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복한 사람들 같으니

가난한 젊은 남녀가 있었다

by 주부맥가이버

남(男)



우리 아빠는 자신이 거의 고아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갖고 살았던 것 같았다. 이북에서 내려온 아버지(얼굴도 모르지만 나에겐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부터 앓아누웠고 어머니(나에게는 역시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는 아빠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들 둘의 홀아비인 할아버지는 새 할머니를 맞이하였다. 몸도 안 좋다고 들었는데 새 할머니가 들어오고 내리 아들과 딸을 하나씩 더 두었다. 아빠와는 배가 다른 나의 삼촌과 고모이다. 그것 참 대단한 대물림이고 번식력이었다.


한참을 보았던 나의 친할머니가 새 할머니라는 사실은 중고등 시절에 들어서 알게 되었다. 듣고 나니 아빠가 자신을 왜 고아라고 생각했는지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병상의 아버지까지 돌아가시고 어린 시절부터 아빠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아빠는 성실과 건강을 좌우명으로 사는 사람이다. 젊은 시절엔 성실을 더 강조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건강을 매우 강조하며 살고 있다. 그렇게 건강, 건강, 건강밖에 모르는 우리 아빠를 보면서 너무 자기만 챙긴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유를 알게 되고선 아빠에게 더 이상 아무 말할 수가 없었다. 본인이 일찍 죽으면 자기처럼 아이들이 고아가 된다는 마음에 자신은 건강한 사람이고 싶었다는 것이다. 너무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다음부터는 세계 최고의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아빠에게 깊이 공감해주었다.


아빠가 언젠가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어린 시절 아픈 아버지가 자신을 수도 없이 주물러달라고 해서 많이 힘들었노라고. 아마도 그때의 아빠는 아버지가 아파서 힘들다기보다 자신의 팔이 아파서 많이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멈추란 말도 안 하면 얼마나 오래도록 주물렀을까.

그러한 아버지조차 돌아가시고 새어머니와의 삶은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어려운 시절 새어머니는 과일 좌판으로 생계를 이끌어갔다. 곱디고운 과일은 자신의 친자식에게는 내주었으나 우리 아빠와 작은아빠에겐 주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먹을 것이 넘치는 지금 생각해보면 애달프고 치사한 세월이었다. 그간 할머니에게 잘한 세월이 후회될 정도였다. 내가 보아도 인생을 망친 거나 다름없게 사는 고모와 삼촌을 학교에 보내려고 그렇게 쫓아다니셨단다. 아버지는 일찌감치 집을 나와 살았다. 공부를 제법 잘했던 우리 아버지에겐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계모는 계모일 수밖에.


아빠는 배우지도 못하고 돈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갔을까. 서러운 세월을 나는 알 길이 없다. 우리 아빠는 철저하게 고독했을 것이다. 가족 간의 사랑이란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왜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조차 못하고 살았을 것이 분명했다.



여(女)



대개 관상학적으로 여자가 광대와 입이 툭 튀어나오면 운명이 사납고 남자를 먹여 살릴 팔자라는 소리가 있다. 우리 엄마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면 딱 그것과 들어맞다. 실제 살아온 삶을 봐도 운수 사나운 여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엄마는 육 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큰 이모가 정신이 온전치 못하기에 맏딸 노릇을 자처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아빠와 비교해서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만큼 박복하기 짝이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고생, 고생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보통 무당은 대물림을 한다는 얘기가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엄마의 고모도 무당이었다. 나도 한두 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얼굴이 고약하고 매섭게 생긴 양반이었다. 목소리는 배우 윤여정 씨가 울고 갈 만큼 걸걸하기 짝이 없었다. 엄마는 집이 너무 없이 살아서 고모 댁으로 식모살이를 갔다. 비만에 음식물 쓰레기가 난무하는 지금 세상에서, 못 먹고 자랐다는 얘기는 머나먼 아프리카 소말리아를 연상시켰다. 그때의 엄마는 먹을 것이 없었단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육 남매와 생활고로 시달린 외할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엄마를 보냈을 것이다. 매정한 고모는 밥도 잘 안 주며 세찬 식모살이를 시켰다고 했다. 나는 고모할머니를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엄마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고모 대접을 해드렸다. 쩨쩨한 세월이 있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감히 나는 가늠해볼 수 없는 엄마의 힘듦이었다.


엄마의 아버지(나에게 외할아버지)는 전쟁 통에 돌아가셨고 빚만 잔뜩 남기셨다고 했다. 내가 유일하게 살아계신 모습(결국 유년 시절의 나를 업고 있는 사진에 불과하지만)을 알고 있는 외할머니가 육 남매를 데리고 어찌 살았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육 남매 중 유일한 아들자식은 병으로 죽었다. 딸만 다섯이 남았고 가장 억척스러웠던 우리 엄마가 결혼하고는 외할머니를 모셨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외할머니를 모셔다 또 육아노동을 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늘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우리 부모에겐 든든한 육아 지원군이 필요했으므로. 무당처럼 노동도 대물림이 되는 모양이다.


엄마도 이렇게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안 해본 일이 없었을 게다. 버스 안내양을 했다던 엄마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본다. 엄마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건대 사막 한가운데 벌거벗겨 놓아도 살아남을 사람이었다. 우리 엄마는 그렇게 팔자가 세고 못하는 게 없는 박운한 여자였다.



박복하기 짝이 없는 두 사람이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자주 싸운 세월을 돌이켜보면 부모가 서로 얼마나 사랑했을까 궁금해지곤 했다. 그러나 없는 살림을 일구어 사 남매를 번듯이 키워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체 이런 것이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 기적인가 묻고 싶어진다.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젊고 고왔을 엄마는 죽은 오빠를 업고 풀빵 장사를 했다. 추운 겨울 등에 매달린 아이와 함께 손수레를 끌고 장삿길에 나섰을 것이다.

아빠는 외삼촌댁이 서울우유보급소를 했기에 거기서 우유 배달을 했다. 풀빵 장사를 하는 엄마가 뻔히 보이는데도 엄마를 모른 척 지나쳤다고 한다. 아빠도 나만큼 풀빵 장사가 쪽팔렸던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 젊고 고운 엄마를 그냥 지나쳐간 것은 천벌을 받을 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빠의 노년은 초라하고 외롭기 짝이 없다. 남자는 여자에게 잘해야 늙어서 밥이라도 얻어먹는다는 걸 젊은 시절에는 깨닫지 못하며 산다.


힘겹게 젊은 시절을 보냈던 부모가 때로는 부끄러웠다. 배운 게 없고 가난해서 늘 갖가지 장사를 했던 그들의 직업을 어디엔가 쓸 때. 도대체 왜 부모의 학력이 필요했는지 도통 알 길이 없지만 하얀 종이에 부모의 학력을 표시할 때. 국졸이라고 표시할 수밖에 없었을 나와 중졸이라고 살짝 올려서 쓸까 고민했던 내가 있었다. 아무리 박복하다한들 이들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지금 방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는 귀하디귀한 내 아이들도 만나지 못했음에 틀림없다.


남과 여는 나의 부모, 나의 근간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