔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이모를 찾아갔다. 이모의 몸은 거의 살가죽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배엔 복수가 차서 뼈만 남은 몸 위로 봉긋하게 솟아올라있었다. 병원에선 더 이상 해줄 게 없다고 했다. 그런 이모의 몸에선 고약한 고린내가 났다. 돌봐줄 이 하나 없는 이모의 병상은 말할 수 없이 초라했다. 엄마는 혼자 일어서기도 버거운 이모를 부축해서, 머리를 감겨주고 샤워를 시켜주었다.


TV에서 나오던 배우들의 암환자 연기가 정말 비현실적이라고 느낀 건 뼈만 앙상한 이모 때문이었다. 천정을 응시하는 초점 없는 눈동자가 애처로웠다. 작은 얼굴이 툭 튀어나온 광대로 가득 차 보였다. 목이 마르다던 이모에게 캔 식혜 하나를 따 빨대를 꽂아 주었다. 이모는 몇 모금을 힘껏 빨더니 그마저도 힘든지 이내 손사래를 쳤다.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워 보였다. 병원 침대는 죽어가는 이의 남은 시간을 알고 있을 것이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며칠이 남아있게 될지, 몇 시간이 주어질지 계산하면서. 그 사물이 마치 이모의 시간의 거의 다 되었다고 일러 주는 것 같았다.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내 뱃속에선 태어날 아기가 세차게 발을 구르고 있었고, 잦아드는 성냥 불빛 같은 이모는 침대 아래로 아래로 계속 꺼져 들어가는 듯했다. 이렇듯 삶과 죽음은 내게 너무 가깝고도 먼, 파도의 썰물과 밀물처럼 밀려왔다 밀려가고 있었다.


* 대문사진 © Hans,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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