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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l 16. 2024

삼계탕도 먹었으니까

-232

복날이라고 복달임 음식씩이나 해 먹던 건 그 핑계를 대고 그날 하루만이라도 좀 잘 먹을 필요가 있던 시절의 유산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요즘이야 먹자고 들기만 하면 언제든 몸에 좋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가 있고 차고 맛있는 온갖 종류의 음료들, 아이스크림들이 있으며 여름엔 생업이 밖으로 돌아야 하는 일만 아니라면 선풍기 에어컨 바람 아래서 지낼 수도 있다. 그러니 복날이라고 굳이 닭을 먹어야 한다는 건 다 어딘가 좀 시대착오적인 발상인지도 모른다.


작년에도 대략 이런 기분으로,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순살키친이나 1일분 사다 먹고 그걸로 치웠다. 나 혼자 먹기에는 아무래도 배달시킨 치킨 한 마리는 많고, 그보다 더 큰 문제가 혼자 뼈까지 발라가며 꾸역꾸역 치킨을 먹다 보면 이게 무슨 뻘짓인가 하는 생각을 아무래도 피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책상 옆에 대충 벌려놓고 일하면서 과자라도 집어먹듯 한 조각씩 먹을 수 있는 그 순살치킨이 내게는 딱이었다. 그것도 초복에 한 번 그랬던 것 같고 중복과 말복에는 그나마도 하지 않았다. 작년 여름은 뭐 그런 식으로 대충 넘어갔었다.


올해도 원래는 그럴 참이었다. 그러나 급 생각이 바뀌어서, 결국 마트에서 안겨준 쿠폰까지 써 가며 이것저것 묶어서 산 녹두 삼계탕 한 팩을 주문해서 어제 점심으로 먹었다. 이번 주부터는 또 새로운 고비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 고비를 앞두고 일부러라도 좀 심기일전할 필요가 있었다. 도대체 내 인생은 왜 이다지도, 뭐 하나 끝났나 싶을 만하면 다른 고비가 덮쳐오기를 내내 반복하는가 하는 장탄식을 하며 보내던 기간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사람 사는 인생은 대개 다 거기서 거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남들도 다 이러고 사는 모양이니까.


삼계탕은 그보다 내가 더 좋아하던 몇 안 되는 '어른 입맛' 메뉴 중의 하나였다. 별로 삼계탕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도, 그는 그래도 복날만은 어떻게든 좀 유명하고 잘하는 삼계탕집에 가서 삼계탕 한 그릇을 먹게 해 주려고 애를 쓰곤 했다. 그리고 그러던 삼계탕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대량생산되어 냉장포장된 녹두 삼계탕도 내 입에는 나름대로 먹을 만했다. 집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이 정도 삼계탕을 먹을 수 있는 거라면 중복과 말복도 좀 심각하게 고려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할 정도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의 나는 지금껏 살아온 모든 내가 더해져서 만들어낸 나니까.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되돌아간다고 해서, 그래서 그때 한 몇 가지 일들을 하지 않거나 그때 하지 못한 몇 가지 일들을 뒤늦게 한다고 해서 내 인생이 그리 많이는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믿는다. 그러니 이제 와서 내가 할 일은 이왕 벌어진 일과 꾸역꾸역 싸우며 한 발씩 앞으로 나가는 것뿐이다. 그러니 어제 복날의 녹두삼계탕은, 일종의 야전식량이었던 셈이다.


힘을 내 보자. 삼계탕도 먹었으니까.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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