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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식수를 끓여서 먹는다. 5리터들이 주전자에 보리차 반 컵, 옥수수차 반 컵, 둥굴레 반 줌 정도의 분량이다. 원래는 티백을 썼었지만 한 번 알곡차를 사다 끓여먹어 보니 그쪽이 훨씬 나아서 그 이후로는 알곡차를 쓰고 있다. 그는 '니 맛도 내 맛도 없는' 생수는 물 맛이 안 나서 차 타 먹을 때나 쓰고 얼음 얼릴 때나 쓰지 식수로는 별로라고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한 사람답게 온갖 브랜드의 온갖 종류의 차들을 사다가 이렇게도 끓여보고 저렇게도 끓여본 끝에 나름 자신의 입맛에 가장 최적화된 물 끓이는 레시피를 만들어냈다. 심지어는 어느 브랜드의 보리차, 어느 브랜드의 옥수수차, 어느 브랜드의 둥굴레가 괜찮다는 것까지 다 찾아놓았다. 그런 것 따위 일일이 알 만큼 예민하지 않았던 나는 그런 게 다 구분이 가다니 신기하다는 정도로 그의 그런 까다로움을 들어 넘겼다.
그는 물을 많이 마시는 편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물 맛에 그렇게나 예민했는지도 모르겠다. 물 많이 마시는 사람의 옆에 있으니 나도 덩달아 물을 많이 마시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겨울엔 2, 3일에 한 번, 여름엔 매일 물을 끓여야 했다. 유독 날이 덥다거나 매운 음식을 먹었다거나 한 날은 아침에 물을 끓이고 저녁에 한 번 더 끓이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떠난 이후 한동안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밖에는 물을 끓이지 않았다. 요즘은 그나마 조금 끓이는 주기가 빨라져서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끓이는 것 같다.
물을 끓이기 시작한 후 15분쯤이 되면 물이 끓기 시작한다. 그때쯤에 불을 아주 약하게 낮추어서 20분 정도 더 끓인다. 이 간단하다면 간단한 것을, 물 끓이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다른 데 한 눈을 팔다가 물이 끓어 넘치게 만들거나 그 단계를 무사히 넘기고 약불로 줄여놓고는 20분 정도 지났을 때 불을 끄는 것을 잊어버려서 푹 우린 사골국물마냥 졸아든 물을 보고 난감해하거나 하는 일이 꽤 자주 있다. 그와 함께 지낼 때는 이런 일은 없었다. 내가 한눈을 팔면 그가 물 주전자를 살폈고, 반대로 그가 다른 일을 하고 있으면 내가 불을 껐으니까. 재미있는 건 그렇게 잘못 끓여진 물은 내 둔한 입에도 알 만큼 물 맛이 다르다는 것이다. 어딘가 쓴 맛이 나거나, 텁텁한 맛이 나거나, 때 아닌 '바디감'이 생겨 물이 묵직해지거나. 이게 원래부터도 그랬던 건지, 아니면 물 맛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없어져 버리고 나니 이젠 내가 스스로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건지 가끔은 좀 궁금할 때가 있다.
한 달에 두어 번 마트에 주문을 할 때도 비슷하다. 그는 이미 몇 주치 식단을 미리 다 짜 놓고 그 식단에 맞춰 마트에 필요한 것들을 주문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한다. 그래서 적당히 눈치껏, 늘 사던 것들 위주로 최소 주문 금액을 겨우 맞춰 주문을 한다. 그러나 그래 놓고 나면 귀신같이 빠뜨리는 물건이 생긴다. 더러는 물티슈가, 더러는 게맛살이, 더러는 우유가 하는 식으로. 그러면 나는 기껏 마트에서 배송받은 물건을 냉장고에 정리해 놓고도 한껏 투덜거리며 집 앞 슈퍼에 가서 빼먹은 물건들을 사 온다. 그나마 빼먹은 물건들이 한꺼번에 생각나지도 않아 두 번 세 번 걸음을 해야 할 때도 있다. 지난번 언젠가는 3일 연속으로 하루에 하나씩 빼먹은 물건들이 생각나 슈퍼에 나갔다 오면서 넌 도대체 왜 이렇게 멍청하냐며 진심으로 짜증을 낸 것도 있었다.
가뜩이나 꼼꼼하지도 야무지지도 못한 성격에, 내 덤벙대던 부분을 죄다 백업해 주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나니 내 일상은 내내 자잘한 실수와 당황과 짜증과 한숨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나는 걷잡을 수 없이 우울해지곤 한다. 요즘은 많이 덜해졌지만, 이렇게 매사 어설픈 거 뻔히 알면서 도대체 날더러 어떡하라고 그런 식으로 훌쩍 떠났느냐는 생각에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터지기도 한다. 그래도 사진 속의 그는 이젠 아무 대답도 해 주지 않는다. 잘할 수 있을 거라는 격려인지, 이젠 너도 좀 식겁해 봐야지, 하는 짓궂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성급한 생각이지만 그의 생각을 하면서 하나도 안 울 수 있는 날 같은 건 영영 오지 않을 건가 보다 싶다. 오늘 아침에도 주전자를 올려놓고 잠깐 한눈을 팔다가 3분의 1 주전자 정도는 졸여먹어서 하는 생각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