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작가님의 내 마음 한 구석을 꼬집는 점이 있는 소설 "밝은 밤"
공감, [대상을 알고 이해하거나, 대상이 느끼는 상황 또는 기분을 비슷하게 경험하는 심적 현상을 말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말과 같이 최은영 작가님의 책은 저에게 많은 공감을 일으킵니다. 주인공과 저의 상황이 사뭇 닮아 있어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 읽으면서 울었고 힘들어서 책을 덮기도 했으며 가끔은 책 읽기를 포기할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공감을 많이 했지만 살아온 삶이 다르다면 아마 공감할 수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다른 이의 시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이기에 추천합니다.
이 책은 많은 감정과 사정이 있습니다. 각자의 사정 그로 인한 행동 그로 인한 다른 이의 아픔. 이것이 꼬이고 꼬여 지연에게까지 내려왔죠.
제가 가장 기억나는 문단은 "엄마의 고통 앞에서 나의 진실은 가치가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엄마의 불행에 나의 불행을 견줄 수 없었다." 엄마도 엄마의 사정이 있었기에 나를 챙겨주지 못했고 나는 그에 대해 상처를 받죠. 가장 기억이 나는 이유는 아마 한국의 많은 장녀들이 이런 일을 겪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상처를 이야기해도 어머니는 내 탓이라고 하시거나 아니면 울어버리고는 하시죠. 바라는 것은 그게 아닙니다. 네가 그때 많이 속상했구나. 하는 공감의 말과 때로는 사과이죠. 최은영작가는 이런 식으로 정말 내 앞에 있는 듯한 상황을 꼬집어 소설에 녹여냅니다. 그렇게 저는 애써 무시할 수 있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파내어 보게 도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내 삶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나는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소설이었다고 생각되어 추천드립니다.
이하는 제가 "밝은 밤"을 읽으며 중간중간 잊지 않기 위해 쓴 글입니다.
읽는 동안 저와 비슷한 생각이 드셨을지도, 아니면 다른 생각이 들으셨을지도 모릅니다.
어느 관점이든 책을 소화하는 과정은 모두가 다르니, 저 또한 독자님들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이혼을 해도 결혼과 이혼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딸인 '나'보다 남자인 서방을 더 걱정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보다 살짝, 혹은 그 이상 밖에 있는 사람을 걱정하는가. 내 옆에 있는 내 딸이 가장 걱정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힘들지는 않았는지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했다.
'나'는 어릴 적 할머니가 살던 희령의 천문대로 이직했다. 이직한 '나'는 리어카를 모는 멋쟁이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말한다. 오래 못 본 딸 이름은 미선이고 손녀의 이름은 지연이예요. '나'는 알아차렸다. 내 할머니구나. 지연은 할머니와 같은 곳에 살았다 지연은 5층, 할머니는 10층. 가깝고도 어색하게 먼 곳이었다. 어릴 때 보고 서른이 넘어서야 만난 할머니는 어색했다. 하지만 다정했다. 할머니는 혼자 사는 법을 터득하신 듯했다. 문득 난 이 상황을 보며 지연이 혼자 사는 걸 걱정한 엄마 미선이 생각났다. 오랫동안 의절한 딸과 어머니. 미선과 할머니. 그래서 미선은 몰랐던 것 일 수도 있다. 혼자 사는 방법에 대해 말이다. 할머니는 놉(농사일 돕기)에 가기도 하고 노인정에 가기도 했다. 책을 좋아했지만 눈이 나빠져 TV를 보기에도 힘들었다. 그래서 지연은 집에 있는 TV를 가져다 할머니 집에 놓았다. 할머니는 다짜고짜 내 손녀라며 치대지 않으셨다 존댓말도하 셨고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지키며, 하지만 번호를 용기 내어 받으셨고 또 다른 용기를 내어 제 손녀를 집에 초대까지 했다. 지연은 초대받은 날 케이크와 와인을 챙겼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반찬과 국 냄새를 맡았다. 할머니는 평소보다 세팅된 머리와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손녀가 오는 것을 기대하고 있던 것이다. 할머니에게 지연은 아마 십여 년 만에 찾아온 가족이고 손녀이고 딸의 잔재 일 것이다. 할머니의 기대 속 둘은 옛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지연이 결혼을 했던 사실, 하지만 이혼을 했다는 것까지. 할머니는 그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잘했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무언가를 알고 계셔서 잘했다고 한 것일까? 아니다. 평생을 거의 못 본 손주의 삶을 알 수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손주를 믿지는 않았을까? 내 손주라면 본인의 문제로 이혼 '당한'것은 아니리라 믿은 것은 아니셨을까? 할머니는 할머니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내용에는 군인들이 젊고 어린 여자를 좋은 일자리를 준다며 데려가려는 내용이 나왔다. 일제강점기였다. 이로써 증조모는 1910~1945년 사이, 혹은 그 조금 전에 태어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끌려갈 뻔 한 증조모를 증조부가 구했다 하였다. 백정의 딸이던 증조모와 천주의 신자던 양민 증조부의 로맨스.
