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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Sep 24. 2021

다정한 기계

( 젓가락 볼펜 )

곤지암을 지나기는 길, 대형 식자재 마트가 눈에 띄었다. 나의 작은 주방 속 재료들 말고, 큰 세상 속 재료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궁금했다. 집 앞의 마트에는 없는 것이 있을 것 같은 호기심에 그곳으로 향했다. 도착하자 입구와 출구를 찾지 못한 차들이 동동거리고 있었다. 주차장은 혼돈 그 자체였다.

앞의 차 한 대가 후진해야 했다. 우리는 멀찍이 떨어져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앞에 있던 차가 후진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기에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차를 보며 


‘멈추겠지, 멈추겠지. 설마…….’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쿵      

그대로 부딪혔다. 

내리막길이었기에 몸이 흔들릴 만큼의 충격이 있었다. 



여러 번의 사고를 경험하면서 사고는 누구의 과실인가를 떠나 그 자체로 번거로웠다. 찌그러진 차를 정비소에 맡기고, 수리하고, 다시 정비소에 가서 우리 차를 가져와야 했다. 쿵 하는 소리는 정돈된 일상이 엉키는 소리였다.     


차 귀퉁이가 심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잠시 뒤, 보험회사의 직원이 왔다. 차량 바퀴가 부딪쳐 운행에 위험할 수 있으니 그대로 서비스센터로 차를 견인하는 게 좋다고 했다. 대신 다른 차를 빌려주겠다고 했다. 빌려준 차는 아우디의 최신형 모델이었다. 차에 탔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투덜거리던 우리는 감탄하기 시작했다. 3초 만의 일이었다.    

  

“기계 판이 다 LCD네. 좌석에 쿨링 시스템도 돼. 켜줄게.”     


그 말과 동시에 등에 계곡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엉덩이가 튜브 아래 물에 빠진 듯 시원해졌다. 누군가 땀 흘리는 내게 부채질을 해주는 기분이었다.

후진할 때였다. LCD 판에 후방카메라 말고도 드론처럼 위에서 찍은 영상이 함께 제공되었다. 분명 차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어떻게 이런 각도의 영상이 나오는 것인지, 내 상상의 범주 안에서 제공되는 기술이 아니었다. 후방카메라뿐 아니라 위에서 찍은 영상까지 나오니 주차하기에 정말 편했다. 

기계의 배려에 우울한 기분은 지나가는 터널처럼 사라졌다.     

집에 다 도착해서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시동을 껐다. 안전띠를 풀고 나가려는데 안전띠 버튼 가장자리가 야광으로 빛났다. 어둠 속에서 버튼을 찾느라 더듬거리지 않아도 되었다. 밤길을 비춰주는 조명 같았다.

기분 좋게 안전띠를 풀고 문을 열었는데 바닥에 차의 로고가 그려졌다. 문 아래에서 레이저를 쏘는 듯, 문이 움직일 때마다 로고도 따라 움직였다. 먼지처럼 사소한 지점에 마음을 쿵 하고 떨어뜨렸다.      


감동은 큰 태풍처럼 오지 않고, 쓱 하고 산들바람처럼 다가왔다.     


백화점에서 먼저 간 사람이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 줄 때처럼.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누군가 냅킨 위에 숟가락, 젓가락을 얹어 세팅하는 것처럼. 

한쪽은 그늘이고 한쪽은 햇빛인 테이블에 먼저 온 사람이 햇빛에 앉을 때처럼.     

고요하게 왔다.     


다정함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계에도 다정함은 존재했다.             



  




< 오늘의 언박싱 _ 젓가락 볼펜 >


언제부턴가 시치미를 떼고 있는 볼펜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안경인 줄 알았더니 볼펜.

물감인 줄 알았더니 볼펜.

물고기인 줄 알았더니 볼펜.


이번에 눈에 띈 건 젓가락인 줄 알았더니 볼펜.이었다.


원래의 기능을 숨기는 그 능청스러움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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