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거제도 한 달 살기를 끝내고, 10월 여행지에 대한 우리의 결정은 '거제 한 달 더!'였다.
옥포동을 떠나 15분 거리의 지세포리로 숙소를 옮겼다. 지세포는 나의 외할머니께서 태어나고 유년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당신께서 고향을 떠난 지 80년이 지난 지금, 그곳에서 살고 있는 손녀딸이'나의 외할머니'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오늘은, 할머니를 마음껏 기리는 것이 마땅한, 그녀의 기일이기도 하니까.
과거 한 시점을 생생히 불러오는 음악이 있듯 한때의 추억을 들추어내는 음식이 있다. 생선구이가 내겐 그러하다. 생선을 먹을 때 내가 습관적으로 껍질을 벗겨내면, 남편은 “껍질도 맛있따~.”하며, 나의 외할머니 성대모사를한다. 생선 한 토막으로 5년 전 에피소드가 떠올라 남편과 함께 웃다가 끝에는 씁쓸함이 남는다.
외할머니를 떠올리는 마지막 음식이 적어도 생선구이여서는 안 되었는데.
누군가 내게 첫사랑이 누구냐고 물어온다면, 인생에서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질문한다면 나는 같은 분을 떠올릴 테다. 외할머니다.
할머니는 교편생활을 하셨던 엄마를 대신하여 10년간 큰 사랑으로 나를 키워주셨다. 기억 속에 할머니는 내 엉덩이 한번 때린 적이 없었고, 소리를 지르거나 무서운 눈으로 어린아이를 제압한 적도 없었다. 가끔 내가 떼를 피울 때는 끌어안고 등을 어르시며, 온갖 예쁜 형용사를 끌어다가 "세상에서 제일 ○○한 우리 △△이~" 라며 기분을 풀어주시곤 했다. 어린 시절 나는 밖에서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좋았다. 할머니는 게임을 통해 숫자와 한글, 한자를 알려주셨고 집에서 미술대회, 체육대회, 인형극 놀이 등을 열어주셨다. 할머니는 내게 엄마였고, 친구였고, 스승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음이 무너질 때마다 할머니를 찾았다. 남자친구와 헤어졌을 때, 직장에서 괴로울 때,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님 때문에 속상할 때 할머니를 찾아 마음을 쏟아내곤 하였다. 그럴 때면 할머니는 나를 끌어안고 등을 어르시며 온갖 지혜로운 말들로 도닥여 주셨다. 어린 시절 그때처럼.
한바탕 하소연을 하고 할머니 위로로 구멍 난 마음을 채운 후, 김치와 소고기가 들어간 순두부찌개, 액젓을 넣어 깊은 맛이 나는 나물 반찬, 달걀물을 입힌 서대구이 등 할머니표 집밥 한 그릇을 먹고 나면 서울로 돌아와 또 살아갈 힘을 얻었다. 나를 믿는 내 편이 어딘가 있다는 사실이 가슴 펴고 당당하되, 신중하고 책임감 있는 성인으로 살아가게이끌었다.
할머니께서 여든을 넘기며 치매가 찾아왔다. 여느 날처럼 설레어하며 할머니댁 대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할머니는 엉거주춤 일어나 꾸벅 인사를 하셨다. “어떻게 오셨어예?” 물기 어린 눈에 따뜻함을 가득 담았던 눈빛 대신 낯설고 멍한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셨다.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그 후 인생 후반의 당연한 수순인 듯 할머니는 요양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2019년 늦가을, 할머니를 뵈러 요양병원에 갔다. 점심시간이라 식사가 나왔는데 식사의 질이 형편없어 화가 날 지경이었다. 옆에 분 식사보다도 현저히 반찬이 없어 담당자에게 여쭈어보니 우리 할머니는 당뇨식으로 제공되어 그렇단다. ‘그래도 밥이 이게 뭐야, 살면 얼마나 사신다고. 맛있는 거라도 실컷 드시게 해 드리지.’ 마음이 불편해 서울 가는 차편을 연기하였다. 저녁 식사 전, 인근 식당에서 구운 생선 한 마리를 포장해 왔다.
