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이 겹쳤던 멜버른에서의 5일

by 윤슬

멜버른에 도착한 것은 11월 말이었다.


10월에 시드니로 입국하여 5일을 보낸 뒤, 브리즈번으로 이동하여 20일을 지냈다. 호주의 날씨와 문화, 여유와 자연 등 모든 게 마음에 들어 문득 옆 나라도 가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예정에 없던 뉴질랜드로 넘어가 11월을 보냈다(다음 연재작인 '11월의 오클랜드' 편도 기대해 주세요~^^).


12월의 여행 후보지 몇 곳을 고민하던 중, 어디를 가더라도 뉴질랜드에서 출국하는 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메리카 대륙 쪽으로 가지 않는 한, 오클랜드 출발 비행 편은 이동시간이 길고 항공료는 비쌌다. 호주로 들어갔다가 나가는 게 여러모로 나았다. 그래서 우린 10월에 못 갔던 멜버른을 찍고, 다음 국가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땐, 멜버른에서의 5일이 불운의 연속이 될 줄 미처 몰랐다.


날씨가 안 도와주네


우리나라와 계절이 반대인 호주의 12월은 여름이라, 멜버른도 더울 거라 예상했다. 시드니보다 남극에 더 가까우니 조금은 덜 덥겠지 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11월 말에서 12월 초의 멜버른은 제법 쌀쌀했다. 비바람이 불면, 긴 팔 옷 몇 개를 껴입어도 금세 손이 차가워질 정도로 추웠다.


운이 좋으면 펭귄을 볼 수 있다는 세인트 킬다 비치에 갔지만, 펭귄은 못 보고 바람에 밀려 하늘의 연처럼 떠 다니는 새들만 보고 돌아왔다. 그곳의 바람이 어찌나 세었는지 머리가 아플 지경이라 5분도 머물기 힘들었다.

멜버른에서 머무는 내내 흐린 하늘과 잔비가 이어지더니, 우리가 떠나는 날 얄밉게도 하늘이 쨍하고 맑아졌다. 밝은 멜버른은 공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본 30분이 전부였다.


나와 안 맞는 공유 숙소


멜버른의 숙소는 방 3개, 화장실 3개가 딸린 주택이었다. 우리 외에 두 팀의 게스트와 집을 공유하는 형태였다. 잘 맞는 사람들을 만나 맛집을 함께 가거나 여행을 같이 해도 좋겠다는 기대가 있었다. 20대 시절, 유럽 여행 중 호스텔에서 만난 인연들과 재미난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숙소에 도착해 공동 공간인 부엌 겸 거실에 들어섰는데, 한 20대 한국 여성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금연인 숙소에서, 본인 방에 딸린 테라스에서도 아니고 공동 실내 공간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우다니. 도착하자마자 앞으로의 시간이 걱정스러워졌다.

며칠 후에는 아이와 함께 멜버른 한 달 살기 중이라는 중국인 엄마가 늦은 밤에 세탁을 시작했다. 방음이 거의 되지 않는 집이라, 세탁실과 부엌 바로 위에 있던 우리 방에서는 1층의 소리가 무척 잘 들렸다. 자정이 다 되었을 때 즈음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멈추었다. 이젠 잘 수 있겠구나 했는데, 이번엔 건조기를 돌리는 모양이었다. 옷의 단추인지 쇠 부분인지 모를 것이 건조기 내부에 부딪히며 '따악, 따악, 따악' 규칙적인 소리를 냈다. 세탁기 소리와는 비교가 안되게 크고 거슬리는 소음이었다. '따악' 소리는 새벽 1시가 넘도록 계속되었다.


공용 공간의 뒷정리는 게스트 모두의 책임인만큼, 누구도 본인의 의무라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식사를 하기 위해, 나는 더러운 가스레인지와 싱크대를 닦고, 덜 씻긴 그릇들을 꺼내 다시 설거지했다. 남편은 공동 쓰레기를 혼자서 열심히 갖다 버렸다.


더 이상 공유 숙소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투어는 취소되고


멜버른에 도착한 뒤, 사촌동생이 강력 추천한 '그레이트 오션로드 투어'를 예약했다.

투어 전날 밤까지도 업체에서 아무 연락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예약 사이트를 몇 번이나 들락날락거렸다. 그러다 그날 늦은 오후에 보내온 모바일 메시지를 뒤늦게 확인했다.

투어 취소 안내 문자였다.


뭐가 이래. 멜버른에선 되는 게 없네.


그래도 행복한 순간은 있었다


멜버른 오기 전부터 사진을 보고 반해 꼭 가고 싶었던 곳이 있었다. 바로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이다.

여행을 시작하고서, 머무는 곳마다 도서관을 방문하고 있다. 다른 이들이 카페를 찾는 심정으로,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나는 도서관을 찾는다. 책 냄새가 좋고, 조용한 공간이 편하고, 책을 읽거나 일에 몰두한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다워 나는 도서관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국내와 해외에서 가 본 도서관 중 멜버른의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은 단연 최고였다.

호그와트 마법학교를 연상케 하는 그곳에 들어서는데, 기분 좋게 가슴이 뛰었다.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에 앉아 브런치에 올릴 글을 쓰고, 고치던 시간이 참으로 행복했다.

사진 속 공간에 현실의 내가 들어갔다.

멜버른에서의 5일은 실망스러운 일들이 겹치며 마음까지 처졌던 시간이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 그래서 멜버른 여행이 불행하기만 했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그렇진 않다.


날씨는 얄궂었고, 숙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투어는 갑작스레 취소되었지만 분명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다. 도서관에서의 시간이 그랬고, 동네 Coles 슈퍼의 견과류 코너에서 팔던 마카다미아 초콜릿은 인생 초콜릿이라 부를 만큼 맛있었다. 시내 트램이 무료라 교통비가 들지 않는 것도 좋았고, 유럽을 떠올리게 하는 고풍스러운 건물이 가득한 멜버른 시내 거리는 아름다웠다.


그런데 당시엔 그렇게 기분이 가라앉았던 걸까?

사람들은 행복엔 이내 익숙해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스트레스 상황은 곱씹으며 오래 붙잡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훨씬 더 많은 좋은 일들이 있는데도 행복보다 불행을 더 크게 느끼는 같다.

'사람들은'이라는 주어를 앞세워 살짝 숨으려고 했지만 사실 내 이야기이다.


앞으로 멜버른을 떠올릴 때면,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에서의 시간에 집중해보려 한다.

좋았던 것을 되뇌다 보면 힘들었던 일은 점차 옅어질 거라 믿는다.

늘 그래왔듯, 작은 행복 하나가 여러 불운을 이겨먹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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