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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이비 글라스 Jul 30. 2020

하기 싫은 일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

일상 속 감상

 얼마 전 층간소음으로 귀에 귀마개를 꽂아보기도 하고, 거실에 나가 소파에서 잠을 청해 보기도 하며 나름대로 어디선가 들리는 기계 진동소리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다가 문득 침대 위치를 바꾸면 나아질까 해서 방의 구조를 새롭게 꾸몄다. 그러느라 반나절이 걸려 마치 이사를 가는 것처럼 좁은 방에 쌓여있던 모든 가구와 짐 꾸러미를 정리했다.      

 어느 정도 가구 배치를 새롭게 바꾸고 나서 꺼내 두었던 짐들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어지럽게 여기저기 자리를 못 잡은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는 틈에 수북하게 산처럼 쌓인 책들을 발견했다. 쌓아두기 전에 책장에 꽂혀있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그렇게 5개의 높은 탑처럼 쌓인 책들을 보니 예전 생각이 새록새록 나기 시작했다.    

 

 여름인 데다 높은 기온 때문에 조금만 움직여도 등줄기에 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 가운데도 갑자기 책장 속에서 잠들었던 책들이 이제는 버려지기를 기다리듯이 한 곳에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을 보니 괜히 헛웃음이 나왔다. ‘휴...’ 하는 한숨과 함께 나는 예전 공무원 수험생 시절로 잠시 돌아갔다.    

  



 몇 해 전 부모님 집에서 독립해 직장에서 가까운 옥탑 방에 살던 시절, 작은 문을 열면 옥상이 나왔었다. 매일매일이 정해진 것 없이 불안하던 때여서 아침 6시면 알람시계가 울리지 않아도 자동으로 눈이 떠졌다. 옥탑 방 안의 기온은 다른 곳 보다 높다. 말 그대로 가건물인 데다 꼭대기 층이라 햇빛을 그대로 흡수해 낮에는 특히 더 이글거렸다.


 선풍기로도 견디기 힘든 한여름에는 할 수 없이 작고 낡은 에어컨을 가동해놓고서야 겨우 책상에 앉아 책을 암기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근처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이어가곤 했었다. 갑자기 살이 찌면서 체질도 바뀌었는지 일정 온도 이상이 되면 어김없이 분수가 터지듯이 땀이 흘러내려 남들 보기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열정을 다해 책에 밑줄을 치고 중요 메모를 하고 책을 들고 다니면서 외우는 것을 반복했다.    

  

 겨울에는 외풍이 심한 옥탑방의 서늘한 온도에 대책을 세운다고 인터넷에서 구매한 따수미 텐트를 매트리스에 치고 그 안에서 몸을 녹이곤 했었다. 새벽에 눈이 떠지면 따뜻하고 낡고 포근했던 이불속이 가시방석처럼 느껴져 문을 열고 나의 마당인 옥상에 나와 기지개를 켰다. 하품을 하면 금방 희뿌연 입김이 퍼지곤 했다. 그 와중에 맑은 정신을 찾겠다며 나는 아침부터 뜨거운 커피를 끓여 머그잔에 붓고 나서 그것을 들고 옥상에 앉아 홀짝홀짝 마시며 가까이 보이는 서울 N타워(구 남산타워)를 응시했다. 도서관이 문을 여는 시간이 되기 전에 무거운 책들을 싸놓고 분주하게 씻으며 준비를 했다. 그렇게 나와 함께 했었던 그 책들…….      


