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떨결에, 재미 삼아

by JH

얼떨결에 사주를 봤다


얼떨결에 사주를 본 날

해외에 살던 이모가 한국에 왔다고 해서 오랜만에 이모를 만나 어색하게 밥을 먹었다


이모지만 왕래가 거의 없어 밥 먹는 자리가 내게는 어색했는데

엄마와 이모는 두런두런 추억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 보였다


내게는 어색한 한 끼가

엄마와 이모에게는 즐거운 한 끼가 계속 이어지는 중에

이모가 사주를 보려고 예약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시간이 괜찮으면 함께 가자고 해서 밥을 다 먹은 뒤에는

사주풀이하는 장소로 향했다


처음 와본 낯선 공간에 도착한 나는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펴보고 사주를 봐주시는 분과 이모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멀뚱멀뚱 앉아 있었다


내가 멀뚱히 앉아 있는 사이

이모의 사주풀이가 끝났고 본인의 사주풀이를 다 들은 이모는 엄마의 사주도 봐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 물음에 잠시 엄마를 바라보더니

엄마는 사주풀이를 해줘도 듣지 않을 거라고 대신 내 사주를 봐주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이잉?! 나도 안 듣는데 근데 좀 궁금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태어난 시간과 생년월일을 말했고 그렇게 얼떨결에 사주를 보게 되었다


그날 얼떨결에 들었던 사주에서의 나는 장남이라고 했다

또 외로움을 많이 타며 결혼은 두 번 할 거라고 했는데

나는 그 말들이 왠지 좀 웃기게 들렸다


딸인데 장녀도 아니고 장남이라는 말이 좀 웃겼고

연애할 생각이 없는데 결혼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한다는 게 좀 웃겼으며

스치듯 외로움을 느끼긴 했지만 이 감정이 내 삶에 걸림이 될 만큼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그 말들이 왠지 좀 웃겼는데

이런 내 사주가 본인과 비슷하다는 말을 들은 이모는 웃기지 않았는지 굳은 표정으로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재미 삼아 본 건 타로였다


재미 삼아 타로를 본 날

뭘 볼까 잠시 고민하다가 '너 뭐 볼 거야?' 같이 갔던 사람에게 물었더니

연애 운을 본다고 해서 나도 연애 운을 봤다


찹찹찹 촤르르륵 쓱쓱

카드를 섞고, 펼치고, 몇 장의 카드를 고르라고 해서 골랐더니


내가 고른 카드를 뒤집으며 말하기를

내가 타인으로부터 상처받는 걸 두려워해서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동의할 수 없었는데


동의할 수 없었던 이유는

누군가를 만날 때 상처받을까 두렵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쉽게 마음의 문을 열어줬는데

상처받는 게 두려워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고 하니깐


그 말에 동의하기가 어려워 가만히 있었더니 이어서 다른 카드를 하나씩 뒤집으면서

내가 눈이 아주 높고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 끌린다고 했다

또 내 주변에 남자가 있어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과 곧 연애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들 중에서는

내가 눈이 높다는 것과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끌린다는 것에 동감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고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과 연애할 수 있다는 말에는 '과연 그럴까?'라는 생각을 하며 가만히 듣고 있었다


나는 이런 사람이 좋다

이런 사람과 만나고 싶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동안 눈길이 갔던 사람을 떠올려보면

어느 자리에서든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

누굴 만나든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었다


분위기를 주도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무엇인가 이루고자 하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고

목표가 분명했기 때문에 의욕이 넘치며 열정이 넘쳐 보였다


무엇보다 나는 감정 기복이 거의 없는 사람에게 눈길이 갔는데

이런 사람은 나와 반대되는 사람이었기에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과 연애할 거라는 말에 과연 그럴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떨결에 사주를 보고

재미 삼아 타로를 본 날부터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생각한다


-얼떨결에 사주를 본 날, 들었던 말들이 정말 웃기기만 했을까

-내 사주가 본인과 비슷하다는 말에 이모는 왜 표정이 굳었을까

-나는 사람에게 상처받는 게 두렵지 않아, 마음의 문을 쉽게 열어주는 게 맞을까

-누구에게나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분명하며 의욕과 열정이 넘치는 사람,

무엇보다 감정 기복이 없는 사람은 나와 반대되는 사람일까

-그럼 나는 의욕적이지 않고 열정적이지 않으며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없는,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일까


들었던 생각들을 하나씩 꺼내보면


얼떨결에 사주를 본 날

들었던 말들이 정말 웃기기만 했다

외롭지 않은데 외롭다고 해서 웃겼고

딸인데 장남이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 정말 웃기기만 했다


특히 장남이라는 말이 웃겨서


한동안 집을 나설 때

"이 집 장남 나간다!!" 하고 나갔고

집으로 들어올 때는

"첫째 아들 왔다" 하고 장난칠 만큼 웃겼는데


그 말들이 웃기지 않았던 건

정말 외롭다는 생각이 들 때였고


정말 외롭다는 생각이 들자

본인과 비슷하다는 말에 표정이 굳어졌던 이모가 생각났다


이모는 왜 표정이 굳었을까?

여전히 왕래가 없어 직접 물어보지 못했지만

당시 이모의 삶이 힘들어서 본인과 비슷하다는 말을 듣고 내 걱정이 되었던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람이 좋고 사람과 만나 어울리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좋다

낯을 가려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기까지는 시간이 걸리지만 내 마음이 편하든, 불편하든 상관없이


사람이 좋은 나는

어디서 만난 누구였든 간단히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마음의 문을 쉽게 열어줬다


내가 사람을 좋아하고 쉽게 마음을 열어줬던 건

사람에게 상처받은 기억이 별로 없어

상처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쉽게 열렸던 만큼 더 쉽게 닫혔던 순간이 떠올랐고


사람이 좋은 나는 쉽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만

상처받을게 두려워 더 쉽게 마음의 문을 닫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별로 없었다


무엇을 하든지 이걸 왜 해야 하는지, 이걸 통해 무엇을 얻고 싶은지 생각한 적도 별로 없었다

뿐만 아니라 목표를 이뤄낸 뒤 성취감을 느꼈던 적도 별로 없어

목표 설정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목표 설정에 대한 중요성과 성취감은 별로 없지만

의욕과 열정은 있는 편이라서 무엇을 하든지 일단 열심히 했는데

이 열심과 의욕, 열정은 금방 사라졌고 의욕과 열정이 사라진 자리에는 무료함이 찾아왔다


나는 이 무료함이 무기력으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고

발버둥 치는 과정에서 목표 설정에 대한 중요성을 조금씩 인식하게 되었다


목표를 정해야 하는 이유도

정한 목표를 꼭 이뤄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던

내가 이제는 생각이 바뀌어 목표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처럼 바뀐 생각이 있는데


나는 연애를 하고 싶다


때로는 눈치 보느라 제대로 된 생각을 말하지 못하더라도

때로는 분위기에 휩쓸리더라도

때로는 감정 기복이 있더라도


아직은 분명한 목표를 정하지 못했더라도


이거 하나만큼은 눈치 보지 않고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으며

이걸 하는 순간 집중하며 몰입할 수 있는


본인만의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런 사람을 만나 가끔 무료함이 찾아올 때

무료함이 무기력으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무엇을 해볼까 함께 고민하며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


나는 연애를 하고 싶고

연애를 한다면 이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지금 당장 '뿅!' 하고 원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 생각을 꺼내 기록한 이유는

들었던 생각을 끄적이며 집중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좋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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