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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Nov 16. 2024

만년필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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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이라는 필기구에 로망이 있는 사람은 꽤 많다. 그리고 나도 그중의 하나다. 다른 건 몰라도 하루에 30분씩 펜글씨 쓰는 연습을 하는 것은 글씨 교정도 교정이지만 그간 사놓고 눈요기밖에 못하던 만년필에 이런저런 예쁜 색깔의 잉크를 채워서 실제로 뭔가를 쓰고 있다는 점에서 느끼는 만족감도 매우 크다. 요즘은 아무래도 손글씨란 거의 쓸 일이 없는 세상이니까.


그러나 꼭 그만큼이나 만년필이란 조금만 써 보면 왜 이 멋들어진 필기구를 두고 멋대가리 없는 볼펜 따위가 발명되었는지를 너무나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일단 만년필은 매우 '귀찮은' 필기구다. 기껏 손가락에 앙크 묻혀가며 리필해 놓은 잉크는 서너 번 쓰다 보면 금세 떨어져서 새 잉크를 채워 넣어야 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손에 잉크가 묻거나 옷에 잉크가 튀는 일도 생긴다. 그리고 가끔은 일전에도 한 번 썼듯이 사놓고 몇 번 쓰지도 않은 잉크에 택도 아니게 곰팡이가 슬어서 잉크 채로 버려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잉크를 담아서 썼던 만년필까지 세척액을 동원에 박박 닦아야 하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한다.


내 만년필들의 경우 가장 큰 위기가 1년쯤 전에 있었다. 급작스러운 입원으로 서너 달 집을 비우게 되었는데 일이 그렇게 될 줄 모르고 만년필의 컨버터를 비워놓지 않았다. 만년필은 하루에 서너 글자씩이라도 뭔가를 써줘야 그 속에 든 잉크가 말라붙지 않으며, 그럴 자신이 없으면 아예 잉크를 넣지 말아야 한다. 그때 엉망진창이 된 집을 치우는 과정 중에 잉크가 죄다 말라버린 만년필 세 자루를 박박 씻어서 다시 쓸 수 있게 만드는 작업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름 하느라고 했지만 그때 뭔가 잉크 흐름을 조절하는 부분이 말라버린 것인지 유독 세 자루 가운데 한 자루가 눈에 띄게 잉크 흐름이 좋지 않아졌다. 금방 잉크를 채웠을 때는 덜한데 컨버터의 잉크를 반절 이상 썼거나 하면 그 후부터는 유독 글씨가 뚝뚝 끊어지고 잘 싸지지 않는 증상이 생겨서 뚜껑을 닫고 몇 번이나 흔들어서 써야 한다. 그저 급작스레 입원한 내 죄다 하는 생각에 찍소리도 못하고 그렇게 만년필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어제도 그 만년필로 펜글씨를 쓰는 날이었다. 잉크가 절반 정도 차 있는데도 너무 글씨가 뚝뚝 끊어져 급기야 짜증이 조금 나던 참이었다. 뻗치는 성질을 삭히지 못해 만년필을 너무 열정적으로 흔들던 중에, 손에서 빠져나간 만년필에 바닥에 떨어졌다. 물론 뚜껑을 닫은 채이긴 하지만. 만년필은 바닥에 떨어뜨리면 안 된다. 여차하면 촉이 휘어서 못쓰게 되기 때문이다. 허둥지둥 주워서 종이에 몇 번 그어 보았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인지, 조금 전까지 뚝뚝 끊어져 나오던 잉크가 너무 술술 나와서 나는 좀 당황하고 말았다. 덕분에 어제의 펜글씨는 더 이상의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무사히 마치기는 했다.


떨어뜨렸을 땐 기겁을 했는데 잉크 흐름이 좋아진 걸 보니 제대로 된 만년필 덕후들이 들으면 큰일 날 말로 앞으로는 일부러라도 주기적으로 한 번씩 떨어뜨려야 하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잠시 했다. 솔깃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저 어제의 내가 아주 운이 좋았을 뿐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독제독이 먹히는 것은 대개 처음 한두 번뿐이니까 말이다. 잉크 한 번 채워서 얼마 쓰지도 못하고 바닥에 한번 떨어뜨릴 때마다 사람을 기겁하게 하는 필기구라니. 아무튼 이 멋들어진 필기구를 두고  볼펜 같은 멋없는 필기구가 발명된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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