 수험생은 돈이 많이 든다. 내가 7년간 일해서 모은 돈이 주식으로 날아갔다. 그러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교통사고로 치료를 받아야 하자 일하던 직장에서 퇴사를 했다. 그래서 돈이 없었다. 그 당시 월세로 드는 돈도 더 이상 못 낼 것 같은 불안한 때를 겪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남들처럼 노량진 고시학원 근처에 거처를 마련해 공시 학원에 등록해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다. 일단 주머니에 있던 돈을 꺼내어 공무원 시험에 필요한 과목의 기본서 교재를 샀다. 그렇게 나는 서울역 후암동 작고 낡아서 개조된 옥탑방 가건물에서 비상금을 털어 간신히 기본이론 강의를 들으며 공부를 시작했다. 시험 과목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어서 막막했고, 돈이 없어서 가슴이 답답했던 그 시절이 지금 방 한구석에 쌓인 책들을 보니 생각이 났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나는 힘들게 공부를 하면서 오히려 몸과 마음을 정화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공부에 집중하느라 주식으로 잃은 돈에 대한 아깝고 억울하고 분하고, 불안한 감정들로 고통스러웠던 정신적 상처를 줄여나갈 수 있었다. 당시 대사증후군을 앓으며 교통사고 후유증까지 겹쳐서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누워서 치료를 받던 순간에도 엎드려서 책을 보며 암기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열정을 다할 것이 없었다면 나는 벌써 화병으로 미쳐버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목표를 향해 바쁘게 나가다 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예전 모습으로 회복될 수 있었다. 그런 아픈 추억이 서린 책들을 버리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며칠 전 베스트셀러 <지쳤거나 좋아하는 게 없거나>를 읽다가 ‘작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라는 글을 읽으면서 나 또한 공감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작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적당한 시점에서 포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10년간 태권도 선수 생활을 했지만 허리디스크에 걸려 그만두었다. 수술 후 완치가 되었지만 선수 생활을 다시 하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끈기가 없다고 하고 아깝지 않냐고 했다. 그 후 6년간 의류사업을 했고 마지막 사업이 잘 되었지만 포기하였다. 주위에서는 한 가지 일을 끈기 있게 못 한다고 하였다. 2년간 광고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광고회사를 꿈꿨지만 포기하였다. 주위에서 조금만 더 해보지 그랬냐고도 했다.      


 그리고 그는 작가가 되고 싶어 글을 썼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그는 자신을 작가의 길로 데려다준 건 하다가 하기 싫은 걸 포기할 수 있는 용기였다고 했다. 끈기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해서 싫은 일을 평생 하고 싶지 않았단다. 그는 또 자신이 차라리 끈기 없는 사람이 되겠다고 했다. 대신 그가 끈기 있게 하고 싶은 일을 끈기 있게 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공무원 시험을 오래 준비하는 것과 같이 무언가를 오래 준비했는데 하기 싫은데 준비한 시간이 아까워서 아니면 끈기 없는 사람이 될까 봐 계속 그것을 준비한다면 그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일 수 있다고 했다. 어떤 순간에도 하기 싫은 것을 꼭 해야 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나의 상황과 공통점이 있어서 그 자체로 용기가 생겼다. 마치 작가가 내게 ‘넌 지금 네 길을 잘 가고 있어.’라고 응원해주는 것으로 들렸다.      


 나 역시 영문과를 졸업하고, 영어교육 석사과정을 졸업해서 6년간 영어강사를 했지만 그것을 계속 이어서 하지 않고 영어 번역 일을 했다. 그러다가 그 후에 대학교에서 영어교육 연구원으로 일을 하기도 했다. 거기서 머물지 않고 나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었던 거였다.      


 어려움 속에서 수험시절을 겪다가 지금은 글을 쓰는 일을 하는 작가가 되어 책을 써서 그것이 출간되었다. 그 책을, 그리고 앞으로 내가 쓸 책들을 많은 이들이 읽는다고 생각하면 거기에서 진정으로 큰 보람이 느껴진다. 물론 나도 내 책에 이런 심정을 언급하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들을 생각해보니 아까 그 작가의 말처럼 하기 싫은 것을 굳이 계속할 이유는 없었다. 계속해서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포기하는 것도 내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들이었기에, 결심하고 새 일을 할 때마다 도전이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그 포기가 있었기에 지금 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포기하는 용기와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하고 싶지 않은 것을 포기하는 용기를 내는 모든 이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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