여기까지만 보면 희극일지 모르겠다.
증조부는 자기가 잘난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모든 걸 두고 증조모와 함께 개성에 올라오니 알게 된 것이다. 아 나는 별 볼일 없는 사내구나. 그러고 나선 그 화를 증조모에게 씌웠다는 것 같다(딱 여기까지 읽었다.) 백정의 딸을 양민으로 만들어줬는데 '감히' 나를 존경하거나 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이 남자는 어느 순간부터 여자를 아내가 아닌 자신의 아랫사람으로 본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어이가 없는 생각이다.
- 밝은 밤 70p까지 읽고
새비아주머니와 새비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이에는 지연과 전남편의 이혼이야기도 있었다. 떠나보내는 것은 슬프다. 새비아저씨는 집이 너무 가난해 어쩔 수 없이 일을 하러 일본에 홀로 떠나갔다. 그리고 1945년 8월에 히로시마에 있었다. 원자폭탄이 터졌단 이야기에 새비아주머니도 증조부모 모두 오열했지만 새비아저씨는 멀지 않은 시간 내에 나타났다. 떠난 줄 알았으나 떠난 게 아니었다.
분명 그때 만해도 새비아주머니는 행복했을 것이다.
다시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히로시마에 있었다는 건 피복당했단 이야기였다 새비아저씨는 폐병 비슷한 것을 앓고 피부가 붉게 벗겨졌다. 결국엔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자식과 와이프를 데리고 고향인 새비로 돌아갔다. 새비아주머니와 증조모는 서로의 버팀목으로 둘 도 없는 친구사이이다. 새비아주머니가 증조모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있었다.
남은 편지에 처음에는 그래도 밝음이 남아있었다. 이리 아프긴 하지만 희자아버지(새비아저씨) 돌아와서 다행이다.라고 적혀있었다. 다음 편지는 아니었다. 이렇게 괴로운 걸 보고 싶지 않다고 그랬다 새비아저씨는 득실한 천주신자였지만 일본에서 돌아온 후 성당에 나간 적이 없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느 이유에서건 일본인이건 중국인이건 한국인이건 이렇게 무자비하게 죽어서는 안 됐는데 천주님께선 왜 이걸 손 놓고 보셨는가, 이다. 덕분에 새비아저씨는 손수 천주교식의 장례를 받지 않겠다는 유언이 적힌 종이를 남기고 돌아가셨다고 했다.
난 지금까지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결론만을 생각했다. 바로 어제와 같은, 8월 15일의 광복. 광복은 한국을 살렸지만 서도 한국인 또한 죽였다. 어떤 이든 무참히 죽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말하는 모든 이를 사랑하고 아끼던 새비아저씨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상상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런 새비아저씨를 병간호하며 바라보는 새비아주머니의 심정 또한 이해할 수 없다. 중간에 지연과 전남편의 이야기가 나온다. 최종 법정에서 지연은 남편의 손을 잡고 싶었으며 안아보고 싶었으며, 그 전의 울던 날은 잊었는지 다 용서했으니 같이 돌아가자고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정'이란, '가장 가까운 사람'이란 무엇일까. 무엇이길래 이리도 두고 싶으면서 멀어질까 두려워 두지 못하는 것일까?
- 밝은 밤 130p까지 읽고
줄곧 새비아주머니와 증조부모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엔 주요 화자인 할머니와 지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지연은 우주를 전공으로 하는 사람으로 집에서 한 번 할머니와 망원경으로 행성을 관찰하기도 했었다. 지연은 자신을 다그치는 사람이다. 그리고 아주 약하지만 강한 사람이다.
