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네이비 글라스 Apr 15. 2020

장례식에서(다시 웃으면서 만나요)

일상 속 감상

얼마 전 일이다. 평소처럼 운동을 하고 현관문에 들어섰다.

“할머니가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네......”

주섬주섬 검은색 옷을 입고 차를 타고 나섰다. 지방에 계신 외할머니를 뵈러 2월 초, 밤 9시 반 경 고속도로에 진입하며 액셀을 밟았다.  차가운 공기가 창문에 닿아 이슬처럼 맺혀있다. 차창 너머로 칠흑같이 어두워 시커먼 하늘에 하얗고 둥그런 달이 우리를 내려다봤다.  분명 아까 공원을 돌며 운동을 할 때 봤던 보름달이었다. 그때는 나를 보고 밝게 웃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저 어두운 하늘과 대비되는 하얀색의 밝고 동그란 모양의 행성일 뿐이다.      


외할머니는 내가 독립해서 자취를 하며 독신주의를 주장하고 한창 부모님의 속을 썩이고 있을 때 “정 그라믄 내랑 같이 살재이.”그랬다.

내가 이직을 하려고 여러 가지를 배우러 다니고, 도전하느라 경제적으로 어려워졌을 때 그녀는 말없이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하얀 봉투에 80만 원을 넣어서 부모님도 모르게 내게 건넸다. 평소 연로하신 외할머니의 손과 발이 되어 그녀의 은행 일을 처리하는 것을 외숙모가 대신해주시는데, 이 돈은 어떻게 마련해두신 건지 알 수 없지만 만 원짜리로 봉투에 가득 들어있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 돈은 도저히 쓸 수가 없어서 그냥 넣어두었고 지금까지 그대로 있다.

직장을 다니다가 갑자기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공부하려면 돈도 들 텐데 할미한테 와서 다른 것 걱정 말고 집중해서 해라.”그랬다.    

 

내가 아기였을 때부터 외할머니는 첫 손주인 나를 특별하게 사랑했다. 겁 많고, 소심하고 여린 성격, 사람들을 잘 믿고,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남을 해하지 못하는 순수한 마음을 지닌 것도 외할머니와 나는 똑같다. 우리는 영혼이 연결되어있어서 같이 살았을 기간과 그렇지 않은 순간들도 항상 함께인 듯이 감정의 변화나 건강상태를 느낄 수 있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외할머니와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암투병과 고관절로 죽음의 위기를 넘길 때마다 정신력으로 이겨내 왔다. 자연스럽게 나는 그녀의 죽음은 머나먼 일이고, 그녀가 하늘나라에 가는 시간이 나도 함께 눈을 감는 순간이라고 여기며 살았다.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고 시험을 준비한다며 공부를 할 때 나는 외할머니를 전처럼 많이 찾아뵙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외할머니는 기억을 점점 잃는 알츠하이머에 걸렸다. 사실 두려웠다. 외할머니 얼굴을 못 보겠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떨렸다. 그런 모습을 본다면 나는 앞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서 혼자 울기만 하고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어느 날부터 용기를 냈다. 외할머니의 기억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만나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서울과 대구까지의 거리였지만 자주 가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나를 알아볼 때 나도 안도하며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꼈다. 사실 할머니와 같이 살면서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힘든 상황이 많았음에도 변함없이 평생 동안 그녀를 모시고 사는 외숙모에게 내가 뒤늦게 공부 뒷바라지로 짐이 될 것 같았다. 그냥 빨리 시험에 합격해서 일을 하게 되면 외할머니랑 같이 살자고 다짐하며 응시했다. 직장 담보 대출을 받아 집을 구하고 할머니와 살면서 내가 출근해서 일을 할 동안 사회복지 요양보호사가 몇 시간을 아픈 할머니를 돌보고, 퇴근해서 내가 집에 오면 할머니랑 맛있는 것도 나눠먹고 일하면서 있었던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하면서 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늦은 나이었지만 더 열심히 공부를 했었다.


할머니는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혼자는 거동을 못하게 되고, 배변마저 스스로 힘들어지면서 요양병원에 가게 되었다. 그동안도 몇 번의 위기가 있었다. 그때마다 잘 이겨내던 그녀였다. 나는 믿었다. 계속 살 수 있고, 내가 같이 살면서 더 회복될 거라고……. 그러니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나는 이번 설에 특별한 날임을 할머니가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할머니를 뵐 때 가족 모두 예쁜 한복을 차려입고 병원에 가자고 제안했다. 병원에서는 환자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외부에 대한 관리가 철저했다. 원래는 1명만 방문할 수 있었지만 한복까지 입고 나타난 우리를 보고 이례적으로 비록 잠깐이지만 다 같이 뵐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날 나는 다른 때와 다르게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가 멍하니 초점 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내 목소리와 내 모습을 봐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손을 꼭 잡았는데 그것만 꼭 쥐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 설날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뭔가 직감을 한 건지 돌아오는 길에 내내 눈물이 떨어졌다. 하지만 아직은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마음속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얼마 안 되어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로 병원에서 외부인 방문을 일절 금지했다. 매일 외숙모와 외삼촌이 할머니를 찾아갔었는데 갑자기 못 가게 되어 외삼촌은 할머니가 걱정되어 눈물바람이었다. 나도 불안함을 느꼈지만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할머니는 매일 찾아오던 따뜻한 손길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고,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삶의 의지를 점차 잃으셨나 보다. 2주가 지나자 병원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연락이 온 것이었다.    

