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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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몇 달 전 집 근처에 마트가 새로 문을 열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대형마트였다. 코로나로 인해 외출이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서, 그 마트는 굳이 살 물건이 있지 않아도 기분전환 겸, 그와 함께 자주 들르는 장소가 되었다.


그 마트에는 인근의 농민들이 직접 재배한 농산물을 받아 와서 파는 코너가 있었다. 그중 이채로웠던 것이 근처 화훼농가에서 납품한 꽃들을 소량으로 묶어 한 다발씩 파는 점이었다. 거기엔 프리지아도 있었고 장미나 백합도 있었고 철에 따라 수국이나 해바라기도 있었다. 마트에 갈 때마다 나는 그 꽃 코너 근처를 떠나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였다.


그와 함께 한 시간은 이제 20년이 훌쩍 넘었다. 이성으로서의 설렘은 이젠 많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가끔 내 곁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사람에게 꽃 같은 걸 한 다발 사주고 싶은 마음이 가끔씩 들었었다. 그 마트에 가서 소담스레 담겨 있는 꽃들을 볼 때면 한 다발 사다가 꽃병에 꽂아서 책상에 놓아줄까 하는 마음이 들어 한동안 근처를 서성이며 묶여 있는 꽃을 몇 번이나 들었다 놓았다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내게는 그 비싸지도 않은 꽃 한 다발을 살 용기가 없었다. 뭐하러 꽃 같은 걸 돈 주고 사느냐는 말에 대답할 말도 궁했고 이제 와서 그에게 꽃 같은 걸 사다 안기는 것도 쑥스러웠다. 나는 더 이상 그를 처음 만나던 날의 그 열아홉 살짜리 소녀가 아니었고 어지간한 산전수전을 다 겪은 40대 중반의 아줌마였다. 꽃은 무슨. 그 한 마디로 몇 번을 집었던 꽃을 기어이 놓고, 당장 살림에 필요한 물건 하나를 더 카트에 담는 것으로 우리의 장보기는 항상 그렇게 마무리되곤 했다.


내가 그를 위한 꽃을 산 날은, 그가 그렇게 내 곁을 떠나간 지 이틀이나 지난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바깥의 도어락 비밀번호를 삑삑삑삑 누르며 들어와 소리 내어 웃을 것만 같은 그 사람은, 그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던 근처 병원 영안실에서 차디차게 식어가고 있었다. 내 시간은 멎어있는데 날짜는 부질없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마트의 앱에서 행사 알림을 보내왔다.


문득 그 꽃 생각이 났다. 그 마트의 한 구석에서 팔던, 고작 몇 천 원이면 한 묶음을 살 수 있던 그 소박한 꽃들. 마음만 그득했고 결국은 사주지 못했던 그 꽃들이. 나는 무엇이라도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불문곡직 집 밖으로 나갔다. 날은 화창했고 사방에는 벚꽃이 피어 꽃잎들이 분분이 날리고 있었다. 그 봄의 꽃길을 걸어, 나는 마트에 가서 노란 프리지아 한 단을 사 왔다. 고작 3천 원이었다. 조심스레 꽂은 꽃을 이제는 주인이 사라져 버린 그의 책상에 놓아주었다. 왜 한 번도 이런 걸 해주지 못했을까. 비싼 것도 아니고 손이 많이 가는 것도 아니고. 좋아했을 텐데. 기뻐했을 텐데. 이 꽃을 보고 화를 내지는 않았을 텐데. 꽃 같은 건 뭐하러 돈 주고 사느냐고, 그런 말을 하더라도 그게 진심은 아니었을 텐데.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다음으로 미루고 있었다. 내게 주어진 나날이 그렇게나 짧은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