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3주 살이 중 깨달은 한 가지 사실
2년 동안 국내와 해외에서 장기 여행을 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어떤 것은 그 안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다가 밖으로 나와야 또렷해진다. 반대로 어떤 것은 밖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안으로 들어가야만 비로소 보인다.
앞선 글에도 썼듯이, 내게 뉴질랜드는 하나의 국가라기보다는 지상낙원에 가까운 이름이었다. '뉴질랜드'라는 네 글자는 바다와 숲, 깨끗한 공기와 물을 생각나게 했다. 잔디밭 위를 맨발로 뛰노는 아이들이 까르르 웃는 장면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하지만 오클랜드에서 만난 한국인 이민자들, 그리고 두 곳의 에어비앤비 숙소 호스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이곳 역시 내가 살던 곳과 마찬가지로 거주민에겐 치열한 삶의 터전이었다.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세상에서 사는 듯한 그들도 우리네와 비슷한 고민과 걱정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오클랜드 거리를 걷다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슈퍼마켓 계산대 직원은 동양인이고, 카페의 바리스타는 남미에서 왔다고 하였고, 버스 기사는 인도 출신이었다. 이곳에는 마오리족과 영국계 백인뿐 아니라 사모아와 통가 같은 태평양 섬나라 사람들, 중국과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계 이민자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뒤섞여 산다.
처음 오클랜드 시내에 나갔을 때, 나는 ‘이렇게까지 이민자가 많다고?' 생각하며 놀랐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나 부모, 혹은 조부모 세대에 다른 나라에서 건너왔다고 한다. 조금 먼저 이곳에 정착한 이들 중에는 계속 밀려드는 이민자 때문에 불편함이나 불안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익숙해질 만하면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 사회 문화와 분위기가 빠르게 바뀌기 때문이다.
이민으로 시작해 이민으로 확장되고 있는 나라, 뉴질랜드는 여전히 ‘진행형 이민 국가’처럼 느껴졌다.
오클랜드의 평일 낮, 카페에는 노부부가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고, 해변 산책로에는 머리가 하얀 사람들이 천천히 걷거나 벤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은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젊은이들은 일자리 때문에 호주로 많이 떠났어요.”
뉴질랜드보다 경제 규모가 큰 호주로 건너가 더 많은 기회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 영향으로 현재 거주민은 은퇴 후 여유로운 삶을 보내는 노년층의 비율이 높다고 한다. 또한 65세 이상을 위한 복지는 꽤 좋은 편이었다. 한국대비 넉넉한 노령연금과 교통수단 무료 이용은 물론, 일정 지역에선 매주 화요일 슈퍼마켓 이용 시 반값 혜택까지 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이 나라의 분위기에는 어딘가 느긋하고 천천히 흐르는 시간이 배어 있다. 처음엔 그 여유가 부러웠지만, 한편으론 ‘젊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미래를 그리기는 쉽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행자로서는 '물가가 조금 비싸다' 정도로 느꼈던 것이, 현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오클랜드에서 만난 한 이민자는 집값이 몇 년 사이 크게 올라 젊은 세대가 집을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했다. 어떤 이는 뉴질랜드 경제 사정이 좋지 않다며, 자산을 호주 달러나 미국 달러로 바꾸어 놓을 거라 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뉴질랜드는 자연은 풍요로운데 산업은 많지 않다”며 경제 구조에 대한 걱정을 털어놓았다.
관광과 농축산업, 낙농업이 중요한 나라이다 보니 세계 경제 상황이나 기후 변화에도 민감하다고 한다. 아름다운 자연이 이 나라의 큰 자산이지만, 동시에 자연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제 구조가 고민거리라는 이야기였다.
여행자에게는 평화롭고 여유로운 풍경이지만, 보이는 것과 달리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현실적인 고민을 던져주는 셈이었다.
롱베이 숙소의 호스트는 이집트에서 이민 온 가족이었다.
이민 계기를 조심스럽게 묻자, 아저씨는 회상에 잠긴 듯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다 내가 뉴질랜드 이민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치안이 좋고 교육 수준이 높다면 그냥 한국에서 사셔요. 모국만큼 좋은 곳은 없답니다."
나의 의도를 조금 오해하신 것 같았지만, 나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겉으로 보기에 '저 사람은 무슨 걱정이 있겠나?' 싶은 사람들이 있다. 장기 여행 중인 우리 부부 역시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다 드러낼 수 없는 고민과 아픔이 있고, 어떤 가정이든 말 못 할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국가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한두 달씩 여행했던 어느 나라에서건 문제가 없는 곳은 없었다.
뉴질랜드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 알지 못하고, 어차피 다 알 수도 없는 타인의 삶을 질투하거나 부러워할 필요가 없듯이, 타국을 막연히 동경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여행 1년 9개월 차. 드디어 나는 계속 여행을 하는 것도 좋지만,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도 좋을 것 같은 지점까지 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