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로 인해 슬픔, 좌절, 상실감에 빠진 여주를 보던 남주가 운동화 있냐고 물었고
그 물음에 여주는 남주를 바라보며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 구두에서 운동화로 갈아 신은 여주와 남주가 나란히 공원에 서 있었고
슬픔을 잊기 위해서는 숨이 차도록 달려야 한다는 남주의 대사를 끝으로 두 사람은 달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숨이 차오름과 동시에 여주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올랐고
그런 여주를 보는 남주의 얼굴에는 여주를 향한 걱정과 근심이 가득 차올랐으며
그 두 사람을 보는 내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가득 차올랐다
슬픔을 잊기 위해서 달려야 한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힘든데 숨이 차도록 달려서 멀쩡하던 몸까지 힘들게 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었다
'정신적 힘듦 + 육체적 힘듦 = 분노'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날로부터 시간이 흐른 뒤
천천히 걷고 있는데 내 옆을 뛰면서 지나가는 사람이 보였다
빠르게 멀어져 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
어렸을 때 육상을 하다가 그만뒀다는 친구가 생각났고, 이해되지 않았던 드라마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 그 친구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슬플 때 달린다는 건 드라마를 쓴 본인의 이야기일까
슬플 때 달리는 게 정말 도움이 될까
계속 생각하다 보니깐 뛰고 싶어 져서 아주 잠시 뛰었다
아주 잠시, 아주 짧은 거리를 뛰었는데 비해 심하게 차오르는 숨을 한참 고르고 있는 동안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내 달리기 실력은 걷나 뛰나 거기서 거기다
숨이 차도록 뛰는 건 나쁘지 않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는 천천히 걷다가 가끔씩 뛰었다
여전히 내가 뛴 거리에 비해 심하게 숨이 찼지만 자주 나와서 걷거나 뛰었더니 하고 싶은 게 생기기도 했다
지금은 운동장 반바퀴도 못 뛰지만 언젠가 쉬지 않고 한 바퀴를 뛰고 싶다
이 생각이든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천천히 걷는 것도 가끔씩 뛰는 것도 멈췄다
운동장 한 바퀴 쉬지 않고 뛰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했고
시간이나 날씨에 상관없이 천천히 걸으며 생각에 잠기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알았지만 한번 하던 걸 멈췄더니 다시 시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 이상 슬플 때 달려야 한다는 드라마 속 대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걷고 뛰는 걸 멈춘 날이 드라마를 보며 머릿속 가득 차올랐던 물음표의 개수 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날
유난히도 지치던 날
그래서 사소한 일에도 서럽고 억울하고 괴로웠던 날
끝날 것 같지 않던 순간이 지나가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로 가서 앉았는데 창밖으로 펼쳐진 바다가 고요해 보였다.
고요한 바다를 보고 있었더니 지쳤던 마음이 회복되면서 여기 하루 종일 앉아 있을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좋았던 순간도 지나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루가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감에 묘한 기분이 들었고
이대로 들어가기가 아쉬워서 집으로 향하던 걸음을 바꿔 자주 걷고 가끔 뛰던 운동장으로 향했다
여전히 걷나 뛰나 거기서 거기인 속도로 뛰다가
숨이 차서 천천히 걸으며 숨을 골랐고
숨을 고르는 동안 흘러간 하루를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는데
그 순간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그날부터 매일 운동장으로 가서 걷고 뛰기를 반복했다
한 바퀴 뛰고 두 바퀴 천천히 걸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숨을 고르거나 운동장에 있는 사람을 보거나
문득 들었던 생각에 잠겼다
하루, 이틀, 삼일 정도 계속 나갔더니
매일 꾸준히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이 꾸준함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모르겠지만
우선 이번 주만이라도 해보자 싶어 매일 꾸준히 나갔더니 금세 한 주가 지나갔다
한 주간 뛰고 걸으며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 좋아서
이대로 조금만 더, 곧 끝나는 이달까지만 꾸준히 해보자 결심했는데
이 결심을 하자마자 귀찮음과 피곤함이 몰려왔다
'아 그냥 오늘만 가지 말자' 싶은 생각이 피어오를 때
이 생각을 꾸역꾸역 누르고 일단 나갔다 오면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심했던 이달도 거의 끝날 때쯤
이제 새로운 한 달이 시작되니깐
다음 한 달 동안 꾸준히 해보자 다짐했지만 이 다짐은 이루지 못하고 멈췄다
그렇게 멈춘 지 몇 달이 흐르는 동안
너무 피곤하고 귀찮을 때 그 순간만 참고 나가면 좋았는데
다시 나가서 걷는 것부터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 생각은 아직 실행하지 못했다
여전히 머릿속에만 머무는 생각이 언제 꺼내질지 모르겠지만 우선 글로라도 꺼내고 싶었고
글을 쓰기 위해서
어쩌다 싫은 뛰기를 하기 시작했을까
피곤함과 귀찮음을 꾸역꾸역 누르고 나갔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생각했고
들었던 생각을 하나씩 꺼내 적은 지금
이제는 '다시 운동장으로 가서 걸어볼까' 하는 생각이 꺼내지기를 바라며
오늘의 끄적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