  

급히 새벽에 도착해 할머니를 한 명씩 만날 수가 있었다. 그때는 이미 촛불이 꺼져가듯이 할머니의 생명도 점점 식어가는 중이었나 보다. 엄마가 할머니를 만날 때는 마지막 사력을 다해 숨을 쉬시려 해서 의사가 폐에 차있는 물을 빼는 시술을 시도하자는 밝은 메시지를 전해왔다. 아빠가 할머니를 만날 때도 그럭저럭 유지하고 계셨단다. 내 차례가 되어 손을 잡고 귓가에 “할머니, 나 왔어.”하면서 목소리를 들려주고 파래지지 않게 손가락을 주물렀다. 내가 불러 봐도 할머니는 눈을 뜨지도 못하고, 혼자의 힘으로는 숨을 쉴 수가 없어서 호흡을 도와주는 줄을 코에 끼고 숨을 쉴 때마다 온 힘을 다하고 있는 듯 보였다. 다행히 할머니의 손이 파래지지 않고 살구 색을 유지하고 체온도 떨어지지 않았다. 짧게 깎은 할머니의 하얀 머리카락을 계속 쓰다듬으면서 손을 잡고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병원에 누워만 있어서 햇볕을 쬐지 못해 하얗게 창백했고, 이로 씹을 수가 없어서 영양 미음을 먹어도 영양분이 몸에 흡수되지 못해서 비썩 말라 겨울에 잎사귀가 다 떨어진 나무처럼 뼈만 앙상했다. 그래서 몸이 작았고, 눈을 감은 채로 숨을 쉬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아 같아 보였다. 사람이 태어날 때도 작은 몸집이고, 혼자의 힘으로 아무것도 못하듯이 죽어갈 때도 그와 비슷했다.


비록 눈을 못 뜨고, 말도 할 수가 없지만 아마 내 목소리를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체온을 느꼈을 것이다. 5분이 흘렀다. 간호사가 오더니 호흡하는 수치가 불안정해졌다고 줄로 된 호흡기에서 투명한 마스크 모양의 산소호흡기로 교체를 했다. 10분이 지났다. 산소 수치가 점점 떨어져서 의료진이 할머니가 급히 수혈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내게 동의서에 서명을 하게 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5분쯤 지나갈 때 갑자기 의사가 와서 산소 수치를 확인하더니 내게 당장 가족들을 불러서 오후에 하기로 예약되었던 폐에 찬 물을 빼는 시술을 지금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급히 외삼촌과 가족들을 불렀고, 10초도 안되어 모두 할머니가 누워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외삼촌과 엄마는 외할머니의 얼굴을 만지며 “엄마, 눈 좀 떠봐요. 한 번만......”하며 다급히 외쳤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아무런 미동이 없었고, 수치는 바닥으로 급격히 떨어지기만 했다. 그러더니 산소 수치가 나오는 심장박동기에서 심장 모양이 깜빡거리면서 그래프가 위로 삐쭉 튀어나온 산 모양에서 일자 모양으로 바뀌었고, “삐-이.”소리를 냈다. 나는 그런 장면을 드라마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런 일을 내가 겪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응급실에 가족들의 슬픔이 가득 찼다. 의료진은 “오전 5시 9분, 사망하셨습니다.”라고 말했고, 할머니의 작은 몸에 하얀색 천을 덮었다. 천을 덮기 전에 가족들은 할머니에게 사랑하고, 감사한다고 말했고, 늘 그녀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외우던 주기도문을 함께 읊었다. 할머니의 얼굴은 고통스러운 표정이 점점 사라지면서 어느새 편안한 표정으로 바뀌고 있었다. 늘 걱정스럽고, 몸이 아프셔서 괴로운 표정이었는데 하늘나라에 갈 때는 천사같이 순수한 모습이 되었다. ‘할머니, 더 이상 아프지 말고, 기쁨만 있는 곳에 가세요. 나중에 우리 다시 웃으면서 만나요.’     


사랑하는 할머니의 마지막에 내가 함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천국에 간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그렇지만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서는 할머니를 만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계속 눈물이 흘렀다.      

할머니의 소식을 듣고 할머니 본인의 친척들과 지인들이 많이 찾아와서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며 슬픔을 함께 나눴다. 물론 할머니의 자녀인 엄마와 외삼촌의 조문객이 많았지만 할머니를 사랑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녀가 욕심 없이 진심으로 사람들에게 얼마나 잘 대해 줬는가를 알게 되었다.      


외할머니는 내게 특별한 영혼의 지지자였다. 나는 할머니를 닮았고, 내가 태어나서 가족들에게 기쁨을 주었고, 좋은 일이 많이 생겨서 복덩이라며 나를 특별히 아꼈다. 나는 외할머니의 첫 번째로 태어난 유일한 외손녀다. 그 후로 남동생이 태어났고, 외삼촌도 2명의 남자 형제를 낳았다. 자라면서 내가 장녀이기에 항상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을 받았고, 할머니도 나를 끔찍이 생각했다.


할머니가 묻혀있는 비석 옆에 작은 묘목을 심었다. 그녀는 식물 기르는 것을 좋아했었다. 세월이 흐르면 크게 자랄 것이란다. 12월이 되면 그 나무에 성탄절 장식을 해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내 마음의 조종사(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보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