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함

by JH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이 두 사람은 어린 시절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돈이 많은 사람들이었는데


둘 중에 한 사람이

"지금은 너무 행복한데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면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이 든다"라고 말했다


그때의 기억이란 어린 시절

돈이 없어 겪은 슬픈 기억이었는데

이 슬픈 이야기를 묵묵히 듣던 상대도 어린 시절 돈이 없어 겪었던 기억을 꺼내며


"찢어지게 가난해서 겪은 슬픔, 억울함, 분노가 있었기에 지금의 니가 있는 거야"라고 말했다


상대방에 대한 위로의 말이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았다는 칭찬의 말이었는지

덧붙여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애매하게 가난한 사람들이 있어

애매하게 가난해서 슬픔, 분노, 억울함 같은 감정을 애매하게 느껴본 사람들 있지 그런 사람들은 ······."


두 사람의 이야기를 아무 생각 없이 보다가

애매하게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말이 내 머릿속 가득히 채워졌기 때문에


그 뒤에 어떤 말을 들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찢어지게 가난해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감정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 아픔이 원동력이 되어서 악착같이 살아가지만


애매하게 가난한 사람들은

그 기억이 또렷하지 않아서 계속 애매한 상태로 살게 된다는 말이었던 것 같다


나는 생각한다


우리 집은 가난할까

돈이 얼마나, 언제부터 없었을까


가끔 이런 생각이 들면

아쉬움, 후회, 씁쓸한 기분이 들었고

때로는 이 기분들이 분노와 원망으로 바뀌기도 했다.


나는 아쉬웠다

어려서부터 하고 싶은 것도 잘하는 것도 없는, 꿈도 없던 아이가 자라서

여전히 뭘 원하고 잘하는지 알지 못한 채 의욕 없는 어른이 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알았을 때 아쉬웠다


그리고 후회되었다


하고 싶은 것도 잘하는 것도 없어 친구 따라 집과 거리가 좀 있는 고등학교를 가서

그보다 더 거리가 있는 회사를 다니다 그만뒀을 때 돈을 하나도 모으지 못했다는 것과

그 뒤로 어느 한 곳 진득하게 다니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 후회되었다


또 앞으로의 내 삶을 생각하면 씁쓸하기도 했다


돈이 행복의 기준이 아니며 돈으로 모든 걸 다 해결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갑작스럽게 돈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돈 앞에서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날 씁쓸하게 만들었다


후회와 아쉬움, 씁쓸한 기분이 들 때

순간적인 기분에 사로잡혀 제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이 기분들이 원망과 분노로 바뀌어서 누군가를 탓하며 마구 쏟아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그래서 생각한다

내가 느낀 이 분노와 원망을 누구에게 어떻게 표출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상대나 기억이 없어 모든 감정의 끝에는 답답함만 남아 있었다


나는 왜 순간적인 기분에 사로잡혔을까

내가 느낀 감정의 끝은 왜 답답함이었을까


그 이유를 두 사람의 이야기를 보며

'아! 우리 집이 애매하게 가난했기 때문이구나' 하고 알게 되었다


-우리 집은 가난할까?

우리 집은 애매하게 가난했다

돈이 언제부터, 얼마나 없었는지 잘 모르지만 아마도 처음부터 애매하게 없었던 것 같다


애매하게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나는 우리 집이 돈이 없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지만

돈이 없어서 겪은 슬픔, 분노 억울함 같은 기억이 없어서 악착같이 살지는 못했다


악착같이 살지는 못했어도

내가 살았던 삶에 대해서 큰 불만 없이 지내던


어느 날

살면서 단 한순간이라도 악착같이 무엇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아쉽고 후회되었다.


그 아쉬움과 후회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어서 계속 생각했다


어떤 부분이 아쉽고 어떤 부분에서 후회가 되는지

생각하던 중에


꼭 악착같이 살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내 삶을 돌아봤을 때

악착같이 살지 못해서 후회되고 아쉬웠던 순간보다


악착같이 살지 못했지만

그런대로 잔잔하게 살았던


삶에 만족했던 때가 많았고

그렇다면 지금까지와 같이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잔잔하게 살다가


가끔

과거의 기억이나 현재의 상황 또는 미래를 상상하며 느껴지는 기분들을

그때마다 풀어내면서 살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더니 지속되었던 기분이 사라져 있었다


애매하게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애매한 상태로 살게 된다는 말이

애매하게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나에겐 해당되었던 말이라서

어린 시절 내 환경이 내 삶에 원동력이 되어 주지 못했다


하지만

매일 틈틈이

그리고 천천히 들여다본 내 삶이 나는 자랑스럽고 만족스럽다


이번 달은 어떤 생각을 하며 보내고

무슨 내용의 글을 적을까 고민하던 중에

누군가 나에게 '너 정도 나이면, 이 정도는 모았어야지' 하는 말을 했다


평소라면 별생각 없이 지나쳤을 말에

'나는 왜 한 푼도 모으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어지는 생각 속에서 아쉬움, 후회, 씁쓸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이 기분들이 분노와 원망으로 변하기 전에

천천히 제대로 생각하며


그 생각을 다 꺼내 적은 뒤

잠시 고민했다


이 글의 마무리는 어떻게 짓지?

그러다 하던 고민을 멈췄다


그냥 애매하게 끝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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