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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n 29. 2024

보리차를 끓이다가

-215

우리 집 주전자가 정확히 몇 리터짜리인지까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 주전자로 식수로 쓸 보리차를 한 주전자 끓여서 병에 부어보면 1리터짜리 물병으로 네 병 정도가 나오고 그게 주전자를 꽉 채워 끓인 건 아니니 대충 5리터 정도 되지 않나 짐작만 해 볼 뿐이다. 그렇게 끓인 물은 대충 닷새 정도를 가니 나는 하루에 1리터 좀 안 되는 물을 마시고 있는 셈이다.


먹을 물을 끓여놓는다는 것은 매우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주제에 그날 하루 종일이 걸리는 매우 번거로운 일이기도 하다. 일단 아침에 일어나 물을 끓일 때부터도 그렇다. 보리차와 옥수수차를 반반 정도 섞어서 물을 끓이는데, 이 더운 날씨에 가스레인지 앞을 지키고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대충 15분 정도를 센 불에 끓이고 물이 일단 끓기 시작하면 아주 약한 불로 낮춰서 20분 정도를 더 끓인다. 그러면 대충 내 입맛에 맞는 물이 된다. 다만 문제는 그거다. 우리 집 주전자는, 원래는 물이 끓으면 삐익 하는 소리가 났었는데 언제부턴가 그 소리가 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물을 올려놓고, 내가 알아서 15분쯤 후에 불을 낮춰야 한다. 그런데 가끔 그 15분이라는 애매한 시간 때문에 잠깐 뭘 좀 하느라고 그 15분을 넘겨버릴 때가 종종 있다. 그러고 나면 벌어지는 일은 둘 중 한 가지다. 너무 오래 꿇어 물이 닳던가, 혹은 제풀에 끓어 넘쳐서 가스 불이 꺼진 상태로 방치되던가. 전자는 오버쿡(물에 이런 표현이 가당한지는 모르겠지만)되어 맛이 쓰고 후자는 덜 끓어 맹물 맛이 난다. 물을 마시는 닷새 내내 물 맛으로 투덜거리지 않기 위해서는 가뜩이나 정신없는 아침에 이런 타이밍까지 일일이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무사히 물을 잘 끓이고 나서 모든 게 다 끝나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다. 더 번거로운 프로세스가 남아있는데, 바로 물병에 옮겨 담는 것이다. 물을 물병에 옮겨 담기 위해서는 다 쓴 물병을 씻어야 하고, 물을 부어서 냉장고에 옮겨놓아야 하고, 주전자도 씻고 닦아서 제자리에 갖다 놓아야 한다. 낮이라면 지극히 별 것 아닐 이 일은, 그러나 대개 물을 끓여놨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하루를 잘 보내고, 이제 정리하고 누워야겠다 하는 마음을 먹고 커피를 마신 텀블러라도 씻어놓으러 나갔다가 벼락 맞듯 물이 들어있는 주전자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 심리적인 타격이 크다. 다른 사람 먹을 물을 끓여주는 것도 아니고 끓여놓은 물 나 혼자 다 먹을 거면서, 이 순간이 되면 나는 '뭐 먹고살 일 났다고 그냥 생수나 먹을 일이지 굳이 보리차씩이나 끓여서 먹겠다고 유난을 떤' 나 자신에게 한없는 짜증과 역정을 낸다. 이건 정말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늘 그랬다. 초저녁쯤에 아, 물 부어야겠다 하고 잊지 않고 물을 미리 부은 날은 스스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을 정도로.


어제도 비슷했다. 다른 사람 먹을 물도 아니고 나 혼자 먹을 물인데도, 그걸 끓여서 병에 옮겨 담는 그 과정이 귀찮아서 나는 새벽 한 시도 넘은 시간에 물을 붓고 주전자를 씻으면서 '뭐 먹고살 일 났다고 그냥 생수나 먹을 일이지 굳이 보리차씩이나 끓여서 먹겠다고 유난을 떤' 나 자신에게 한없는 짜증과 역정을 냈다. 생수 안 먹고 보리차 끓여 마시면 천년만년 살기라도 한다더냐고. 남도 아닌 나 하나를 건사하는 것도 이렇게 손이 많이 가고 이렇게 귀찮은데 그는 어떻게 평생 자기 하나도 모자라 나까지 거둬먹이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그 별 것도 아닌 보리차 한 주전자를 물병에 옮겨 붓다가 결국 또 그런 생각이나 한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살았던 거냐고.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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