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연, 지연보다 더 강한 연을 호주에서 만나다

호주인과 동병상련

by 윤슬

서울 태생인 나는 지방 출신 친구들이 부러워질 때가 있었다. 대학에서나 직장에서, 그들 곁에는 자신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챙겨주는 동향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향우회’라는 이름으로 묶인 사람들 사이에는 내가 가져본 적 없는 남다른 끈끈함이 엿보였다. 낯선 환경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선배가 있다는 건 얼마나 든든한 일일까,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다녔던 회사엔 사내 동문회가 있긴 했지만, '학연'에 대한 주위 시선을 의식하여 모임조차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1년에 두세 차례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동네에 모여 식사를 하고, 결혼이나 장례처럼 큰일이 있을 때 회비를 모아 전해주는 것으로 역할을 다했다. 걔 중 꽤 활발한 동문회를 자랑하는 곳도 있었지만 우리 학교의 경우는 미지근 착잡했다.


학연, 지연, 혈연을 타파해야 할 관행으로 배웠기 때문에, '삼 연'에서 비롯되는'백' 하나 없는 내 처지가 특별히 아쉽진 않았다. 다만, 그들이 서로에게 기댈 벽이 되어주는 모습이 부러웠을 뿐이다.


호주에 와서 내겐 '삼 연'보다 더 강하고 특별한 연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드니에서 머문 숙소는 호스트의 집에서 방 한 개와 화장실 한 개를 쓰는 형태였다. 아침에 호스트를 만나면, 인사를 나누고 당일 일정에 대해 잡담을 나누었다. 호스트와 게스트 사이에 오갈만한 가벼운 주제의 대화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우리의 대화는 평소보다 조금 길어졌고, 길어진 만큼 이야기는 깊어졌다.


"호주는 휴가차 왔나요?"

"네, 맞아요. 그런데 좀 긴 휴가예요."

"얼마나 길게요?"

"호주에서는 한 달이요. 사실 저흰 2년째 여행 중이에요."


여기까지 말씀드리자 호스트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호주 다음에는 어디로 갈 계획인지, 결혼한 지는 얼마나 되었는지, 아이는 있는지, 한국에 돌아가면 무엇을 할 예정인지 질문이 이어졌다.


몇 가지에 먼저 답했다. 결혼한 지는 14년이 넘었고, 아이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여행도 좋지만 이제는 아이를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결혼한 두 아들과의 관계가 매우 좋았고, 현재 베이비시터로 손주들을 봐주며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살고 계셨다. 그렇기에 아이가 없는 우리 부부의 삶이 의아하셨을 수도, 걱정스러울 수도 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어느 정도까지 드러내야 할까 망설이다가, 사실대로 말씀드리기로 했다. 만약 한국어로 대화했다면, 질문자가 민망해지지 않도록 배려하되 에둘러 말하며 대답을 회피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예의를 갖추면서 대답을 얼버무리기엔 내 영어 화술이 세련되지 못해, 차라리 진실을 말하는 편이 나았다.

"제가 아이를 가질 수 없었어요. 많이 아팠었거든요."


그녀는 이내 눈꺼풀 끝에 걱정을 매달아 눈꼬리를 떨구며, 어디가 아팠으며 지금은 어떤지 물으셨다. 그리고 본인도 25년 전에 암을 앓았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들으니, 더 숨길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앓았던 병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릇을 정리하던 그녀의 손이 갑자기 멈추었다.

"뭐? 나도 같은 암이었어요."

그녀는 손에 묻은 물기를 급하게 닦고선 내 곁으로 다가오셨다.

"많이 힘들었겠네... 더 이상 치료 부작용은 없나요?"


난,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처럼 팔 소매를 걷어올리며, 아직 몸에 남아있는 병의 흔적들을 그녀 앞에 드러냈다.

"이식 부작용으로 7년간 많이 힘들었어요. 피부엔 화상을 입은 것 같은 자국이 여럿 남았고, 손톱은 이처럼 기형이 되어버렸어요."


깨지고 찢어지고 뒤틀린 내 손톱을 바라보던 그녀는, 내 손을 끌어당겨 손톱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어 주셨다. 그러고 나를 꼭 안아주었다. 말보다 진한 위로에,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나 역시 그녀의 등을 가만히 도닥였다.

'의학이 덜 발전했던 그 시절... 아주머니 정말 정말 고생 많으셨겠네요. 이젠 아프지 말고 건강하세요.'


그 시점부터 우리의 관계는 바뀌었다. 호스트-게스트에서 갑자기 전우가 되었다. 우리 두 사람 눈이 마주칠 때면 그녀는 밝게 외쳤다.

"우린 이겨냈어. 알지? 우린 승리자야."

나는 두 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만세' 자세를 취했다. 별 것 아닌 우스꽝스러운 몸짓 하나에 아주머니와 난 눈물이 찔끔 나도록 웃어댔다. 웃음과 눈물이 뒤섞인, 이상하지만 따뜻한 순간이었다.


그녀는 변덕스러운 호주 날씨에 내가 감기라도 걸릴까 봐 걱정하시고, 투어를 다녀오면 피곤하진 않은지 내 안색부터 살피셨다. 필요하면 욕조에 물을 받고 목욕을 하라 권하고, 잘 먹어야 한다면서 호주 특산품을 알려주시기도 했다. 40대가 되어도, 누군가에게서 보살핌을 받는다는 사실은 엄청난 심적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낯선 곳에서 약간 긴장했던 마음이 그녀 덕분에 포근하게 풀어졌다.


내겐 학연, 지연, 혈연이라 부를 만한 것은 딱히 없지만, 그 어떤 연(緣) 보다 끈끈한 동병상련(同病相憐) 이 있다는 사실을 호주에 와서 깨달았다. 언어와 생김새가 다른 이들을 단숨에 전우로 만들어 주는 연이니, 이야말로 연 중의 연이라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나도 누군가와 서로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벽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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