김이 나는 생선살을 큼직하게 떼어 할머니 밥 위에 얹어드리자, 할머니는 맛있다고 하시며 좋아하셨다. 살만 드리고 싶어 생선껍질을 벗겨 한쪽으로 치우니 “껍질도 맛있따~.” 하시며 숟가락을 들이미셨다. 맛있게 드시는 모습에 마음이 풀려 서둘러 서울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할머니, 다음에 맛있는 것 사서 올게요. 곧 올게, 우리 또 만나~.”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2020년, 전염병의 공포가 전 세계를 휘감으며, 요양병원은 의지가 있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대면이 불가하여 유리 벽을 사이에 두고 얼굴을 보며 전화기로 안부를 여쭈어야 했다. 손 한번 잡아드리고 싶어도 접촉이 불가했고, 내미는 숟가락 위로 생선 조각을 얹어드리는 일은 그림의 떡이었다.
감사하다고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전해야 할 말이 많은데 팬데믹이라는 거대한 벽에 막혀 튕겨졌다. 가족들이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가운데 할머니는 어떻게 지내실까, 요양병원의 열악했던 식사가 떠올라 속상해 눈물이 나곤 했다.
팬데믹이 끝나기 전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지키지 못했던 약속들만 내 가슴속에 남은 채로.
할머니와 함께 살던 어릴 적, “할머니, 뭐가 제일 갖고 싶어요?” 물었고 “내는 분수대가 있는 집에서 살고 싶었다.” 대답에, "내가 이다음에 어른되면 분수대 있는 집 사 드릴게요." 선언했다. 그때는 어른이 되면 사고 싶은 것을 다 살 수 있는 줄 알았다.
학창 시절 내 일기장엔 작은 포부가 자주 등장한다. 나중에 성인이 되면 진주로 내려가 할머니와 함께 살겠노라고. 10대 때는 성인이 되면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마지막 약속은 요양병원을 나서며 했던 다음에 맛있는 것 사서 곧 오겠다는 말이었다. 철없던 시절의 포부야 그러려니 하는데, 잘난 '맛있는 것' 약속마저 지키지 못했다니......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일상으로 돌아와, ‘다음에’, ‘나중에’ 따위의 부사가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가로 생각이 옮겨갔다. 과연 나중과 다음은 오기나 하는 미래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의무감 없는 ‘다음’을 약속하는가. 내 안에는 얼마나 많은 ‘나중’을 붙인 소망이 있을까. 20대 때에는 마흔이 넘은 지금이 다음이고 나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약 없는 단어는 그 시기가 도래하여도 또다시 같은 말을 반복하며 미루게 만든다. 마치 인생이 무한하다고 착각이라도 하듯이.
다음과 나중은 오지 않을 미래일 수 있으니 보장되지 않은 미래보다는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살라는 메시지가 할머니께서 내게 남긴 마지막 지혜라 생각하고 가슴에 담았다.
오늘 할머니의 제사를 앞두고, 이모는 조카들에게 생전에 할머니께서 좋아하셨던 음식을 하나씩 준비해오라는 미션을 주셨다. 생선 구이를 제일 먼저 떠올리긴 했지만 그것은 이모가 준비하신다고 하여 나는 애플망고를 주문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요양병원 비대면 접촉 규칙이 느슨해졌던 때에 이모가 깎아간 애플망고를 씹지도 않고 삼키며 더 달라하셨다던 이야기를 뒤늦게 듣고 목이 메었던 기억에서다.
며칠 전 미리 사둔 애플망고가 후숙이 잘 되어 근처에 가니 단내가 난다. 걔 중 제일 큰 녀석들로 골라 담아 한 박스를 만든다. 망고를 천천히 씹어 삼키시며 "거 참~달다." 하시는 할머니의 미소 띤 얼굴을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