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길치다
방향감각 없지만 길을 외우는 기억력도 좋지 않아 내가 방금 어디서 걸어왔는지 잘 까먹는다
한 번도 가지 않던 길이나 한 번쯤 가긴 했지만 오랜만에 가는 길은 당연하듯 한 번에 못 찾고 헤맨다 익숙하게 오가던 길이라고 예외는 아닌 게 누가 나한테 익숙하게 오가던 길에 대해 물어보면 대답을 못한다 대답하다 헷갈린다 그 건물이 있었던가 없었던가 (가물가물)
길도 잘 못 찾고 길 설명도 잘 못하지만 다행히 주눅 들지 않는다
나는 자신만만한 길치니깐!
낯선 길을 걷다 발견한 갈림길에서 나는 내 예감을 믿는다 나의 예감은 틀림없으므로 나의 예감대로 오른쪽으로 가면 열 번 중에 한두 번은 맞고 나머지는 다 틀린다
길도 못 찾고 길 설명도 못하고 예감도 다 틀리지만 길을 잃어도 당황하지 않는다
헤헤 또 길 잃어버렸네 웃으며 그제야 지도 앱을 켜서 확인한다
내 생각보다 더 심하게 잘못 왔고 하필 약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는 웃음이 뚝 끊어지지만 부랴부랴 방법을 찾아 어떻게든 도착한다
길을 잃는 건 길치인 나에게 익숙한 일이며 길을 잃어도 얼마든지 다시 돌아갈 수 있는 튼튼한 두 다리가 있기 때문에 길치라도 길을 잃는 건 두렵지 않다
길을 잃는 게 두렵지 않은 나라도 두려운 길은 있다
'보이지 않는 길'
보이지 않는 길이라는 표현이 이상한데 인생을 길로 표현하길래 인생길과 그냥 길로 적으려다 보이지 않는 길(인생) 보이는 길(걸핏하면 잃는 길)로 생각을 정리했다
보이는 길을 걸을 때와 보이지 않는 길을 걸을 때의 나는 다르다
일단 시작부터 다른데 보이는 길은 목적지를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 정해진 목적지는 가도 그만 가지 않아도 그만이다 목적지를 정해 길을 걷다가 힘들면 얼마나 남았는지 언제든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길은 시작의 순간부터 다르다
내 선택과 상관없이 태어났고 내 선택과 상관없이 최종 목적지는 정해졌으며 정해진 목적지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가기 싫다고 안 갈 수도 없고 앞으로 얼마나 남았나 궁금하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쯤 도착하는지 알 수 없는 최종목적지가 두려웠을까? 질문을 던지면 한 번씩 두려울 때는 있다
음..
두렵다는 하나의 표현으로 답하기 모호하니 덧붙여 보면 별생각 없이 지내다가 행복할 때 문득, 울적한 기분이 들 때 문득 언젠가 끝날 이 감정이 좀 아깝기도 하고 두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깝다... 두렵다...?
뭐라 딱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묘한 기분이 들 때 잠시 멈춰 서서 길을 제대로 걷고 있는지 생각했어야 하는데 멈춰야 한다는 생각도 못 했고 만약 멈추고 싶었어도 멈추는 방법을 몰라 나는 계속 걸었을 것이다 잠깐 멈춘 채 이 길이 맞나, 혹시 잘못 왔나? 고민하고 생각해 봐도 되는데 그러지 않았다
보이는 길을 걸을 때는 길을 잃는 게 일상적이라 헤헤 웃으며 제대로 된 길로 찾아가는데 보이지 않는 길은 한번 잃으면 두 번 다시 못 찾을 거라는 두려움에 길을 잃은 사실을 끝까지 무시했다
최종 목적지라고 표현했지만 꼭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도 크고 작은 목적지(목표)를 두고 걸을 때마다 나는 늘 그랬다
이대로 무시하고 걸어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은 흘렀고 내 걸음은 멈춰지지 않아 계속 걸었다
그럭저럭 버틸만할 때는 무시하고 걸어지던 걸음이 그럭저럭 조차 되지 않으니깐 그제야 멈춰졌다 멈춰진 건지 쓰러진 건지 무기력해져 가만히 있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책도 그만 봤고 글도 그만 적었다 책을 읽어 뭐 할 거며 글은 써서 뭐 할 건가 싶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하루의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 보내다가 무료함을 견딜 수 없어 티비를 틀어 드라마를 봤다
이때 봤던 드라마는 '정신과 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였는데 재미없어서였나 뻔한 내용일 것 같았나 어쨌거나 한 번보다 말았던 드라마를 틀어 처음부터 다시 봤다
드라마를 보던 중에 내용이 현실성 있게 흘러가면 가뜩이나 내 삶이 별로인데 드라마까지 현실적이어야 하냐며 궁시렁거렸고
그러다 현실적이지 않게 흘러가면 현실성 없다고 궁시렁거리면서 펑펑 울고 웃었다
내가 정신과 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보고 울다가 웃다가 했어요라고 했더니 그게 그렇게 재밌냐고 묻던데 나는 그 질문에 '음.. 네 아 아니요 (네...)'라고 이상하게 대답했다
무기력과 동시에 마음이 삐뚤어져서 아무한테나 시비 걸고 싶던 찰나에 봤기 때문에 궁시렁거린 기억만 남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얼버무리다 보니 대답이 이상해졌지만 드라마는 재밌었다
실컷 드라마를 보고 울다가 웃다가 한 뒤 이제는 조용히 생각하고 싶어 티비를 끄고 의식의 흐름대로 떠오르는 누군가를 생각했고 그러다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노래가 생각나면 흥얼거리기도 했다
이때 떠올랐던 노래 중 하나가 god 길이었는데 내가 아는 부분은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 길인지 알 수 없지만' 이 부분뿐이라 이 부분만 계속 불렀다 그렇게 흥얼거리다가 누가 god 팬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누구였지 하고 떠올려 봤지만 생각나지 않아 그만뒀다
드라마를 핑계 삼아 실컷 울고 웃고 노래도 흥얼거렸더니 오지 않던 잠이 쏟아져 실컷 잠을 잤다
(만약 드라마 없이 눈물이 나오고 웃음이 나왔다면 내가 잘못된 게 아닐까.. 불안했을 텐데 드라마를 핑계 삼아 실컷 울고 웃으며 감정을 쏟아냈더니 불안하지 않았다)
이날 나는 잠들기 전까지 엉뚱한 상상을 많이 했고 엉뚱한 상상을 하다 말고 노래가 떠오르면 흥얼거렸다
내게 머물던 부정적 생각과 감정이 이제 물러갔나 했는데 여전히 한 번씩 찾아온다 그래서 기분이 가라앉을 때도 있지만 스치듯이 지나가기 때문에 더 이상 부정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나는 지금 어떤 상태일까?
주저앉아 있다 이제 겨우 일어난 상태로 여전히 제 자리에 멈춰 서 있는 상태다 나는 겨우 훌훌 털어내고 일어났으니깐 조금씩 힘을 내서 앞으로 걸어갈 생각이다 무리하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으며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