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도항 배를 타기 전, 당시 '거제도 맛집'으로 검색하면 가장 많이 나오던 식당을 가기로 했다. 인기 맛집답게 그곳은 매우 북적거렸고, 우리 일행은 기다림 끝에 자리를 배치받았다. 식당의 시그니처 메뉴였던 멍게비빔밥을 주문하였는데, 생전 처음 먹어본 고소 짭짤 바다향 비빔밥이 어찌 그리 맛있던지.
외도를 돌아보고 나오는 길, 우리는 저녁식사를 위해 점심때와 같은 식당을 재방문하였고 나는 이번에도 멍게비빔밥을 주문하였다. 먹어봐야 할 게 많은 여행지에서 하루에 두 번이나 같은 장소, 같은 메뉴를 주문하는 경우가 흔하지 않은데, 오죽 맛있었으면 그러했겠는가.
서울로 돌아와서 몇 번 멍게비빔밥을 시도하였지만 거제에서 먹었던 맛이 아니었다.
이번에 거제도 한달살기를 시작하며 가보고 싶은 곳 1순위는 당연 17년 전 그 식당이었다. 긴 세월덕에 가게 상호명이 머릿속에서 흐릿해졌지만 기억을 쥐어 짜내어 인터넷에서 검색하였다. 없어진 건 아니겠지 조마조마했다.
인내심을 발휘한 끝에 마침내 식당을 찾아냈을 땐 작게 환호성을 질렀다. 있다, 아직 있다!
10월의 첫날, 그곳을 다시 찾았다. 예전과 다르게 식당 안은 한산했다. 볼 것도 없이 멍게비빔밥을 주문했고, 비빔밥을 입에 넣기 전 냄새부터 맡았다. 맞다, 그때 그 냄새다!
기대감이 고조된 채 야무지게 밥을 비벼 한술 한술 넘기는데, 음...... 나쁘지는 않지만 하루에 두 번 먹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다. 17년이란 시간 동안 잊지 못할 맛은 더더욱 아니란 생각이 드니 난데없이 배신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당황스러웠다. 바뀐 건 음식인지, 나인지. 아무래도 후자일 확률이 높지 싶다.
그랬던 경험이 처음은 아니다.
대학시절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매달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돈이 넉넉지는 않았기에 교환학생으로 유학했던 1년은 인생 최대로 아끼며 살았던 시간이었다. 조금이라도 저렴하게 파는 슈퍼를 찾아 2리터 물 6병을 낑낑대며 30분 거리를 나르는 등 돈을 아낄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절약하며 살았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 번은 나를 위해 작은 선물을 주고 싶었다. 매주 일요일, 노란빛 조명으로 고급짐을 한 스푼 얹었던 식당에서 평소 같으면 엄두도 못 냈을 가격을 지불하고 감베로니 파니니(새우 샌드위치)를 사 먹곤 했다. 스탠딩 테이블에 서서(테이블에 앉으면 차림비가 따로 붙었다.) 음료도 없이 먹던 파니니가 22살짜리 유학생이 누렸던 사치였고, 즐거움이었다.
파니니를 한입 베어 물고 오물오물 씹다 보면 '와, 이건 천상의 맛이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일요일의 새우 샌드위치는 지난 한 주간 타국에서의 외로움을 채워주었고, 영어도 이태리어도 서툰 데에서 오는 자격지심을 씻어주었다. 그것은 음식이라기보다는 위로였고 채움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난 이탈리아를 몹시 그리워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여름휴가를 쓸 수 있게 되었을 때, 첫 휴가지로 망설임 없이 밀라노를 선택하였다. 대학생 여동생을 데리고 이탈리아로 떠나며, 동생에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샌드위치를 먹여주겠다고 큰 소리를 뻥뻥 쳤다. 밀라노에 도착하여 그 가게를 찾아갔다. 샌드위치 2~3개를 고르고 처음으로 음료까지 곁들여 테이블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테이블에 앉아 먹은 감베로니 파니니는, 목이 막히는 것쯤은 꾹꾹 눌러가며 음료도 없이 서서 먹던 3년 전 그 맛이 아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거기 다시 가지 말걸 그랬다. 그랬다면, 내게 밀라노의 파니니는 여전히 천상의 맛으로 남았을 텐데.'
식당을 나오며 남편은 내게 눈웃음을 지었다. "어땠어?" 물음에 "아무래도 내가 여보랑 살면서 맛있는 걸 너무 많이 먹었나 봐." 웃으며 답했다.
좋은 기억이 시간이 지나며 머리에서 한 번, 가슴에서 또 한 번 미화를 거쳐 추억으로 저장되었던 것 같다. 그러니 추억은 실제보다 아름답게 과장되었을 것이다. 기억에서 추억으로 가는 과정에서 왜곡을 덜 했다 하더라도, 나의 상황과 취향이 변했기 때문에 같은 대상에 대한 느낌과 감상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못 잊는 음식이든지, 인생 여행지든지, 아련한 첫사랑이든지간에 소중한 과거는 그냥 그대로 두자. 가장 예쁘게 보이는 필터를 끼운 채 고이 간직하면 좋았을 추억을 들쑤셔 날려버리면 너무아깝지 아니한가. 아주아주 가끔,고등학생 시절 순수하고 예쁘게 만났던 그 친구는 어디서 어떻게 사나 궁금해질 때가 있는데, 아휴 아서라. 행여 우연히라도 그를 마주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나의 현재이자 미래인 남편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앞으로는 멍게비빔밥을 떠올리거나 찾을 일이 없을 것 같다.
끝까지 상호명이 생각나지 않거나 검색이 안되어 안 갔더라면 좋았을 걸.그랬으면 멍게비빔밥은 내 평생 유일하게 하루에 두 끼를 연달아 먹을 정도로 맛있는 음식으로 남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