강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회초리를 쳐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약하기 때문에 몸을 사리며 엄마와의 관계를 파탄 나지 않게 조심히 지속한다.
처음 정신과 약을 먹는 걸 들켰을 때 지연이 들은 말은 아찔하다.
'실망' '무턱대고' 약을 먹는 건 '옳지 않다' '끊어라'
.. 그렇다 난 아마 지연과 나를 작게 비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 어쩌다 정신과에 다닌다는 걸 들키고 나서 엄마는 내게 무엇이라 이야기하였더라?... 끊을 수 있으면 끊어봐 좋은 약 아니잖아.라고 했다. 마약도 아닌 약에 왜 '안 좋은 약'이 있는가. 그럴 리가 없다.
이건 편견이다. 편견이 날 옥죄어왔다 사정이 있는 건 알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 마치 내가 사적인 일 때문에 실수한 것처럼 들린다. 지연은 이 말을 들었었고 난 이 말을 사회생활 관련으로 들었었다. 일이 있었고 약은 새로 받았고 심지어 편도가 안 좋아 약을 겹쳐먹었더니 졸음이 쏟아져와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엎드려 자고는 했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회사 어른들이 날 안 좋게 본다는 말이었다. 어째서? 내 개인시간을 사용한 건데 그들은 날 안 좋게 보고 혹은 사정을 알고 안쓰럽게, 또는 신기하게 보았다. 그것이 나에게, 지연에게는 상처였다 사건에 내 '공'을 흔들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건 '그런 사건이 있던 나'에 관한 시선이다. 여기다 정신과약까지 먹는 게 알려진다면 더욱더 나는 안쓰러운 사람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지연의 어머니는 나름의 혁명을 일으켜 친구를 따라 멕시코에 한 달간 지내다 돌아왔다. 많은 물건을 사 오고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다 지연은 약을 다시 먹는다는 걸 들켰고 그때 둘은 갈라졌다. 엄마는 말한다 그 사건을 겪고서도 너도 잘 키우고 잘 살았어.라고.
나와 지연은 생각했을 것이다.
"왜?"
.. 난 그저 도움(약)을 약간 받았을 뿐이다. 근데 그것이 질타받을 일인가?
어릴 적의 지연이 이렇게 회상하는 장면이 있다
"엄마의 고통 앞에서 나의 진실은 가치가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엄마의 불행에 나의 불행을 견줄 수 없었다." "계속 거짓말을 했다 괜찮다고. 잘 지내고 있다고...- -... 마음속으로 울고 있을 때도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엄마는 첫째 딸을 잃었지만 지연 또한 언니를 잃은 것을 잊은 듯 행동하고 말했다. 자신이 가장 힘든 사람이었고 만약 여기에 내가 말을 하더라도 내가 아닌 자신이 죽을년이었을 것이다. '그래 나 때문에 네가.'.. 들어본 적 있는가? 난 그저 어렸을 때 그런 일이 있었다고 술기운에 말했을 뿐인데 우리 엄마는 자책을 했다. 우리 아빠 또한 내 손톱을 물어뜯는 것, 쉽게 의지하지 않는 것 그 외의 모든 것에 자신의 탓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들을 원망해야 하는가. 그러기를 정말 바라는 걸까? 알 수가 없다.
점점 책이 아닌 책과 나를 혼동하는 듯한 생각을 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새비아주머니는 아이를 데리고 사흘을 증조모의 집에 있다가 대구의 고모댁으로 떠났고 이내 나라는 국민을 상대로 '사상범'을 찾는다 하였고 이어진 무참한 총살에 증조모네 또한 걷고 걸어 서울의 부모님 댁으로 내려왔으나 이미 허물어진 집이었다. 다시 걸어 하루의 한 끼 밖에 못 먹어가며 내려간 대구에선 새비아주머니와 딸, 그리고 그녀의 고모가 기다리고 있었다. 살만한 생활이었다고 한다.
여기서부터는 증조모보다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듣던 것이 아닌 직접 하던 것이니 더 그렇겠지. 할머니는 사상범을 찾느냐 총살당하는 사람들을 직접 보았다고 했다. 일렬로 서 한 명씩 조사당하고 가끔은 탕, 소리가 이어졌다. 그때 이후로 자신과 가족들은 조금씩 망가졌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특히나 증조모는 더 심했다고 한다. 믿지 못하고 누구든 자신을 해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되어 아마 불안에 떨며 공황이 왔던 게 아닐까 싶다.
한국전쟁이 가까운 것은 당장 우리 할머니 또한 전쟁의 끝자락에 태어났기에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잔혹함은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을 어린, 아주 어린 할머니는 겪었다.
분명 어딘가 어긋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제 아이에게 잘 못한 걸까 그래서 둘은 제대로 만나지 못하는 사이가 된 걸까 뒤에 나오겠지만 궁금함에 의해 상상력이 폭발하곤 한다. 이른 나이에 아이를 낳아 모정을 못 느낀 걸까 본인의 정신이 힘드니 치근거리는 갓난아기를 돌볼 정신이 없던 건 아닐까 그 아이가 자랄 때도 아직 할머니는 다 자라지 못한 '아이'였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 밝은 밤 202p까지 읽고
모두 다 읽었다. 한참의 기간을 두고 읽어서 내가 조금 더 이입이 덜 했을 수도 있지만 한 마디로 표현하면 조금은 허망했다. 엄마와의 관계는 나아지지 않았고 과연 죽은 정연은 그들에게 어떻게 남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것 또한 작가님의 뜻이겠지만) 허무하다. 희령에 살던 지연은 대전으로 가고 그걸 할머니는 반겨준다 그리고 카카오톡도 배우셨다고 했다. 사진을 주고받는 손녀와 할머니. 이건... 좋았다. 적어도 둘의 인연은 계속 이어지니까. 희자에게 메일을 보내놓고는 차마 할머니에게 전하지 못했던 것과 답장을 은 후의 지연의 심정은 기뻐서 할머니에게 달려가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제목을 보자마자 심장이 벅차올랐을 것이다 무슨 내용이 있을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등 말이다. 책에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희자와 할머니는 만나게 됐을 것이다. 할머니에게 사드린 하늘색 원피스는 예뻤겠지. 옛날 좋았던 시절의 밝고 순진한 할머니 그대로겠지.. 조금 생각했다. 눈물이 났다. 아쉬우면서도, 그 아쉬움이 당연하다 느껴지면서도. 지연이 '되찾은' 행복에 나는 기분이 좋았다. 되찾은 것은 할머니와의 인연이며 사랑이다.
새비아주머니는 결국 병들어 돌아가셨다. 20대의 희자를 두고 가련히 떠나셨다. 새비의 마지막의 마지막, 그때 옆에 있던 증조모는 여러 말을 남겨주었고 희자를 불러와 숨이 점점 꺼져가는 새비와 함께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말도 못 하겠다. 내가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점점 숨이 멎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만 봐야 하는 심정은 정말이지 가슴 아프다. 책을 읽고 바로 쓰는 게 아니라 조금 여운을 남겨두고 쓰다 보니 말이 두서없어지고 있다. 엄마에게 정연에 대해, 자신에 대해, 엄마에 대해, 날카로운 말을 던지는 지연에게 공감했다. 간혹,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라는 사람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문제가 있다면 이런 식의 대화는 상대가 내가 또 잘못을 했지 하며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다. 엄마는 상처받았다. 그러나 아무 일 없다는 듯 한참 후에 집에 물건정리를 하러 오라고 그렇게 이야기했다. 둘은 앨범을 정리했었다. 그 속엔 정연도 있었다.... 생각한다. 지연이 겪은 정연의 죽음을, 엄마가 겪은 정연의 죽음을. 그리고 딸과 의절한 할머니의 슬픔을, 새비를 잃은 증조모의 슬픔을, 새비의 고통을 모르던 희자의 슬픔을, 증조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뼈저리게 알게 된 증조모와 할머니의 슬픔을. 슬픔은 이어지고 이어지고 이어졌다 하나의 어긋남이 몇 번이고 이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이 슬픔은 그 시대들에서 당연했다는 것을. 나는 기억하고 내게 이입했다. 그래서 몇 번이고 이 글을 읽으며 괴로웠지만 재미있었다.
- 밝은 밤을 끝까지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